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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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53화
53화
“복수를 하기 위해 쳐들어온다면 걱정할 게 없다.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데 공격을 자제한다면 저들에게 또 다른 계획이 있다는 말이 되지.”
동호량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대세력 간의 전쟁은 일개 문파끼리의 싸움과 다르다. 무공의 고하만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아.”
“병법이 무공보다 더 중요하단 말씀입니까?”
“맞아. 그래서 군사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한데, 아무래도 저쪽에 대단한 모사꾼이 있는 것 같다.”
“삼성궁의 문현각주님도 대단한 분이라 들었습니다. 그분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두고 보면 알겠지. 중요한 것은 이번 싸움이 군사들의 머리싸움이 될 거라는 거다. 그 과정에서 일반 무사들은 장기판의 졸밖에 되지 않아. 다시 말해서, 아우들 정도의 무사는 언제든 이용물로 던져질 수 있다는 거다.”
무거운 투로 말을 이어가던 북궁천이 말을 잠시 멈추고 이정한 등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아우들이 그렇게 죽어 가는 걸 원치 않는다.”
이정한 등은 그제야 북궁천의 의도를 이해했다.
대형은 자신들이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장기판의 졸처럼 적 앞에 던져져서 죽는 걸 원치 않는 것이다.
가슴이 뭉클해진 세 사람은 상기된 얼굴을 숙였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 이정한은 고개를 모로 꼬며 쳐들고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저, 대형. 세상 물정도 잘 모르시는 분이 그런 건 어떻게 그리 잘 아시는 겁니까?”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전쟁을 치르다 보면 느낌이라는 게 있다. 그리고 나는 그쪽으로 경험이 많다.”
“전쟁이요?”
동호량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럼 장군이셨습니까?”
북궁천이 그 말에 피식 웃고 말했다.
“장군은 아니었지만, 전쟁에 가까운 대규모 전투는 몇 번 치러 봤지.”
이정한 등은 더욱 더 존경하는 눈빛으로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의형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다니!
그런 표정.
어색해진 분위기를 털어내듯 북궁천이 서둘러 말을 맺었다.
“좌우간 내 말을 이해했으면 내일 산서로 돌아가라. 자네들은 이곳에서 목숨을 걸 이유가 없으니까.”
“만약 저희가 간다면 대형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세 사람은 북궁천이 말한 ‘할 일’이 뭔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 떠나라 해도 떠날 마음이 없었다.
“대형. 죄송하지만, 저희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정한…….”
이정한은 북궁천을 똑바로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온 후 우리는 진짜 무사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악의 무리와 싸우는 게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저들과 싸우다가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살아오면서 정파의 무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정파의 무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다만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소신껏 옳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많이 했다.
사부님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으니까.
그런데 천사교와 싸우면서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남자라면, 무사라면 평온에 안주하며 살기만 해선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대형의 말대로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이 두려워서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북궁천은 동호량과 초강을 둘러보고 그들 역시 이정한과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았다.
“정말 이곳에 남을 생각인가?”
세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예, 대형!”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대형!”
“하지만 나는 아우들이 죽는 게 싫다.”
“대형…….”
“정말 이곳에 남고 싶다면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해라. 그리고 함께 살아서 돌아가고 싶다면, 내가 가르쳐 주는 무공을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익혀라.”
“예?”
“태극문의 무공도 뛰어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완성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그래서 속성으로 익힐 수 있는 무공을 두어 가지 가르쳐 줄 생각이다.”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기쁜 나머지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대형!”
“정말이죠?”
“나중에 그냥 해본 소리라고 하기 없깁니다!”
“가르쳐 주고 싶어서 가르쳐 주려는 게 아니다. 아우들이 죽으면 진 사부가 나를 원망할까 봐 가르쳐 주는 것이다. 물론 싫은 사람은 이 자리에서 말하고 짐 싸서 돌아가도록.”
세 사람의 얼굴이 벌게졌다.
“걱정 마십시오, 대형! 죽을힘을 다해서 익히겠습니다!”
2장. 만가점
위효릉은 광원산장을 임시 거점으로 정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서둘렀다.
광원산장에서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은 칠팔백 명 정도.
그나마도 일반 무사는 다섯 명이 사용하던 방에 열다섯 명씩 집어넣어야 했다.
천무회와 무림맹의 무사들이 도착하면 쉴 곳이 있어야 하는데, 당장 집을 더 지을 수는 없는 일.
위효릉은 천사교의 공격에 대비할 겸 무사들 중 삼 할을 상남 쪽으로 전진배치 시켜서 인원의 분산을 꾀했다.
그러고는 남은 인원을 넷으로 나누어서 하루 세 시진씩 외곽 순찰을 돌게 했다.
그리하자 장원에 반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도 쉴 곳이 모자라면 서평에 있는 객잔을 이용하면 될 터. 그는 천무회와 무림맹 무사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차분하게 철은보의 천사교도를 칠 계획을 짰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을 때였다.
‘응? 저자는?’
치료에 쓸 면포 등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 위해 서평으로 나간 조관은 눈에 익은 자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골목 안쪽의 어느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자가 보였다.
옷은 다르지만 얼굴은 구양우경을 호위하는 수룡위사대의 무사들 중 하나가 분명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면서도 조관 일행이 어둠침침한 가게 안에 있어서 보지 못한 듯했다.
평소 구양우경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자가 무슨 일로 서평에 나온 걸까?
옷도 평복을 입고 말이다.
‘심부름 나왔나?’
조관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다.
“너희들 먼저 물건을 갖고 돌아가라.”
그와 함께 나온 대원 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주님은……?”
“잠깐 알아볼 것이 있다. 곧 따라가마.”
“설마…… 혼자 한잔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나중에 검사해 봐, 인마. 빨리 가!”
조관은 눈을 부라리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이대 대원 둘은 눈짓을 하더니 보따리를 짊어졌다.
“그럼 저희 먼저 가겠습니다. 그런데 대주님, 딱 한 병만 마시면 안 되겠습니까? 가면서 마시면 늦을 염려도 없는데 말이죠.”
조관도 차마 그것까지 말리진 못했다.
피를 본 지 한나절밖에 안 된 터였다. 술로 피 냄새를 지우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좋아, 대신 딱 한 병만 마셔라.”
“감사합니다!”
두 대원은 희색을 띠고 부리나케 떠나갔다.
조관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려 골목 안을 바라보았다.
수룡위사대원이 들어간 집 앞에는 작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깃발에는 만가점(萬家店)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는데 온갖 잡동사니를 파는 만물상이었다.
그는 수룡위사대원을 보지 못한 것처럼 태연하게 만가점으로 갔다.
슬쩍 안쪽을 바라봤지만 수룡위사대원은 보이지 않았다.
‘더 안쪽으로 들어갔나?’
그냥 갈까, 아니면 들어가서 확인해 볼까?
잠시 망설이던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수하들까지 보내고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는 좀 서운했다.
만약 그자와 마주치면 물건을 사러 왔다고 하면 될 일 아닌가.
평범한 겉보기와 달리 만가점 안은 상당히 복잡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 사이를 지나 깊은 곳까지 들어가 봤는데도 수룡위사대의 무사가 보이지 않았다.
‘단순한 만물상이 아닌 것 같은데?’
잠시 망설이던 조관은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때 그가 지나온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들어온 거요?”
그는 태연하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살 만한 게 있나 보려고 들어왔는데 사람이 없지 뭐요. 그래서 안으로 들어온 거요.”
삼십 대 초반의 장한이 어두침침한 곳에 서 있었다.
“원하는 게 뭐요?”
“뭐, 이것저것 구경해 보고 나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살까 하오.”
“그럼 밖으로 나가서 골라 보쇼.”
“안쪽에는 물건이 없소?”
“당신이 살 만한 물건은 없소.”
“그래요? 그럼 나갑시다.”
조관은 그의 말에 순순히 따르며 돌아온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장한의 옆을 막 지나가려는 순간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
장한이 황급히 몸을 틀었지만 조관은 뱀처럼 손끝을 틀면서 장한의 목을 움켜쥐었다.
“크윽, 이게 무슨 짓…….”
“물어볼 게 있거든.”
“뭘…….”
“내가 들어올 때는 보이지 않더니, 어디서 나왔지?”
“그거야…… 물건 뒤쪽에 있어서…….”
장한이 대충 얼버무리자, 조관의 두 줄기 상흔이 송충이처럼 꿈틀댔다.
그는 장한을 바짝 잡아당기고, 등 뒤의 검을 잡아 빼서 목에 댄 후 속삭이듯이 물었다.
“나를 어린애 취급하겠다는 건가? 좋아, 그럼 다시 묻지. 좀 전에 들어온 사람, 어디로 갔지? 헛소리하면 네 목에 내 얼굴에 난 상흔보다 더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 주마.”
장한은 예리한 검날이 목을 스치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 저는 잘…….”
스윽.
조관은 장한의 목을 칼로 그었다. 실처럼 그어진 상처를 타고 핏방울이 맺혔다.
“다음에는 더 깊이 파 주지. 말해, 어디로 갔지?”
“저, 저쪽에 뒷문이…….”
공포에 질린 장한이 더듬거리며 눈짓으로 조관의 뒤를 가리켰다.
“좋아, 말을 잘 듣는군. 그럼 하나만 더 묻지. 그는 이곳에 뭘 사려고 왔지?”
장한의 눈빛에 공포가 떠올랐다.
조관의 검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듯했다.
조관은 겁에 질린 그를 다독였다.
“너와 나만 아는 일이다. 무사로서 맹세하지. 절대 네가 알려 줬다는 말을 하지 않으마. 말 안 해도 죽을 거면 모험을 할 만하잖아?”
장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조관의 독사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대하고는, 말하지 않으면 정말로 죽일 거라는 걸 알았다.
“그, 그분은 여자를…….”
그가 더듬거리며 모기 날갯짓 같은 목소리로 말하려 할 때였다.
끼이익.
뒤에서 경첩 비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관은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온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는, 재빨리 검을 거두고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장한을 다그쳤다.
“정말 저 활밖에 없단 말이야? 저 따위 고물 말고 쓸 만한 활이 있을 것 아냐?”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먼지가 쌓인 활이 하나 걸려 있었다.
장한은 갑작스런 말에 잠시 멍했지만, 곧 안쪽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걸 보고 조관의 뜻을 짐작했다.
“그, 그게…… 다른 것이 있긴 한데, 그것은 비쌉니다.”
눈치가 제법인데?
조관은 장한의 순발력에 내심 만족하며 더욱 강하게 다그쳤다.
“내가 그 정도 돈도 없는 줄 알아? 어디 있어? 한번 보기나 하자. 어디 있지? 앞쪽에 있나?”
“그, 그렇습니다.”
“좋아, 앞장서.”
장한은 안쪽을 힐끔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조관도 장한을 밀치며 걸음을 옮겼다.
등줄기 근육이 긴장으로 잔뜩 굳었지만 최대한 태연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안쪽의 문을 열고 나온 자가 두 사람을 붙잡았다.
“잠깐. 보아하니 삼성궁 무사 같은데, 무슨 일로 여기에 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