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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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45화
45화
‘헌원려려를 돌려다오!’
북궁천은 속으로 외치며 구양우경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원하는 건 없소. 말한다 해서 소궁주가 들어 줄 성질의 것도 아니고 말이오. 그러니 나에 대해서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소.”
구양우경도 북궁천의 눈을 직시한 채 말했다.
“좋아. 원치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면 말하게.”
북궁천은 자신의 마음이 바뀔 일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대놓고 거부하지는 않았다.
“알겠소.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이만 가 보겠소.”
“그래, 가 보게나.”
북궁천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이야기를 나눈 것은 기껏해야 반 각 정도. 그 짧은 시간에 형체 없는 칼날이 수도 없이 오갔다.
아마 누군가가 그 사이에 있었다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겠다, 구양우경. 하지만 다음의 만남은 오늘과 많이 다를 것이다.’
북궁천은 구양우경의 끈적끈적한 시선을 느끼면서 방문으로 향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궁주, 서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그 소리에 북궁천은 온몸으로 전율을 느끼며 멈춰 섰다.
‘려려가?’
그가 잠깐 멈칫한 사이, 구양우경이 그녀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래? 안으로 모셔라.”
곧 방문이 열리고, 헌원려려가 다소곳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방 안으로 한 걸음 내딛던 그녀는 방문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북궁천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어머? 이 사람은……?’
방문이 열리는 순간, 한쪽으로 서서 고개를 숙인 북궁천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히도 구양우경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반겼다.
“하하하, 어서 오시오.”
헌원려려도 재빨리 표정관리를 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괜한 오해를 사면 많은 사람이 힘들어진다. 어쩌면 한쪽에 서 있는 저 사람도.
“제가 방해를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니오. 이야기가 다 끝나서 저 친구도 가려던 참이었소. 아, 단화린. 인사하게나. 곧 나의 부인이 될 려매라네.”
막 밖으로 나가려던 북궁천은 고개를 숙이고서 무뚝뚝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단화린이라 하오. 만나서 반갑소.”
“서문려려라고 해요.”
답하며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붉어졌다.
‘이 사람도 소궁주의 사람이 되는 건가?’
그녀는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북궁천을 응시했다. 그런데 구양우경이 말했다.
“하하, 려매, 고집이 아주 대단한 친구요. 내가 그렇게 사정했는데도 내 밑으로는 들어오지 않겠다는구려.”
헌원려려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그랬군요.”
“자넨 그만 가 보게. 내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부르지.”
북궁천은 비스듬히 선 채 헌원려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려려, 정말 예뻐졌구나.’
그러나 더 바라보고 있을 시간 여유가 없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 소궁주.”
떨리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추스른 그는 몸을 돌려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세 걸음 째에서 헌원려려의 옆을 스쳐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이러쿵저러쿵 할 것 없이 그녀를 낚아채서 떠나고 싶다. 그 후에 벌어질 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려려, 나와 함께 가자. 너만 허락한다면, 나는 천하와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손을 뻗지 못했다. 그녀가 거부할 것이 두려워서 말을 꺼내 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그는 그녀를 스쳐서 방을 나섰다.
‘침착해라, 북궁천. 아직 시간은 많다. 려려의 생각을 확실히 알고 난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아.’
방문을 닫은 그는 이를 악물었다. 악다문 이가 모조리 부서져서 우수수 떨어질 것 같았다.
헌원려려는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유를 알 순 없지만 단화린이란 자가 지나간 순간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왜 그렇게 그를 신경 쓰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오, 려매.”
구양우경이 조금은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마음을 추스른 헌원려려는 밝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그를 향해 걸어갔다.
바로 그때, 자신이 왜 단화린을 자꾸 신경 쓰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맞아, 그와 닮았어.’
그, 북천궁주와 단화린은 키만 비슷할 뿐 많은 곳이 달랐다.
몸집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과 목소리도 달랐다. 그런데도 이상할 정도로 그를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던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눈빛.
‘그 사람은 왜 나를 그런 눈빛으로 봤을까?’
언젠가 한번쯤은 그에게 물어보고 싶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 * *
신시가 되자 삼성궁의 후속대가 진원보에 도착했다.
진원보에 있던 사람들은 후속대의 면면을 확인하고 내심 안도했다.
후속대 수장은 삼성궁의 군사라 할 수 있는 문현각주 위효릉이었다.
그가 이끌고 온 후속대의 외형적인 전력은 선발대와 차이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들 외에도 중원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수들이 궁주의 명으로 후속대와 함께 왔다.
특히 삼성궁의 봉공인 검왕(劍王) 백리진과 일양신군(一陽神君) 등조립은 선우강과 구양우경마저 한발 양보할 수밖에 없는 절대고수였다.
“천무회와 백검맹이 당분간 싸움을 멈추고 우리와 보조를 맞춰서 천사교를 상대하기로 했소. 그리고 무림맹도 천사교를 응징하기 위해서 예하 문파들에게 무립첩(武林牒)을 띄웠다 하오.”
문현각주 위효릉이 강호의 돌아가는 상황을 전하자, 내전에 들어찬 사람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천사교 놈들, 또다시 꽁무니 빼고 도망가기 바쁘게 생겼군요.”
경무당주(警武堂主) 선우철은 그렇게 말하며 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천사교와 직접 싸워 본 천종규와 천광호는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오전에 상황을 설명했는데도 천사교의 무서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심각하기는커녕 금방이라도 천사교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있는 판이었다.
자신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은 단화린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거늘. 그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한데 말이다.
‘제길, 꼭 찍어서 먹어 봐야 맛을 아나?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아냐?’
천광호가 속으로 투덜대고 있는 동안 위효릉의 말이 이어졌다.
“천무회와 백검맹의 무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서평을 쳐서 본 궁의 무사들이 흘린 피의 대가를 받아낼 것이오.”
간부들 대부분이 그의 의견에 찬성했다.
“좋은 생각이오, 각주!”
“이번에야말로 놈들에게 우리의 힘을 확실히 보여줍시다!”
위효릉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잠은각이 놈들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알아내는 즉시 놈들을 칠 것이니, 모두들 언제든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고 대기토록 하시오.”
북궁천은 후속대와의 회의에 다녀온 천광호의 말을 듣고 눈빛이 가라앉았다.
일양신군 등조립과 검왕 백리진이 왔다고 한다.
등조립은 전에 만났던 금황신군 관호명과 함께 우내오군에 속한 절대고수다.
관호명과 싸워 본 적이 있는 그로선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백리진은 절대지경에 이른 실력을 떠나서, 중원의 수많은 무사들 중 진정으로 대협이라 불릴 만한 사람 아닌가 말이다.
‘한번 만나 볼까?’
이러나저러나 ‘대협’이란 단어는 그에게 최대의 화두였다.
송찬과 방수평, 조관도 백리진과 등조립의 등장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백리진이 ‘대협’이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감정이었다.
“당주, 서평은 언제 공격할 것 같습니까?”
송찬의 질문에 천광호가 이마를 찌푸렸다. 왠지 짜증이 잔뜩 묻어 있는 표정이었다.
“잠은각이 정보를 가져오는 즉시 친다는군. 문제는 놈들의 목을 치는 걸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이 쉽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야.”
“당주와 승룡당주께서 놈들에 대해 다 말씀드렸다면서요?”
“말이야 했지. 절반도 믿지 않아서 문제인 거지.”
그 말에 방수평은 별걸 다 걱정한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후속대가 본 성 최강의 고수들과 함께 왔는데, 설마 놈들에게 밀리겠습니까?”
천광호가 방수평을 째려보았다.
“누가 진다고 했냐? 피해가 많이 날까 봐 그러는 거지. 그럼 우리만 죽어라 고생할 것 아냐?”
“어? 그러고 보니 그런 문제가 있군요.”
“좌우간 언제 출동할지 모르니까 수하들에게 항상 준비해 놓으라고 해.”
“알겠습니다, 당주.”
“나가 봐. 아, 단화린. 자넨 잠깐 나 좀 보지.”
삼대의 대주들이 밖으로 나가고 북궁천만 남자, 천광호가 넌지시 물었다.
“소궁주를 만나봤나?”
“예, 만났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출세는 보장할 테니, 저더러 밑으로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그, 그래서 뭐라고 했나?”
천광호는 궁금함과 초조함이 가득한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북궁천은 거두절미하고 딱 한마디로 대답했다.
“일 없다고 했습니다.”
천광호가 누런 이를 다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잘했네. 아주 잘했어!”
북궁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잘한 걸까?’
* * *
후속대가 도착한 다음 날 저녁.
북궁천은 방을 나와 한가로운 걸음걸이로 마당을 가로질렀다.
며칠 사이 바람이 더욱 차가워진데다가 구름마저 끼어서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북천 같으면 벌써 많은 눈이 내렸을 텐데…….’
그는 북천을 떠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구름에 가려서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뭔가 깃털처럼 부드러운 것이 바람에 날리더니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차가운 느낌. 하얀 눈이었다.
북궁천은 그 자리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젊은 친구가 보기보다 낭만적이군.”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가 하늘을 바라본 지 반 각가량 지났을 때였다.
가끔 지나다니던 경비무사들의 목소리와는 다른 느낌. 절벽을 등 뒤에 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자다.
북궁천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저만치 단아한 모습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제가 낭만적인 분위기를 제법 좋아하는 편이죠.”
그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한마디 던지고 중년인을 직시했다.
“하하하, 말도 제법 재미있게 하는군. 나는 임강령이라 하네. 회룡당의 무산가?”
“단화린입니다. 그런데 혹시 고검이라 불리는 분이 아니신지?”
“강호의 친구들이 그렇게 불러 주긴 하지.”
고검(孤劍) 임강령.
이번 후속대와 함께 온 다섯 고수 중 한 사람이다.
백리진과 등조립에게 밀리긴 해도 그 차이가 크지 않은 고수.
“친구 분들이 별호를 잘못 붙인 것 같군요. 그렇게 웃음이 밝아서야 어찌 고검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훗, 그것도 그렇군.”
임강령은 쓴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시인했다. 그러고는 북궁천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되받아쳤다.
“그런데 자넨 왜 청승맞은 강아지처럼 마당에 나와서 하늘을 보고 있었던 건가?”
졸지에 청승맞은 강아지가 된 북궁천은 담담히 대답했다.
“미끼도 없는 낚시를 드리우고 고기가 잡히길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람 뒤에서 고기가 잡힐 때까지 구경하고 있는 사람 중 누가 더 한심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이 청승맞은 강아지라면 당신은 더하지 않냐, 그 말이다.
임강령은 턱을 쓰다듬으며 북궁천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흠, 이제 보니 말솜씨도 제법이군.”
“제가 말솜씨 좋다는 말은 처음 들어 보는군요.”
려려는 자신이 말할 때마다 정말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남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재미있다고 여기는 걸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천사교와 싸울 때도 말로 그들을 꼬드겼다고 하던데, 이제야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걸 확실히 알겠군.”
“덕분에 희생이 줄어들었으니 나쁠 것은 없지요.”
“그렇지, 나쁠 것은 없지. 그런데 듣자 하니 자네가 마소곡과 싸웠다고?”
“사람 간을 맛있다고 하던 미친 늙은이를 말하는 거라면, 맞습니다.”
“그는 어떻게 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