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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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52화
52화
“그건 그때 가서 정하지요.”
그런데 백리진이 그 내기에 끼어들었다.
“설마 나를 제외하고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임강령이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
백리진은 턱을 쳐들고 힘주어 말했다.
“나 아직 젊다네. 너무 늙은이 취급하지 말게, 아우.”
― 나, 검왕이야!
꼭 그런 표정이었다.
북궁천은 보일 듯 말 듯 입술 끝을 비틀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차갑게 식었던 가슴이 두 사람 덕분에 다시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다 보면 려려가 마음을 바꿀지도…….’
그는 구양우경이 무심코 뱉은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감히 내 것을 훔쳐 가다니…….”
그는 어렴풋이나마 구양우경의 헌원려려에 대한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구양우경은 헌원려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자신의 손에 들린 장난감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남에게 빼앗기기 싫은 귀한 장난감. 오직 자신만이 가지고 놀 수 있는 그런 장난감 말이다.
아니라면 어찌 그녀를 물건처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기에 그는 더욱 더 헌원려려를 포기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그런 자와 혼인하는 모습을 어찌 본단 말인가?
‘려려, 네가 나를 원치 않아도 그런 놈의 여자가 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등에 업힌 헌원려려는 너무 편했다. 이대로 업힌 채 멀리 떠났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슴만 먹먹했다.
지금이라도 진아에 대해서 말할까?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다. 그 말을 했을 때의 반응이 걱정되어서 입을 다물고 있을 뿐.
‘내가 그 말을 하면 당장 삼성궁으로 달려갈 거야.’
달려가서 진아를 빼돌릴 수 있다면 다행인데 그러지 못할 경우가 문제다.
진아를 가운데 두고 북천궁과 삼성궁이 전쟁을 벌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만에 하나 진아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녀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북궁천이 미쳐 날뛸 테니 세상이 피로 뒤덮이는 거야 당연한 수순이고.
‘진아가 안전하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진아는 저에게 모든 것이니까요. 미안해요.’
그러고 보니 미안한 게 너무 많다.
그래서 또 미안하다.
헌원려려는 북궁천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북궁천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흐음, 려려의 얼굴이 따뜻하군. 다행이야.’
* * *
헌원려려를 업은 북궁천 일행은 서평을 오십여 리 지나친 후에야 삼성궁의 순찰 무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때서야 삼성궁이 서평의 광원산장을 공격했으며, 대승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백리진은 그 소식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어! 위 군사가 작정을 하고 공격했군.”
임강령은 순찰 무사에게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물어보았다.
“소궁주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순찰 무사는 명성이 드높은 백리진, 임강령과 직접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황송한지 공손하게 대답했다.
“소궁주께서도 광원산장에 계십니다.”
“소궁주도 공격에 참여했단 말이냐?”
“아가씨가 납치당한 것에 분노해서 선두에 서셨습니다.”
임강령은 백리진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구양우경이 서평 광원산장에 있는데 진원보까지 가야 하는가 싶어서 한 질문이었다.
백리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서평은 위험한 곳이네. 소궁주가 그곳에 있다 해서 이 아이를 그곳으로 데려가는 것은 너무 위험할 것 같군.”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럼 서문 소저를 진원보에 데려다주고 저희만 돌아오지요.”
임강령은 백리진의 의견에 찬성하고 북궁천에게 물었다.
“화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북궁천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헌원려려가 구양우경과 함께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사람이었다.
“찬성입니다.”
그런데 헌원려려가 말했다.
“아니에요. 저를 생각해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려려.”
북궁천은 고개를 틀어서 헌원려려를 째려보았다.
헌원려려는 꿈쩍도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담담히 말했다.
“어차피 천무회와 무림맹의 무사들이 오면 모두 서평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이제 서평의 광원산장이 천사교와 싸울 거점이 되는 거지요. 그럼 차라리 그곳에 있는 게 더 안전해요.”
북궁천은 심술 난 아이처럼 툭 말을 던졌다.
“내가 진원보에 있으면 누구도 너를 건드릴 수 없다.”
헌원려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진원보로 가도 소궁주는 사람을 보내서 저를 서평으로 데려갈 거예요.”
북궁천도 그 말에는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까지 그녀를 데려온 구양우경이다. 하물며 납치 사건이 발생했는데 진원보에 따로 놔두려고 하겠는가.
그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헌원려려가 백리진과 임강령에게 말했다.
“두 분 어르신, 그냥 광원산장으로 가도록 해요. 소녀 때문에 힘든 길을 오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백리진과 임강령도 그녀의 말을 듣고 그게 나을 것 같았다는 생각을 했다.
북궁천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당장 다른 방법이 없었다.
홱, 몸을 튼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자식이 너를 괴롭히면 가만 안 둘 거다.”
헌원려려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댔다.
지난 이 년 동안의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그때도 이랬으면 떠나지 않았을 텐데…….’
* * *
광원산장을 차지한 삼성궁 무사들은 소궁주의 약혼녀마저 돌아오자 천사교도들을 완전히 물리친 것처럼 환호했다.
구양우경은 그녀의 귀환 소식을 전해듣고 입구까지 뛰어나왔다.
“려매!”
헌원려려는 나직이 속삭이며 북궁천을 재촉했다.
“빨리 내려 줘요. 어서요.”
북궁천은 그녀를 내려 주기 싫어서 저만치 달려오는 구양우경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고는 그가 삼 장 앞까지 다가오자 말했다.
“서문 소저가 맨발이어서 방으로 모셔야 할 것 같소, 소궁주.”
걸음을 늦춘 구양우경은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기쁨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 갔다.
그는 자신의 여자가 다른 남자의 등에 업혀 있다는 게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들었다.
더구나 두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안아서 옮기겠네.”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연 그는 북궁천의 등 뒤로 돌아가서 팔을 뻗었다.
“려매, 나에게로 오시오.”
헌원려려는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손을 내밀었다.
북궁천도 더는 그녀를 막지 못하고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구양우경의 품에 안기는 모습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심장이 송두리째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다친 곳은 없소?”
헌원려려를 안아 든 구양우경은 염려가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헌원려려는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분들이 제때 구해 주셔서 저는 괜찮아요.”
“다행이오, 정말 다행이오. 하하하하.”
구양우경은 환하게 웃으면서 백리진과 임강령을 바라보았다.
“두 분 대협,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백리진은 담담히 웃음을 지었다.
“무사히 구출할 수 있어서 우리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네.”
“찬바람에 오래 노출되었으니 몸조리를 잘 해야 할 거네.”
임강령은 헌원려려의 건강을 걱정하며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곳까지 오면서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그녀의 마음이 소궁주가 아닌 단화린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왜 단화린을 거부하는지 몰라도.
‘소궁주의 여인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단화린의 신분도 소궁주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것 같아.’
그럼 왜 거부하는 걸까? 무슨 이유 때문에?
그뿐이 아니다. 단화린이 신분을 숨기려 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의 신분이 무엇이기에 말하지 않는 걸까?
임강령이 머릿속에서 의문을 정리하고 있을 때, 구양우경이 북궁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웃음을 짓고 있지만 눈빛은 겨울의 찬바람보다도 더 차가웠다.
“수고했네.”
“할 일을 했을 뿐이오.”
“공을 세웠으니 그에 대한 상을 줄 것이야. 회룡당에 가서 기다리도록 하게.”
북궁천은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 몸을 돌렸다.
가슴이 텅 빈 느낌.
마음 같아서는 홱 몸을 돌려 당장 헌원려려를 빼앗고 싶었다.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려려, 지금이라도 나를 불러라.’
하지만 헌원려려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오히려 가슴을 후볐다.
“공자, 찬바람을 오래 쐬어서 그런지 열이 좀 나는 것 같아요. 방으로 데려다주세요.”
“저런! 어서 방으로 갑시다. 내 바로 의원에게 연락하겠소.”
“대형!”
북궁천이 회룡당 무사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태극문 제자들이 활짝 웃으며 반겼다.
북궁천은 우중충한 기분을 털어내려고 노력하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무사한 것 같아 다행이군.”
“하하하, 저희들이 수련을 열심히 했잖습니까.”
그때 방문이 열리고 천광호가 고개를 내밀었다.
“돌아왔군. 한숨도 못 잤을 텐데, 일단 쉬고 나중에 내 방으로 오게나.”
그는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수선 떤다는 듯 몇 마디 툭 던지고 방문을 닫았다.
하지만 방문을 닫고 돌아선 그는 씩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하하하! 좋았어! 아주 멋지게 구해 왔군.’
단화린이 서문 소저를 구해 왔으니 회룡당의 위상은 한껏 높아지리라. 당연히 자신도 목에 힘 좀 줄 수 있을 것이고.
그는 대소를 터트리며 기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입만 벌린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자, 들어가세. 당주님 말씀대로 조금 쉬고 싶군. 우리 방이 어디지?”
북궁천도 옆집에 다녀온 것처럼 담담히 말했다.
몸보다 마음이 힘들었다. 잠시 쉬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정리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 *
북궁천은 한 시진 반에 걸친 운기조식으로 피곤을 털어내고 내상을 다스렸다.
이정한 등은 그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방문 앞에 서서 다른 사람이 방에 들어가는 걸 막았다. 그리고 그가 운기를 마친 걸 알자 초강이 가서 간단하게 식사를 준비해 왔다.
북궁천은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그들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이정한이 그릇을 깨끗이 비운 그를 보고 말했다.
“대형, 더 갖다 드릴까요?”
“됐다. 그보다 아우들에게 할 말이 있어서 불렀다.”
이전과 달리 딱딱하고 강압적인 말투.
세 사람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잔뜩 긴장했다.
“말씀하십시오, 대형.”
북궁천은 거두절미하고 짧게 말했다.
“산서로 돌아가라.”
세 사람의 입이 달라붙었다.
북궁천은 표정이 굳은 채 자신만 바라보는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솔직히 말하지. 천사교와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면, 지금 아우들 실력으로는 살아서 돌아갈 확률이 반도 안 된다. 셋이 다 함께 돌아갈 확률은 이 할도 안 되고.”
“그건…… 저희도 압니다.”
초강이 입술을 씹으며 답했다. 사실이 그랬으니까.
북궁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돌아가라는 거다.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생각보다 잘해 주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질 거다. 서평을 빼앗긴 천사교가 전면적인 공격을 취할 테니까.”
그것도 모르지 않았다.
모두가 각오하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정말로 걱정하는 것은 그들이 공격하지 않을 때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도화당과 승룡당이 당한 걸 보면 그들은 결코 힘만 믿고 설치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서평이 너무 쉽게 무너졌어.”
“그거야 삼성궁이 워낙 강해서…….”
“남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이번에 상남까지 갔다 온 검왕과 고검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그럼 그들에게 무슨 꿍꿍이라도 있단 말씀입니까?”
눈치 빠른 동호량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북궁천이 눈빛을 하얗게 빛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