마정록 8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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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86화
86화
“아니오. 의협지사라면 당연히 할 일을 했소. 누가 감히 단 형의 행동을 나무랄 수 있단 말이오?”
의협지사!
북궁천은 그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졌다.
려려도 천기룡의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괜찮은 사람이군. 삼성궁의 청년 중에선 제일 나아 보여.’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그런 음마가 또 있다면 어떻게 하겠소?”
“그야 당연히 잡아서 참형에 처해야지요.”
“당주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패 죽여야 한다고 하시던데, 천 형의 생각은 어떻소?”
천기룡은 북궁천의 질문에 묘한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느끼고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를 지은 게 확실하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할 거요. 그게 누구든.”
북궁천은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천기룡을 직시한 채 담담히 말했다.
“지금하신 그 말, 잊지 마시오.”
천기룡은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뛰어난 사람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은 터라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고 왔다.
그런데도 눈빛이 마주친 순간 부동심이 무너져 버린다.
‘믿어지지 않는군. 천하에 이런 자가 있다니.’
하남강호의 청년 중 자신의 위에 둔 사람은 사공강후밖에 없었다. 구양우경도 평수로 생각했을 뿐.
하지만 직접 만나 본 단화린은 그에게 천외천이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숨을 깊이 들이쉰 그는 북궁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단 형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소. 말해 주실 수 있겠소?”
“모르는 게 좋소. 그냥 회룡당 이대의 대원으로만 아시오.”
그 때였다.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들은 북궁천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질 즈음, 방문이 반쯤 열리고 공손설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방 안을 둘러본 그녀는 북궁천을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손님이 계셨네요? 들어가도 돼요?”
북궁천이 툭 쏘아붙였다.
“뭐하러 왔냐?”
“심심해서 오빠하고 놀려고 왔어요. 들어가도 괜찮죠?”
“이미 들어와 놓고 묻긴 왜 물어?”
공손설은 배시시 웃으며 방문을 닫았다.
북궁천의 말대로 그녀는 말을 하는 사이 이미 방 안에 두 발을 다 들여놓은 상태였다.
웃는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문 그녀는 깡충거리며 북궁천 앞까지 다가왔다.
그녀는 고개를 쑥 내밀고 천기룡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공손설이라고 해요. 오빠 친구세요?”
그녀를 본 순간부터 석상이 되어 있던 천기룡은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예를 취했다.
“천기룡입니다. 철군성의 공손 소저를 여기서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꼬마 계집애를 만난 것 가지고 무슨 영광까지나…….”
중얼거리며 혼잣말처럼 투덜거린 북궁천은 공손설을 째려보았다.
“너 정말 안 갈 거냐? 곧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거야?”
“피이, 오빠는 걱정 마세요. 저 지켜 줄 분들 많으니까.”
“뭐? 지켜 줄 사람이 많아? 너 하나 지켜 주려다 다른 사람들 구하지 못하면. 그로 인해서 죽어 간 사람들 목숨을 네가 책임질 수 있어?”
북궁천은 오냐 잘됐다는 듯 공손설을 몰아붙였다.
찔끔한 공손설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건 생각 못 했어요.”
“여긴 전쟁터다. 네 놀이터가 아니야. 너 때문에 사람들이 죽으면, 그 사람들 가족에게 뭐라고 할 거냐? 네 목숨만 특별하고, 그 사람들 목숨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냐?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공손설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를 다그치던 북궁천은 그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렇게 되는 걸 원치 않으면 빨리 돌아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 끼치지 말고.”
그런데 공손설이 어깨를 들썩였다.
“미안해요. 저는 그냥 오빠가 보고 싶어서 왔을 뿐이에요. 저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건 저도 싫어요.”
울먹거리는 그녀를 보고 북궁천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 고개를 숙인 공손설의 눈에서 이슬이 툭 떨어졌다.
눈이 휘둥그레진 북궁천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너, 우냐?”
“안 울어요.”
“그런데 왜 눈물이 떨어져?”
“이건 눈물이 아니라 제 마음이에요. 제 마음이 바닥에 떨어져서 부서지는 거예요.”
“아, 그 자식. 말 한번 어렵게 하네. 눈물이면 그냥 눈물이지, 뭔 마음이 어쩌고저쩌고…….”
“미안해요, 제가 원래 눈물이 좀 많아요.”
북궁천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서 품속에 뭐가 없나 찾아봤다. 그런데 천으로 된 것은 돈주머니밖에 없었다.
그는 은자와 금자를 탁자 위에 쏟아 내고 그녀에게 내밀었다.
“닦아.”
공손설의 눈물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던 천기룡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슬쩍 북궁천을 살펴보던 공손설도 돈을 돌처럼 쏟아 내고서 빈주머니를 내미는 그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그냥 소매로 닦아도 돼요.”
“코도 풀어야지. 콧물이 금방 떨어질 것 같다. 빨리 받아.”
언제 울었냐는 듯 공손설은 북궁천을 째려보았다.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여자에게 콧물 운운하다니.
‘으이그, 저런 오빠를 좋아하는 내가 미쳤지.’
그녀는 주머니를 홱 낚아채더니 두어 번 눈물을 찍어 내고 팽, 코를 풀었다.
그리고 콧물이 가득 묻은 주머니를 북궁천에게 내밀었다.
북궁천은 두 손가락으로 주머니를 받았다.
“제길, 하필 입구에 몽땅 묻어서 집어넣기도 애매하네.”
쓱쓱, 소매로 나머지 눈물을 닦아 낸 공손설이 그를 보며 말했다.
“내일 갈 거예요. 그러니까 제 걱정은 마세요. 대신 오빠가 석 달 내로 철군성에 들러야 돼요. 만약 안 찾아오면 제가 방방곡곡에 소문내면서 찾아 나설 거예요.”
“뭔 소문을 내?”
“여자와 약속도 안 지키는 어떤 사람에 대한 소문이죠. 신의는 길거리 개똥처럼 생각하고, 의협심은 눈곱만큼도 없고…….”
북궁천이 재빨리 손을 들어서 그녀의 말을 막았다.
“석 달이라고 했지? 알았다. 가지, 뭐.”
공손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럼 가 볼게요. 이야기 많이 나누세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천기룡이 앞으로 나섰다.
“저,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소저.”
북궁천이 척 손을 들어서 그를 막았다.
“소저는 무슨? 천 형은 앉아 보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예?”
북궁천은 의아해하는 천기룡을 보지도 않고 이조량을 불렀다.
“조량.”
“예, 대형.”
“네가 설아 좀 데려다 주고 와라.”
공손설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방을 나섰다.
천사교가 내려오고 있다는 말에 그녀도 내일쯤 떠나려 했다. 그래서 북궁천을 찾아왔다. 철군성에 온다는 약조를 받기 위해서.
그런데 눈물 몇 방울에 목적을 완수했으니 기분 좋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겉보기보다 순진한 오빠라니까. 여자의 눈물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북궁천은 그녀의 가벼운 걸음걸이를 보고 왠지 속은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 뭘 속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여우같은 게 분명 목적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 왜 순순히 나가지?’
그 때 천기룡이 그에게 물었다.
“하실 말씀이 뭐요, 단 형?”
북궁천은 의문을 접고 그에게 말했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언제든 내가 도움을 청할지 모르오. 그때 나를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소. 원래 사공 형이 도와주기로 했는데 영진으로 가서 힘들 것 같소.”
“무슨 일인데……?”
“힘든 일은 아니오. 옆에서 확인만 해 주면 되는 일이니까.”
5장. 단화린의 정체는……
어둠이 깔리고 밤이 깊어 갈 즈음, 선우중은 초조함을 억누르기 위해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한때의 불장난이 이렇게 발전할 줄은 자신도 생각을 못 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했던 것이 어느새 자신의 목을 옥죄는 칼이 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호 형만 만나지 않았어도…….’
장안의 기루에서 만난 호유는 신비한 사람이었다. 무공도 강하고 돈도 많고 말솜씨마저 좋았다.
그는 세상에 어려운 것이 없는 듯 어떤 일이든 쉽게 처리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도 그에게는 꼼짝을 못 했다.
게다가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아서 그는 혼자서만 여인을 탐하지 않았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 그게 호유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약이 있는데, 그 약을 복용하면 밤새도록 여인을 탐해도 기가 쇠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작용도 일체 없고.
그는 호유를 믿고 그 약을 복용해 보았다.
사실이었다. 그날 밤 그는 상대 여인을 실신지경까지 몰아넣고 정복자의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부터 호유가 친 그물에 갇혀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구양우경을 그에게 소개시킨 것도 그즈음이었고, 자극적인 놀이를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구양우경의 몰락을 접한 후에야 자신이 수년간 미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자신은 썩은 새끼줄을 잡고서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신세였다.
자신을 뒤돌아본 후 처음 느낀 감정은 절망이었다. 그리고 회한이 밀려들었다.
그는 부친이 철은보에 가자고 했을 때도 몇 번이나 망설였다.
구양우경이 실성해서 제정신이 아니라 했다. 자신을 보면 엉뚱한 소리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고심 끝에 결국 부친을 따라왔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 하랴!
‘그의 입을 막아야 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를 악문 그의 두 눈에서 스산한 살기가 일렁거렸다.
천사교와 싸우기 위해 팔백이 넘는 무사가 출동했다.
그들이 돌아오면 움직이기가 그만큼 힘들어질 터. 더구나 날씨가 오락가락해서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좋아, 오늘 처리하자.’
결심을 굳힌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이 짙어지는 시각. 밖으로 나가자 바람이 세차게 불어 댔다.
조금씩 날리는 눈이 얼굴을 때렸다.
그래도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뼛속까지 파고들던 냉기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거처를 나선 그는 구양우경의 거처를 향해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장원 전체가 한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나다니던 사람 중 누가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면, 그는 건성으로 인사를 받으면서도 웃음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별원 앞에 도착한 선우중은 슬쩍 안쪽을 살펴보았다.
화톳불이 타오르는 주위로 경비무사들이 오가고 있었다.
모두 셋. 복장을 보니 삼성궁의 무사들이었다. 구양우경의 방에서 신음과 중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는데도 그들은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그는 담을 타고 빙 돌아서 건물의 뒤쪽으로 갔다.
건물 뒤쪽은 아예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속으로 셋을 세며 주위를 관찰한 그는 재빨리 담을 넘었다.
담을 넘자마자 한 걸음에 이 장을 움직인 그는 훌쩍 몸을 날려서 건물의 처마 밑에 달라붙었다.
귀를 기울이자 방 안에서 나직하게 낄낄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