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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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6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68화
68화
“있을지도 모르지.”
“저는 있을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있다고 봅니다만.”
“그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뭔가?”
“양고명은 첨예하게 대립한 상태인데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까지 려려를 납치하려 했습니다. 임 대협이 보시기에는 그녀가 이번 싸움의 승패보다 더 가치 있다고 보십니까?”
“삼성궁 소궁주의 약혼녀이니 가치가 적다곤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정도는 아니네.”
“그런데도 양고명은 서슴없이 그녀를 납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그 대신 임무를 수행할 또 다른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 법한 말이다.
임강령은 염포사신이라 불렸던 사람답게 북궁천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음, 자네 생각이 옳은 것 같네.”
“어떻습니까, 그자들을 잡아 볼 생각이 없습니까?”
임강령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누군가를 잡는다는 것. 그것도 천사교의 간자를 잡는 일이라면 무척 즐거울 것 같았다.
“그것도 괜찮겠군. 아니, 있다면 반드시 잡아내야겠지.”
북궁천은 자신의 생각대로 임강령이 흥미를 보이자 짐을 하나 덜어 낸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더 말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그 일에 대해선 나중에 하기로 했다.
임강령이 아무리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구양우경과 관련된 말을 하기에는 아직 위험했다.
‘지금은 심증뿐이다. 좀 더 확실한 증거가 나온 후에 해도 늦지 않아.’
그때 임강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무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시간을 뺏은 것 같군.”
“별말씀을. 조금 전에 한 약속만 잊지 마십시오.”
“물론이네.”
임강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방을 나서려다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반쯤 돌리고 말했다.
“일전에…… 대협에 관해서 했던 말. 정말 그녀가 그리 말했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협이 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군요.”
“내가 보기에 자넨 대협의 자질이 농후하네. 힘을 내시게.”
임강령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방문을 열었다.
북궁천은 찻잔을 단숨에 비운 후 그가 나간 방문을 보며 히죽 웃었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란 말이야. 사람 보는 눈이 있어.”
* * *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 대는 겨울 날. 상남의 동서로 뻗은 대로 입구에 한 사람이 들어섰다.
위에 밤색 가죽 겉옷을 걸치고, 옆구리에 빛을 삼켜 버릴 것 같은 묵빛 검을 찬 청년.
천광호에게 알아볼 것이 있다는 말만 남기고 철은보를 나선 북궁천이었다.
상남은 큰 도읍은 아니지만 사방으로 길이 뻗은 요충지여서 겨울밤인데도 제법 활기찬 분위기였다.
그는 밤거리를 구경 나온 사람처럼 상남의 길거리를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무사들은 없군.’
연합 세력의 무사들이 술을 마시기 위해서 나왔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밤바람이 차서 그런지, 아니면 마음이 아직 불안해서 여유가 없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좌우를 둘러보고는 골목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골목 안쪽에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기루로 들어갔다.
“호호호호, 어서 오세요, 무사님!”
진한 화장을 한 삼십 대 여인이 날듯이 달려오며 그를 반겼다.
바짝 기대 붙은 그녀는 북궁천의 얼굴을 힐끔거리더니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처음으로 기루에 와 본 북궁천은 들어오자마자 후회가 되었다.
‘정한이나 청 아우를 데리고 올 걸 그랬나?’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는 헛기침을 하며 짐짓 풍류 공자인 것처럼 행동했다.
“험, 안으로 안내하쇼.”
“호호호, 따라오세요.”
기녀는 북궁천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보면 따라가는 게 아니라 기녀에게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안내된 방은 화려했다. 게다가 무엇을 뿌렸는지 코끝이 찡할 정도로 진한 향기가 가득했다.
“호호호,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술과 아주 예쁜 아이를 넣어 드리겠습니다요.”
여인은 머쓱하니 서 있는 북궁천에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십 년간 기녀로 산 여인답게 북궁천이 기루 출입의 초짜라는 걸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북궁천은 기녀가 나간 뒤에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들어올 때는 미처 몰랐는데, 낯이 화끈 거릴 정도로 묘한 장면이 벽 여기저기에 그려져 있었다.
누워 있는 그림, 서 있는 그림, 앉아 있는 그림…….
공통점은 남녀가 반드시 함께 그려져 있다는 것과 옷을 반쯤 벗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길, 역시 혼자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사뿐거리며 다가왔다.
“많이 기다리셨죠?”
흠칫한 북궁천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아, 아니요. 조금 전에 왔소.”
여인은 싱긋 웃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잘해야 스물이나 먹었을까?
얼굴은 미인이라 할 수 없지만, 하얀 피부와 큰 눈이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소녀는 선이라고 해요.”
이름을 밝히며 고개를 숙이는데 가슴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녀린 몸매에 비해서 풍만한 가슴 사이의 계곡은 무척이나 깊었다.
북궁천은 슬그머니 눈을 돌리며 물었다.
“이곳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오?”
“주인 언니는 왜요?”
“물어볼 게 하나 있어서 그렇소.”
“일단 술부터 한잔하세요. 그럼 제가 모시고 올 게요.”
선이라는 기녀가 싱긋 웃으면서 그 말을 함과 동시, 방문이 열리고 술과 요리가 들어왔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요리가 나오다니.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북궁천은 그에 대해서 따지지 않았다. 어차피 목적은 술과 요리가 아니니까.
그는 술과 요리를 가져온 점소이가 밖으로 나간 후에야 선이라는 여인에게 나직이 말했다.
“당신이 주인을 만나게 해 준다면 술값과 별개로 은자 한 냥을 주겠소.”
선이라는 여인의 큰 눈이 황소 눈처럼 커졌다.
이게 웬 떡이냐는 마음이 눈 속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정말요?”
“물론 정말이오.”
은자 한 냥의 힘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컸다.
선이라는 기녀는 북궁천에게 술을 한 잔 따라 주고는 사뿐사뿐 날듯이 걸어서 밖으로 나갔다.
북궁천은 술을 살짝 입술에 대 보고 그대로 내려놓았다.
‘향기만 진하지 싸구려 술이군.’
잠시 후.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인과 함께 들어왔다.
그녀는 웃음이 얼굴에 그대로 굳어 있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호호호호, 천녀가 매병루의 주인이랍니다. 잘생긴 무사님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먼저 저 여인을 내보내고 이야기를 합시다.”
매병루주는 눈짓을 해서 선이라는 여인을 내보냈다.
“나가 있어.”
선이라는 여인은 몹시 불만인 듯 북궁천을 향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엉덩이를 세차게 흔들며 방을 나갔다.
매병루주는 그녀가 나가자 슬그머니 자리를 이동해서 북궁천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색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북궁천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뭐든 말씀해 보세요. 저희 집은 손님이 원하는 것은 뭐든 다 해 드린답니다. 아이들을 다 벗기고 마셔도 되지요. 물론 운우지락도 가능하고요. 원하신다면 두 아이를 함께 넣어 드릴 수도 있고, 저처럼 나이 먹은 여자와 어린아이도…….”
말하는 사이 그녀의 몸이 북궁천의 바로 옆까지 바짝 다가왔다.
그녀의 가슴은 선이라는 여인보다 훨씬 커서 앞섬이 터질 것 같았다.
게다가 몸에 뿌린 향수가 어찌나 진한지 코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북궁천은 슬쩍 엉덩이를 옮기면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아아, 그런 것 때문에 온 것이 아니오. 내가 당신을 찾은 것은 거래를 할 것이 있기 때문이오.”
“거래라니요? 무슨 거래를? 혹시 괜찮은 여자아이라도…… 그런 거라면 직접 데려와 보셔야 합니다, 무사님.”
“여자를 팔려고 그러는 게 아니오.”
“어머, 그럼 사시려고요?”
손님이 뜸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주인이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해 대니 어떤 손님이 좋아할까?
슬슬 짜증이 난 북궁천은 매병루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팔려는 것도, 사려는 것도 아니오.”
“그럼 무슨 거래를……?”
“내가 원하는 조건을 갖춘 여자를 하나 찾아 주시오.”
“그러니까 결국 사시겠다는 것 아닌가요?”
“사는 게 아니라, 찾아 달란 말이오. 기녀든, 누구든 상관없이.”
매병루주는 고개를 모로 꼬며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뭐 하시려고……?”
“그건 당신이 알 것 없소. 닷새 안에 내가 원하는 여인을 찾아 주면 은자 백 냥을 내겠소.”
은자 백 냥이라는 말에 매병루주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오호호호호, 무사님이 뭘 아시는군요. 그런 일이라면 상남에서 저를 따라올 사람이 없답니다. 말씀해 보세요. 양귀비나 서시를 닮은 여자를 찾으라고 해도 찾을 수 있으니까요.”
시들은 양귀비나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쭈그렁 할멈이 된 서시 정도?
북궁천은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걸 꾹 참고 자신이 원하는 조건을 말했다.
잠시 후, 계약금으로 은자 이십 냥을 내고 매병루를 나온 북궁천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후우, 여자들은 왜 저렇게 독한 향을 뿌리는지 모르겠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골목을 나서 대로로 들어섰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조소를 지으며 그를 힐끔거렸다. 그가 매병루에서 수상한 짓이라도 하고 나온 것처럼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북궁천은 미처 모르고 있지만, 매병루는 술만 파는 일반적인 홍루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든 상남에 나온 목적을 달성한 그는 철은보로 가기 위해 대로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그가 막 상남을 벗어나기 직전이었다. 허름한 건물 사이의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불쑥 손이 튀어나왔다.
뒤이어 쥐어짠 목소리가 머리까지 뒤집어쓴 거적 속에서 흘러나왔다.
“자, 잠깐만…….”
아무래도 자신을 부르는 것 같다.
걸음을 멈춘 북궁천은 건물 사이의 공간에서 기어 나오는 괴인을 바라보았다.
“나를 부른 거요?”
“그, 그렇…… 잠시 내 말 좀…….”
거적을 쓴 채 자신을 향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 오는 그를 보고 북궁천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품속의 주머니에서 한 냥짜리 은자를 꺼낸 그는 기어 오는 자를 향해 던졌다.
은자는 정확히 그자의 손 위에 떨어졌다.
“그걸로 뭐라도 사 드시오.”
거적을 쓴 자는 손에 맞고 코앞에 떨어진 은자를 보고 툴툴거리며 웃었다.
“크, 크, 크, 그, 그게 아니…….”
북궁천은 괴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지처럼 보이는 자가 은자를 잡을 생각도 하지 않다니.
게다가 저 참담함이 느껴지는 웃음은 또 뭐란 말인가.
“나에게 따로 볼일이 있소?”
거적은 쓴 자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나요…… 장호…… 문.”
* * *
허름한 객잔의 방안에 장호문을 눕힌 북궁천은 장호문이 걸친 거적을 벗겼다.
옷이 말라붙은 피로 범벅되어 있었다.
그가 찢어 내듯이 옷을 마저 벗기자 썩어 가는 상처가 드러났다.
누런 고름이 가득 찬 상처는 장호문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게 불가사의할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장호문은 덜덜 떨면서 입을 열었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이틀을…… 기다렸소. 회룡당 사람 중…… 누군가가 지나갈 거라…… 생각하고…….”
북궁천은 그에게 진기를 주입하며 말을 하도록 가만 놔두었다.
장호문은 내부가 썩어 가고 있었다. 극한의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긴 하지만 당장 숨을 거둔다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