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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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81화
81화
“궁으로 가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뭐냐?”
숨을 몰아쉰 헌원려려는 결심을 굳힌 눈빛으로 구양환의 눈을 직시했다.
“포원산장으로 돌아가겠어요. 죄송해요.”
구양환의 눈이 서문각을 향했다.
“장주, 파혼을 하겠다는 것이오?”
서문각은 최대한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당장 혼인을 치를 수도 없는 상태가 아닙니까, 궁주? 파혼을 한다기보다,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잠시 혼인을 미루자는 것이지요.”
구양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말이 미루자는 것이지 파혼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구양우경의 상태를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자신이라 해도 그리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약혼녀마저 떠나면 구양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싸늘해질 터. 그걸 알 텐데도 딸을 보내겠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자존심이 상한 그는 서문각과 헌원려려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당장은 안 되오. 하다못해 우경이가 다른 사건과 관련 없다는 것이 밝혀질 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려 주시오.”
“허, 궁주…….”
서문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처음에는 헌원려려의 청을 듣고서 망설였다.
삼성궁주와 사돈이 된다는 것은 천만금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었다.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큰 떡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 마음을 바꿨다.
구양우경은 음마가 분명하고, 음마를 사위로 맞이하면 세상이 포원산장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며 거리를 둘 거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차분히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옳았다.
‘구양우경이 음마라는 게 확실해지면 삼성궁의 후계자는 다른 가문으로 넘어간다. 비룡가나 신도가에 뛰어난 젊은이가 어디 한둘인가? 그 친구들 중에서도 이 아이를 탐하는 자가 있을 거야.’
그렇다면 그 전에 구양우경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해야 한다.
내심 마음을 정리한 서문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궁주, 죄송하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소이다. 애가 워낙 큰 충격을 받아서…….”
“며칠도 못 기다려 준단 말이오?”
다그치듯 묻는 구양환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서문각은 한 발 물러섰다.
삼성궁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궁주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며칠이라…… 하긴 궁주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제 욕심만 챙길 수도 없지요. 좋습니다, 그럼 닷새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결과가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닷새.
충분할 수도 있고, 미흡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양환도 그 정도에서 만족했다.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꼭 하나만 있으란 법은 없으니까. 그리고 닷새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에 아주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고맙소. 어려운 상황에서 결단을 내려 준 장주께 언제든 보답하리다.”
“허허허허,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어디 궁주와 제가 이런 일로 보답 운운할 사이입니까? 어쨌든 잘 해결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서문각은 마지막까지도 구양환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구양환은 구렁이처럼 은근슬쩍 넘어가는 서문각이 얄미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군 하나가 아쉬운 상황. 서문각의 너스레를 순순히 받아 주었다.
“장주가 그리 말씀하시니 마음이 든든하구려. 그럼 이만 가 보겠소.”
“회의 때 뵙겠습니다, 궁주.”
헌원려려는 방을 나서는 구양환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북궁천이 닷새를 기다려 줄까?
지금까지 기다린 것을 생각한다면 긴 시간은 아니었다.
문제는 닷새 안에 결론이 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 가서도 구양환이 보내 주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어. 궁주가 계속 붙잡아 두려 하면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하는 수밖에.’
몰래 이곳을 떠나서 진아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더 거리낄 게 없는 것이다.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결심을 굳힐 때, 서문각이 구양환을 배웅하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구양우경에 대해 재차 확인했다.
“려아야, 구양우경이 음마라는 것은 확실하겠지?”
“예, 고숙.”
“네 말이 옳다면 구양가와의 관계를 끊어야겠다. 려아 너는 시간 날 때 비룡가와 신도가의 공자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라.”
“예?”
헌원려려는 서문각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서문각은 수염을 비비 꼬며 입술을 기묘하게 비틀었다.
“놀랄 것 없다. 구양우경과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뭐가 어떻단 말이냐?”
헌원려려는 서문각의 욕심에 어이가 없었다.
‘고숙,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
* * *
구양환은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섰다.
하지만 방문을 닫음과 동시, 눈을 치켜뜨고 이가 드러날 정도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제 클 만큼 컸다 이건가? 흥! 서문각, 내가 그리 쉽게 무너질 줄 아느냐?’
그 때 방문이 열리고 구양영이 들어왔다.
그는 구양환에게 바짝 다가가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구양환은 숨을 몰아쉬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몸을 돌렸다.
“뭐냐?”
“단화린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순간 구양환의 눈빛이 하얗게 빛을 발했다.
“그래? 말해 봐라, 대체 어떤 놈이더냐?”
입을 여는 구양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북천을 피로 물들인 포악한 마제에 대해서 들어 보셨을 겁니다.”
“북천마제 말이냐?”
무심코 되묻던 구양환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설마…… 그놈이 북천마제라는 말은 아니겠지?”
구양영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북천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는 그가 뭐하러 이곳에 오겠습니까?”
더구나 삼성궁의 말단 무사로 들어오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일이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그럼 누구란 말이냐?”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그자가 보낸 사람일 확률이 큽니다.”
“그자가 왜 이곳에 사람을 보낸단 말이냐?”
“몇 가지 소문을 종합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무슨 소문 말이냐?”
“북천마제가 한 여인에게 빠져서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바로 헌원려려라고 합니다.”
“헌원려려? 서문각의 양녀인 서문려려 말이냐?”
“예, 형님.”
구양환은 그제야 구양영의 말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음을 직감하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으음, 북천마제가 헌원려려를 빼 가기 위해서 사람을 보냈다, 그 말이지?”
“바로 그겁니다, 형님.”
“그런데 놈이 누구기에 우경이를 단숨에 꺾을 수 있는 실력을 지닌 거지?”
“북천마궁에 그 정도 실력을 지닌 젊은 고수가 있다고 합니다. 흑룡대주 장추람이라는 자인데, 키가 크고 체격도 좋은 데다가, 성격이 차갑고 무공마저 막강해서 북천마제가 가장 아끼는 북천사룡 중 수좌라 합니다.”
모든 조건이 단화린과 일치한다.
구양환은 눈빛을 싸늘하게 빛내며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북천마궁은 중원의 정도 문파와 어울릴 수 없는 새외의 마도 세력.
단화린이 정말 북천마궁에서 온 자라면 처리할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아주 좋은 정보군. 수고했다, 아우.”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야 본 가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형님.”
구양환은 구양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우처럼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들이 본 가에 있는 한 본 가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형님, 그놈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장 무림맹과 천무회에 알리고 놈을 잡아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놈의 정체를 밝힐 증거가 있느냐?”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만, 정황상 놈이 북천마궁의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형님.”
구양환의 표정에 아쉬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역시 단화린을 잡아서 자신의 아들보다 몇 배의 고통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검신가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안 좋았다.
당장 단화린을 북천마궁의 궁도로 몰아붙이면, 사람들은 검신가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그를 제물로 삼으려 한다고 생각할지 몰랐다.
설령 단화린이 정말 장추람이라 해도, 천사교와 싸우기 위해서 왔을 뿐이라고 하면 더 몰아붙일 수도 없다.
놈 하나만 제거한다고 해서 끝날 문제도 아니고.
“일단은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는 게 중요하다. 놈은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잡은 후 처리해도 늦지 않아.”
“그러다 놈이 서문려려를 데리고 도망가기라도 하면……?”
“도망간다?”
나직이 구양영의 말을 되뇌던 구양환의 입술이 묘하게 비틀렸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예?”
“놈이 서문려려를 데리고 도망가면 우리에게 놈을 칠 확실한 명분이 생기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그녀는 우경이의 약혼자가 아닙니까?”
그 말에 구양환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조금 전에 서문각과 그 아이를 만나고 왔다. 파혼을 하자더군. 우경이가 그 꼴이 되니 행여나 자신들에게 오물이 튈까 봐 걱정인 모양이야.”
“그게 정말입니까?”
“포원산장으로 돌아가겠다고 당당히 말하더군. 흠이 있어도 우경이를 봐서 참고 받아들였더니…… 나와 본 궁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어찌 감히 그 따위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참으로 어이가 없군요. 서문각이 겉과 달리 욕심이 많은 자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만, 감히 형님에게 등을 돌리다니요? 흥, 그렇다면 서문려려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동안 너무 잘해 줬어. 종은 종으로서 대해야 했거늘, 힘이 좀 커졌다고 주인의 등에 올라타려고 하다니…….”
구양환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서문려려는 북천으로 가고 싶어도 혼자 가지 못한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 점을 이용하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을 듯했다.
‘이놈, 멍석을 깔아 줄 테니 어디 마음껏 놀아 봐라.’
나름대로 단화린과 헌원려려에 대한 대책을 세운 그는 구양영을 바라보았다.
“천사교가 움직이면 군웅들도 내분이 격화되는 것을 원치 않을 거다. 그때 놈을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놈의 목적이 밝혀지면 우경이에 대한 의심도 많이 희석되겠지.”
“아무래도 그럴 겁니다. 놈이 우경이를 음마로 몬 이유가 서문려려를 빼돌리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설득하면 군웅들도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훗, 서문각의 얼굴이 볼 만해지겠군.”
구양환의 냉소가 짙어지자, 구양영이 눈빛을 묘하게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천사교가 빨리 움직일수록 놈에 대한 처리도 빨라지겠군요. 맡겨 주신다면 제가 한번 천사교를 움직여 보겠습니다, 형님.”
“가능하겠느냐?”
“그들이 대규모로 이동한다는 말만 들려도 군웅들의 시선이 집중될 겁니다. 그 정도라면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겨울에 벌어지는 싸움은 양편 모두에게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한다.
추운 날씨에 수백 리를 이동한다는 것도 쉽지 않고, 그렇게 이동해서 적을 공격한다 해도 몸이 지쳐서 그만큼 불리해진다.
전력이 엇비슷한 상황에서 그 차이는 승패와 직결될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