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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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74화
74화
그 이름 밑에는 아직 표식이 두 개밖에 없었다. 적어도 네 가지에 대해선 판단이 섰어야 정상이거늘.
특히 과거의 행적 부분에서는 막막하기만 했다.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생각해 보니 그의 과거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를 의심한다면 철은보에 있는 사람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는 말과 같았다.
‘한번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고민하던 임강령은 책자를 가슴에 집어넣고 방을 나섰다.
10장. 사냥
북궁천은 유원당을 만나기 위해서 상남으로 향했다.
백검맹은 아무래도 삼성궁과 천무회, 무림맹에 비해서 그 세가 약했다. 더구나 뒤늦게 합류한 터라 그러잖아도 좁은 철은보에 거주할 곳이 없었다.
그 바람에 객잔 하나를 거처로 쓰고, 혹시 모를 긴급회의에 대처하기 위해서 그날그날 간부들이 철은보를 오갔다.
‘하긴 눈칫밥 먹는 것보다는 그게 편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가 정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서너 사람이 뒤를 따라왔다.
“단 시주, 어딜 가시는 길이시오?”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무당의 명우가 두 사람과 함께 그를 향해 다가왔다.
“만날 분이 있어서 상남에 가는 중이오.”
북궁천은 짧게 대답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명우와 그의 일행이 곧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한 사람은 승려였고, 한 사람은 속인이었다. 둘 다 나이가 이십 대 중후반 정도였다.
“남궁성이라 하오. 명우 도형의 말씀을 듣고 한번 뵙고 싶었소.”
둘 중 턱이 각진 청년이 말했다. 등에 오색 수실이 매달린 검을 찬 그는 말을 하고 북궁천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따라온 거요?”
“아미타불, 빈승은 소림의 지광이라 하외다. 겸사겸사 바람을 쐬려고 나왔소이다.”
젊은 승려가 그렇게 말하며 담담히 웃었다. 얼굴이 둥글고 초승달처럼 가느다란 눈이 부드럽게 휘어져 있어서 선하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럼 바람이나 쐬고 돌아가시오.”
북궁천은 그들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뜻을 받아 줄 때가 아니었다.
은연중 그들의 뜻을 거절한 그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의 몸이 유수처럼 흐르더니 순식간에 세 사람과 칠팔 장의 거리가 벌어졌다.
서로를 마주 본 세 사람은 북궁천을 따라잡기 위해서 땅을 박찼다.
그러나 북궁천이 더 빠르게 가는 것 같지 않은데도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호승심이 동한 그들은 본격적으로 신법을 펼쳤다.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들이 빨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북궁천이 공연한 경쟁을 하기 싫어서 속도를 높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세 사람이 자신의 앞으로 나서자 걸음을 더 늦췄다. 그리고 갑자기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북궁천을 앞지르며 내심 쾌재의 미소를 짓던 세 사람은 급히 그를 따라서 꺾어졌다.
철은보와 상남의 중간에서 동쪽으로 오륙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제법 넓은 소나무 숲이 있었다.
북궁천은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백여 장을 걷다가 공터가 나오자 걸음을 멈췄다.
곧이어 명우를 비롯한 세 사람이 그가 있는 곳에 내려섰다.
그곳까지 오는 동안 거리가 줄지도 벌어지지도 않았다. 그들은 방향을 틀기 전 자신들이 그를 앞지른 것은 운도 실력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상대가 경쟁할 생각이 없었던 것일 뿐.
그런데 공터로 자신들을 데려온 걸 보니 마음을 정한 듯했다.
명우는 포권을 취하면서 사과부터 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오, 단 시주.”
하지만 그의 형형한 눈빛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반기는 눈치였다.
남궁성과 지광도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북궁천은 명우와 남궁성, 지광을 차례차례 돌아보았다.
귀찮아서 상대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문득, 세 사람을 상대로 무림맹의 능력을 알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는 일단 세 사람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끝내는 게 좋겠소. 셋이 한꺼번에 덤비시오.”
“…….”
세 사람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자신들은 소림과 무당과 남궁세가의 제일 기재로, 무림맹에서 칠영(七英)이라 불리는 일곱 기재 중에 속한 사람들이다.
자신들 셋이 힘을 합하면 절대지경에 이른 고수라 해도 자신 있거늘, 함께 덤비라니.
저자가 지금 제정신인가?
그렇게 셋을 셀 시간이 흐를 즈음, 남궁성의 입에서 분노가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오만하군.”
그는 먼저 앞으로 나서더니 등으로 손을 뻗어 검을 뽑았다.
“내가 먼저 그대의 오만을 손봐 주겠소.”
북궁천은 좌수 엄지로 검을 툭 밀어 올리고는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을 대로.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까. 대신 후회는 말도록.”
명우와 지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검을 뽑으시오!”
남궁성이 북궁천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북궁천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내 검은 내가 알아서 뽑을 것이니 걱정 말고 공격하시오.”
무시당한 기분이 든 남궁성은 이를 악물고 검을 중단으로 들어 올렸다.
“그대가 택한 일이니 후회하지 마시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땅을 박찬 그는 이 장의 간격을 찰나에 좁히며 북궁천을 공격했다.
쉬익!
직선으로 뻗어 가는 그의 검에서 푸른 검기가 넘실거렸다.
날아드는 검을 무심히 바라보던 북궁천은 그 자리에 우뚝 선채 검을 뽑았다.
시커먼 묵광이 그의 옆구리에서 쭉 솟구친 순간!
쾅!
검끼리 부딪친 거라 믿을 수 없는 굉음이 울리고, 날아들던 남궁성의 몸이 옆으로 날아갔다.
강할수록 구부러지지 않는 법.
그는 만근의 힘에도 밀리지 않을 강함으로 공격했기에 더 강한 힘과 부딪치자 꺾어지지 않고 튕겨 나간 것이다.
이 장을 날아가서 내려선 남궁성의 얼굴이 해쓱했다.
검신을 통해서 밀려든 거력에 팔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얼얼하다.
‘제길, 역시 소문이 거짓은 아니었군. 괜히 힘으로 부딪쳤어.’
이를 지그시 악문 그는 힘이 아닌 기교로써 상대하기로 했다. 상대가 강력한 패공을 익혔다면 맞부딪쳐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삼 보를 움직인 그는 그사이 진기를 순환시켜서 얼얼한 몸을 풀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북궁천이 검을 사선으로 내린 순간, 번개처럼 몸을 날리며 재차 공격을 가했다.
일검 비무로 호된 충격을 받은 그는 변화가 중심적인 창궁십이검을 펼쳤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잘게 쪼개지고, 시퍼런 검영이 그 사이로 스며들었다.
스스스스스!
허공에 만발한 검화가 그물처럼 덮어오는데도 북궁천은 느릿하게 검을 들었다.
그리고 일순간, 검화의 중심을 향해 벼락처럼 내질렀다.
후우웅!
벼락에 바람이 뚫리며 기묘한 소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
쾅!
또 다시 전과 다름없는 굉음이 소나무 숲을 뒤흔들었다.
순간, 허공에 만발하던 검화가 산산이 부서지며 가루처럼 흩어졌다.
“크윽.”
남궁성은 나직한 신음을 토해 내며 주르륵 물러났다.
중심을 잡고 북궁천을 쳐다본 그는 괴이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북궁천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저 발이 세 치쯤 땅을 파고들었을 뿐.
그 모습을 보자 가슴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내가 겨우 이것밖에 안 되었던가?’
자격지심이라면 자격지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남궁세가 제일의 기재로 살아온 그에게는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자신에 대한 분노로 얼굴이 벌게진 그는 전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북궁천을 노려보며 검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렸다.
힘으로 부딪치지 않았는데도 전과 다름없는 결과가 나왔다. 일반적인 무공으로는 상대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뜻.
아직 완성하지 못한 세가 제일의 검공. 제왕검만이 상대의 벽을 넘을 수 있을 듯했다.
잘못하면 자신도 적잖은 타격을 받을지 모르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
고오오오.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린 그의 검이 울음을 토해 냈다.
검신을 타고 시퍼런 검기가 쭉 뻗어 나가더니 영롱한 형체를 갖추었다.
그때였다. 북궁천의 냉랭한 목소리가 그를 짓눌렀다.
“아직 생사를 건 싸움을 해 보지 못했나 보군. 그런 마음으로 저번에 천사교와 싸웠다면, 백이면 백 죽었을 거다.”
남궁성의 눈빛에 잔물결이 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대 부친에게 가서 물어봐라. 그라면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저번처럼 험악하고 힘든 싸움은 평생 처음으로 겪어 봤을 테니, 물어보면 해 줄 말이 많을 거다.”
“아버님께 물어보라고?”
“보이기 위한 검과 죽이기 위한 검은 다르다. 그리고 살기 위한 검은 더 다르다. 그대 부친이라면 그 차이를 알 거다.”
남궁성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검에서 뻗어 나오던 검기가 힘없이 스러졌다.
그는 북궁천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더니 검을 내렸다.
“오늘은 내가 졌소. 하지만 한 번 졌다고 해서 이대로 포기하지는 않을 거요. 나중에 더 강해진 후 오늘의 빚을 갚겠소.”
“기다리지.”
대신 북천까지 와야 할 것이다. 그곳에 와서도 같은 마음일지는 그때 가 봐야 알겠지만.
북궁천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명우와 지광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누가 할 건가?”
“빈승이 해 보겠소.”
의외로 명우보다 지광이 먼저 나섰다. 그가 더 느긋한 성격일 줄 알았거늘.
북궁천은 검을 집어넣고 두 주먹을 쥐었다 폈다.
“삼초로 하지.”
지광은 그가 검을 집어넣자 묘한 표정을 지었다. 꼭 울 것 같은 표정.
“빈승이 무기를 들지 않았다 해서 검을 거둘 필요는 없소이다.”
“내 주먹을 받아 낸다면 생각해 보지.”
지광은 북궁천의 북두패왕권 삼초식을 무사히 받아 냈다.
그리고 대웅전 부처처럼 좋던 인상이 사찰 입구의 천왕상처럼 일그러졌다.
대력금강장과 백보신권을 전력으로 펼치고도 일곱 개의 깊게 찍힌 발자국을 남긴 지광은 잘게 떨리는 손으로 반장을 취했다.
“빈승이 졌소.”
북궁천은 마지막 한 사람, 명우를 바라보았다.
명우는 두 사람과 조금 달랐다.
검을 단 두 번 펼쳐서 남궁성의 의지마저 무너뜨렸다. 삼초의 권법으로 소림의 자존심을 뭉갰다. 그러고도 꿈쩍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단화린이다.
‘저자는 산이다.’
그의 눈에는 북궁천이 마치 산처럼 보였다. 그런데 자신은 아직 산을 무너뜨릴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대결을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소. 솔직히 말해서 빈도는 아직 단 시주를 넘어설 자신이 없소. 하지만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올 거라 믿고 있소.”
북궁천은 그 말을 듣고 명우를 남궁성이나 지광보다 반 수 정도 위로 평가했다.
자신의 모자람을 알고 물러선다는 것은, 수양이나 무공 면에서 두 사람보다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갔다는 뜻처럼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도 그가 두 사람보다 나을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신중해서 몸으로 체득해야 알 수 있는 것을 두 사람보다 늦게 알게 될 테니까.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소. 오늘의 일은 덮어 둘 것이니 그대들도 남에게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세 사람의 표정이 그나마 조금 밝아졌다.
자존심이 차가운 겨울 땅바닥에 처박혔다는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