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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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58화
58화
* * *
사지가 잘리고 살이 쩍쩍 벌어진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로 대지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피를 밟고 사는 게 강호의 삶이라지만, 어지간한 사람들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죽은 천사교도의 숫자는 사오 백 정도. 잠깐 동안의 싸움치고는 엄청난 피해였다.
반면 삼성궁과 천무회, 무림맹의 사망자는 칠팔십 명에 불과했다. 부상자는 이백여 명. 그중 중상자는 사오십 명 정도였다.
완벽한 대승!
위효릉은 자신의 생각이 적중한 것이 만족스러운 듯 활기찬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삼성궁의 무사들은 구덩이를 파서 시신을 묻고 부상자들을 방으로 옮겨서 치료하라!”
천무회와 무림맹의 무사들도 팔을 걷고 나섰다.
회룡당은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나서서 부상자를 방으로 옮겼다.
북궁천 역시 대원들과 함께 부상자를 처리했다. 짙은 피비린내 속에서도 그의 표정은 별반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겉모습과 달리 머릿속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내가 너무 깊게 생각했나?’
우려했던 천사교의 역습은 없었다.
그들의 주력은 일찌감치 도주했고, 남은 자들은 죽을 때까지 싸우다 전멸했다.
너무 확실한 결과. 허탈감이 들 정도다.
북궁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병법에 밝은 사람들이 많으니 알아서 하겠지…….’
찝찝함을 털어 낸 그는 부상자의 상처를 천으로 감싸 주었다.
몇 번 해보다 보니 손길이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게 부상자의 치료가 거의 끝나 갈 즈음, 철은보의 삼 층 전각에 각파의 수뇌들이 모였다.
그리고 한 시진 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무사들에게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북궁천은 명령과 함께 전해진 계획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당주, 정말 상주까지 곧바로 친답니까?”
“그럴 모양이네.”
연합 세력의 무사는 부상자를 지킬 사람을 제외하고 일천 정도다.
천사교는 광원산장과 철은보의 싸움에서 일천에 달하는 피해를 입은 상황. 설령 상주에 있는 적이 자신들보다 많다 해도 지금까지의 싸움만 봐서는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천광호도 그런 마음이기에 수뇌부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왜?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나?”
“천사교가 너무 힘없이 이곳을 포기한 것 같아서 왠지 찝찝합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잠은각과 문현각이 함께 움직이며 계획을 짜는데,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나? 나서 봐야 좋은 소리 나오지 않을 테니 일단 하라는 대로 하세.”
천광호는 피식 쓴웃음을 짓고 저 앞쪽에 모여 있는 수뇌부들을 바라보았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그보다…… 어떤 놈인지 알아냈나?”
조관을 죽인 자를 알아냈냐는 말.
북궁천은 느릿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까지 두 사람이 안 보입니다. 아마 그중 하나가 대주를 죽였을 겁니다.”
“그럼 이제 하나만 찾으면 되겠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둘을 모두 잡으면 될 테니까.
하지만 북궁천은 아직 자신의 생각을 다 밝히지 않았다.
“곧 알게 되겠지요.”
나직한 목소리가 어찌나 싸늘하게 느껴지는지,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해진 천광호는 북궁천을 힐끗 쳐다보고 어깨를 떨었다.
‘어떤 놈인지 오늘부터 편하게 잠자기는 다 틀렸군.’
그때 북궁천이 그에게 말했다.
“당주, 이조량을 서평으로 돌려보내서 한 가지 알아볼 일이 있습니다. 빼내도 괜찮겠습니까?”
“이조량을?”
천광호는 보이지 않는 수룡위사대원에 대한 것을 조사하기 위해 돌려보내는 거라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유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실력에 비해서 알려지지 않았으니 은밀하게 뭘 알아보기에는 제격인 친구입니다.”
“좋아, 그렇게 하게. 백 대주에게는 내가 시킨 것으로 말하지.”
4장. 암계
“소존, 놈들이 철은보에서 출발했다 합니다.”
다향을 음미하던 은의청년은 보고를 받고 붉은 입술을 비틀며 눈을 들었다.
“그래? 꿀을 본 개미처럼 가만있지 못하는군. 꿀통에 빠지면 빠져나오지 못한 채 죽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말이야.”
한쪽에 서 있던 애꾸 노인이 그 말을 듣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낄낄낄, 그동안 본 교의 교도들을 도살하다시피 했으니, 당장 우리를 몰살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거네.”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죽어가면서 깨닫겠지요.”
이번에는 실처럼 가느다란 눈 사이에 커다란 점이 박힌 뚱뚱한 노인이 가느다란 눈에서 붉은 눈빛을 번뜩이며 못마땅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래도 너무 많이 죽었어. 제법 쓸 만한 아이들도 많았는데 말이야.”
그 말에 은의청년, 천사교의 소존인 호연유는 입술을 한쪽으로 비틀며 조소를 지었다.
“큰 고기를 낚으려면 미끼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법이지요. 교도들도 자신의 죽음으로 천사의 세상이 가까워졌으니 저승에서나마 기뻐할 겁니다.”
뚱뚱한 노인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 고개만 저었다.
반면 애꾸 노인은 외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존께서 왜 소존을 높이 사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 이 늙은이는 충심으로 소존의 말을 따를 것이니 어떤 명이든 내리시게나.”
“고맙습니다. 곡 장로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힘이 나는군요.”
호연유는 애꾸 노인을 향해 두 손을 합장했다. 그리고 뚱뚱한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 장로, 대를 위해선 소를 희생할 줄도 알아야 큰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일단 지켜보시지요.”
“내 어찌 소존의 뜻을 모르겠나? 다만 교도들이 너무 많이 죽다 보니 그러는 걸세.”
호연유는 뚱뚱한 노인의 소심함에 짜증이 났다. 그러나 겉으로는 웃음을 지으면서 그를 달랬다.
“걱정 마십시오. 놈들은 곧 교도들의 죽음에 대해서 몇 배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그때 마음껏 분풀이를 하십시오.”
* * *
연합 세력은 백 리를 달린 후 휴식을 취할 겸 잠은각의 대원으로부터 정보가 전해지기를 기다리며 멈췄다.
북궁천도 회룡당 무사들과 함께 한쪽에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구양우경을 향하고 있었다.
‘저 자식이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구양우경은 이마를 찌푸리며 북궁천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놈, 감히 자신의 여자에게 손을 댄 놈이다.
납치된 걸 구해 오면서 어쩔 수 없이 업었다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것은 나쁜 것이었다.
손을 자르고 등가죽을 벗겨서 죽이고 싶을 만큼!
‘설마 저놈이 사구명을 죽이고 장호문을 데려간 건 아니겠지?’
천사교와의 싸움 와중에 손을 쓸 수 없어서 참고 있을 뿐 어차피 제거해야 할 놈이다.
그런데 정말로 장호문을 데려갔다면 한시라도 빨리 죽여서 입을 막아야 했다. 무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놈을 한번 떠봐야겠군.’
그는 상황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회룡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위에 앉아서 쉬고 있던 사공강후는 언뜻 구양우경이 눈에 들어오자 미간을 좁혔다.
‘소문과는 많이 달라.’
철은보의 외곽을 공격할 때는 보지 못했으니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철은보 내에서 싸우는 구양우경의 모습을 본 그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가 본 구양우경은 자신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부드러운 성격이라는 강호의 소문과 달리 손속이 무척이나 냉혹했다.
‘강아지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성격이라 들었거늘.’
하지만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번뜩이는 눈빛은 자신조차도 섬뜩함을 느낄 정도였다.
‘주의해서 지켜봐야 할 자야.’
그때 구양우경이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는 구양우경이 가는 곳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구양우경은 삼성궁의 무사들이 쉬고 있는 곳으로 가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사공강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구양우경이 삼성궁의 말단 무사로 보이는 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대는 앉아 있는 데다 구양우경에게 가려져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든 간부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자신이 판단한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
구양우경이 말단 무사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었나?
그렇다면 그에 대한 판단을 다시 내려야 한다.
‘정말 속을 짐작키 힘든 사람이군.’
사공강후가 곤혹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관호명이 다가왔다.
“왜 그런 표정이지? 구양우경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가?”
“숙부, 구양우경이 원래 말단 무사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입니까?”
관호명은 사공강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아는 그는 가까운 사람 외에는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지 않네. 아마 아는 사람이 있어서 간 것이겠지.”
그 역시 북궁천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봤다면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공강후는 관호명의 말을 듣고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구양우경이 말단 무사와 잘 알고 지낸다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군.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만나는 것 아니겠나?”
사공강후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본능이 자꾸만 시선을 그곳에 붙잡아 두었다.
북궁천은 구양우경이 수룡위사대원 셋의 호위를 받으며 다가오자, 고개를 모로 꼬며 돌려서 그를 바라보았다.
“소궁주께서 어쩐 일이오?”
그의 앞에 멈춰 선 구양우경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본 궁의 무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소궁주라는 사람이 한 번쯤 둘러봐야 하지 않겠나?”
북궁천은 그의 말을 듣고 실소가 나왔다.
자기가 언제부터 말단 무사를 생각해 줬단 말인가?
“소궁주께서 그렇게 다정다감한 사람인 줄 오늘에서야 알았소.”
조금은 비틀린 말투.
구양우경은 은근히 속이 끓었지만 꾹 참고 웃음을 지었다.
“자넨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잘 모르는군. 강호의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부드러운 사람인지 다 아는데 말이야.”
‘별 개소리를 다 듣는군.’
북궁천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면서 수룡위사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전에 서문 소저를 구하러 갔을 때 봤던 분이 오늘은 안 보이는군요. 어디 가셨소?”
구양우경의 두 눈에서 서릿발 같은 눈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다른 임무를 맡아서 지금은 여기 없다네.”
“어디서 다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건 아니니 걱정할 것 없네.”
“하긴 나와 상관도 없는 일인데, 화살에 맞았든 검에 맞았든 신경 쓸 것도 없지요.”
‘이 개자식이!’
구양우경은 튀어나오려는 살기를 가까스로 눌렀다.
화살에 맞았다는 것을 아는 걸로 봐서 장호문과 조관 사이의 일을 아는 듯했다. 어디까지 아느냐 하는 게 문제일 뿐.
그는 감정을 가까스로 추스르고 넌지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조 대주가 안 보이는군. 어디 갔나?”
“임무를 맡아서 멀리 갔소. 아주 멀리.”
느릿하게 대답하는 북궁천의 표정이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대답을 마치고 구양우경을 직시했다.
“서문 소저는 괜찮소? 몸이 안 좋은 것 같던데.”
“물론 괜찮지. 자넨 그녀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오. 그런 여자의 사랑을 받으려면 천복을 타고나야 할 텐데, 소궁주는 복도 많소.”
구양우경은 단화린이 자꾸 그녀를 입에 담자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칭찬하는 얼굴에 대고 차마 뭐라 할 수는 없는 일. 꾹 참고 대충 대답했다.
“그리 봐 줘서 고맙군.”
“잘 대해 주시오. 그런 여자에게 함부로 대하면…… 천벌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오.”
왠지 묘한 느낌이 드는 말투.
구양우경은 그 말이 마치 자신을 가리켜서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뭐야? 천벌이 어째? 이 죽일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