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6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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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65화
65화
북궁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광호의 술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천광호는 술 냄새가 뿜어져 나오는 입을 북궁천에게 바짝 들이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오래전, 가장 친했던 놈을 내 손으로 죽였다네. 왜 죽였는지 아나? 알고 보니 천사교의 교도지 뭔가. 그놈 때문에 내 형제와 동료들 수십 명이 죽어서 죽일 수밖에 없었어. 죽일 수밖에. 크크크크.”
천광호는 붉어진 눈으로 툴툴거리며 웃더니 술잔을 들어 목 안에 들이부었다.
그러고는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천사교가 얼마나 독한 놈들인지 알았다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지. 사실 그래서 대원들을 닦달했던 거야. 강해야 한 놈이라도 더 살 수 있을 테니까. 빅어먹을.”
그는 술병을 들어서 술잔을 채우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북궁천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솔직히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이곳에 정체를 숨기고 있는 천사교도가 몇 놈이나 되는가 하는 거야. 그놈들을 잡아내지 못하면 설령 이긴다 해도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어.”
정파의 유명한 고수인 양고명조차 천사교도였다.
어떤 사람이 천사교도인지 그 누가 알 것인가?
“자네가 그놈들 좀 잡아 주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저도 천사교도일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어느 날 갑자기 정체불명의 고수가 등장했으니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하지만 천광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전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아무도 믿을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아니야. 웬 줄 알아? 자넨 천사교의 소존과 싸운 사람이거든.”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그것도 아주 중요해. 천사교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천사지존에게 검을 겨눌 수 없네. 그리고 소존은 천사지존의 현신이나 마찬가지지. 그러니 소존을 궁지로 몰아넣은 자네는 천사교도가 될 수 없다네.”
“등 대협이나 백리 대협, 임 대협도 있지 않습니까? 설마 그분들도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요?”
물론 천광호도 그들까지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정말 천사교도였다면 어젯밤의 싸움에서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천광호가 그들이 아닌 북궁천에게 부탁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그 양반들은 내가 움직일 수 없잖아. 자네는 아직 내 수하고. 상관의 마지막 부탁이라 생각하고 좀 해 주게.”
* * *
“바보 같은 놈! 네놈의 고집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교도들이 죽었는지 아느냐?”
은은한 노성이 거대한 대전을 흔들었다.
호연유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앞 거대한 태사의에는 가슴에 금실로 하늘 천 자가 새겨진 검은색 비단 도포를 입고, 검은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중년인이 금빛 휘황한 도관을 쓰고 앉아 있었다.
그 중년인이 바로 천사교에서 그가 어찌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 천사지존(天邪至尊)인 천사종 호연도광이었다.
이십여 년 전에 무림맹을 몰락시키고, 지금은 섬서를 장악한 절대자.
“엉뚱한 놈이 훼방만 놓지 않았어도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 지존이시여! 그놈만 아니었어도 그토록 많은 교도들이 죽지도 않았을 것이고, 놈들을 전멸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 때문에 실패한 계획 따위를 어찌 완벽하다 할 수 있단 말이냐?”
천사종 호연도광의 다그침이 계속되자 호연유가 지지 않고 토를 달았다.
“그놈은 저와 흑사령, 귀사령의 합공을 막아 낸 놈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흑사령과 귀사령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놈을 어찌 단순하게 한 사람 정도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정도의 인물이라면 미리 파악을 했어야지! 네가 아직도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구나!”
“그자는 저와 비슷한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사공강후도 아니었고, 구양우경도 아니었습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고, 삼성궁 평무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호교령을 통해서 놈들에 대해 파악했습니다만, 그런 자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 말에는 호연도광도 눈만 치켜뜰 뿐 바로 답을 못했다.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지존. 그자까지 파악을 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저도 잘못을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본 교가 지닌 정보에도 없고 호교령조차 모르는 자가 갑자기 툭 튀어나왔으니 저라 한들 어찌하겠습니까?”
호연도광은 기이한 광채가 일렁이는 눈으로 호연유를 바라보았다.
“그놈에 대해 조사는 하고 있느냐?”
“혈사령을 시켜 놈에 대해서 샅샅이 조사하라 했습니다. 놈의 정체가 뭔지, 놈이 뭘 좋아하는지, 놈과 가까운 놈이 누군지, 놈과 관계된 것은 뭐든 모조리 알아내라고 했습니다.”
호연유는 이를 갈면서 대답하고 새파란 살광을 번뜩였다.
호연도광은 그쯤에서 호연유에 대한 다그침을 멈췄다.
그가 아들을 다그친 것은 아들이 잘못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찮은 교도들의 죽음이야 아쉬울 것이 없었다.
문제는 그냥 놔둘 경우, 교도들의 마음이 흔들릴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아들을 다그친 것뿐이었다.
그는 만사만악(萬邪萬惡)의 지존.
일천이 아니라 일만이 죽어도, 하남의 정파 무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웃으면서 보낼 수 있었다.
“좋다. 그럼 너의 죄에 대해서는 나중에 묻기로 하겠다. 대신 앞으로 공을 세우지 못한다면 이전의 잘못까지 추궁할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해라.”
호연유도 당연히 그리될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꿇었다.
“알겠사옵니다. 지존이시여!”
그때 호연도광이 몸을 일으켰다.
좌우로 늘어서 있던 열여덟 명의 천사교 최고위급 교도들이 일제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소존의 공격으로 놈들이 큰 피해를 입었을 터. 그렇다면 곧 저들의 총단에서 지원 무사가 올 것이다. 그들이 모두 도착한 후 본존의 위엄을 보일 것이니, 그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교도들의 신심을 최대한 끌어 올리도록 해라!”
“천사지존의 명을 받드옵니다!”
잠시 후.
호연도광과 호연유는 화려한 방 안에서 마주 앉았다. 대전에서와 달리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정말 굉장한 놈이었습니다. 하마터면 그놈에게 정말로 죽을 뻔했습니다.”
“그러게 매사에 조심하고, 세운 계획은 열 번, 스무 번 되돌아보라고 하지 않았더냐?”
부친의 다그침이 더 듣기 싫은 호연유는 화제를 돌렸다.
“철군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호연도광의 눈썹이 송충이처럼 구겨졌다.
“아무래도 괜히 건드린 것 같다. 놈들의 움직임을 보니, 아무래도 곽전유가 우리 쪽 사람이라는 걸 알아챈 것 같아.”
“그럼 그를 제거해서 놈들에게 넘겨주면 어떻겠습니까? 그를 넘겨주면서 개인적인 욕심이었다고 하면 철군성도 우리를 적으로 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놈들이 움직였다는 것은 우리를 적으로 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는 뜻이다. 이미 우리를 향해 칼을 겨눈 상태이니, 그 마음을 바꾸려면 어지간한 대가로는 끄떡도 하지 않을 거야.”
“그 계집만 잡아서 제 것으로 만들었으면 공손무극도 꼼짝 못했을 텐데, 정말 아쉽군요. 그들이 황하를 넘어와서 북쪽을 교란하면 일이 훨씬 수월하게 진행될 텐데 말입니다.”
“어쩔 수 없지. 그보다 명화회(明火會)의 애송이들을 끌어들이는 일에 더 신경을 쓰도록 해라. 본격적인 하남 공략을 하기 전에 완전히 끌어들여.”
“걱정 마십시오. 그놈들은 자신들이 불구덩이 속에서 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후후후후”
“잘된 계략 하나가 수백 명의 고수보다 더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 점을 잊지 말고 항상 신중하게 움직이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 * *
철은보로 돌아온 다음 날 오후. 천광호가 회룡당 대원들을 소집했다.
“출동한다! 목적지는 회원. 임무는 시신을 회수하는 일이다! 모두 준비하고 집합하도록!”
회원은 추적을 당하며 가장 격렬하게 싸웠던 장소였다. 그곳에는 아직도 수백 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북궁천과 태극문 제자들도 시신 회수 작업에 출동했다.
행여나 천사교도가 나타날까 봐 걱정했지만 그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두 시진을 달려 도착한 들판과 계곡에는 연합 세력 무사와 천사교도의 시신 수백 구가 뒤엉켜 있었다.
천광호는 천종규의 시신을 찾아서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일대와 이대원들은 송찬과 백종오의 시신을 먼저 챙겼다.
백종오는 팔이 잘린 채 죽어 있었는데, 초강이 사오 장 떨어진 곳에서 그의 팔을 찾아냈다.
잠시 후.
주요인사 삼십여 명의 시신을 찾아낸 그들은 얼어붙은 구덩이를 파고 나머지 시신을 묻었다.
석양이 지는 시각.
말없이 시신을 묻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음산함마저 느껴졌다.
회룡당이 아무 탈 없이 돌아오자, 연합 세력의 수뇌부들도 긴장을 풀었다.
천사교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멀찌감치 후퇴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짙은 패배감이 사라지고, 심지어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는 말조차 나왔다.
하긴 총 피해규모만 따진다면 그들의 피해가 자신들보다 더했다. 그리고 어쨌든 자신들은 상남까지 점령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연합 세력 무사들이 불안감과 안도감이 교차되는 나날을 보내는 동안 북궁천은 구양우경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놓았다.
그의 낯짝은 반쪽도 보기 싫지만, 그가 헌원려려와 함께 궁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생긴 북궁천은 태극문 제자들의 수련을 도와주었다.
그가 이정한 등에게 가르쳐 준 무공은 검법 두 가지와 장법 하나였다.
검법은 회풍십이검(回風十二劍)과 섬라칠식(閃羅七式). 그리고 장법은 오초식으로 이루어진 광선장법(廣宣掌法)이었다.
셋 다 그가 북천의 패왕공을 익히기 위해서 기초로 삼은 무공들이었는데, 말이 기초지 실질적으로 절기라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은 상승의 무공이었다.
더구나 각자의 성격과 몸에 맞는 걸로 고른 것이어서 세 사람은 빠르게 무공의 진수를 흡수했다.
황보청과 종리기진은 그들이 발전해 가는 것을 보고 엉덩이에 불붙은 말처럼 자신들을 다그쳤다.
북궁천은 그런 두 사람에게 하나의 화두만 던져 주고 아무런 가르침도 내리지 않았다.
“벽을 억지로 깨려하지 마라. 벽을 보려고도 하지 마라. 수련에 혼을 쏟다 보면 언젠가 느닷없이 벽이 무너져 있다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욕심내지 말고 자신을 다스리기만 해라.”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아니면 몇 년 후가 될지 몰라도, 그 벽을 깨는 것은 온전히 자신들의 몫이었다. 북궁천은 길만 알려 줄 수 있을 뿐.
* * *
나흘째 되던 날 아침.
잠은각 무사들로부터 산채에 있던 천사교도들이 완전히 철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산적 가족들이 돈 될 물건은 가져가고, 시신들은 그대로 놔둔 상태라고 했다.
또 다시 회룡당이 바빠졌다. 수백 명의 시신을 모두 가져올 수는 없어도 땅에 묻어 줄 수는 있을 것이었다.
북궁천은 대원들과 함께 가기로 하고 이정한을 보내서 황보청과 종리기진을 데려오게 했다.
그들이 산채의 시신을 회수하러 간다고 하자 무림맹과 천무회에서도 오십여 명이 참여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공강후가 직접 천무회 무사들을 이끌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