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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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44화
44화
“놈들은 두 배의 전력을 보내 우리를 상대하게 했수. 도화당을 공격할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사실이 그랬다.
단편적인 일이라 해도 두 번 반복되면 우연이 아닐 수 있다.
“으음, 그래서?”
“놈들 중에 머리가 와룡봉추만큼 뛰어난 자가 있다면 몰라도, 적시에 두 배의 전력을 파견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미심쩍은 일 아니오?”
“본 궁의 간부들은 모두 검증된 사람들이다. 의심하기에는 근거가 너무 빈약해.”
천종규의 그 말에 천광호가 입술을 비틀었다.
“검증된 사람? 형은 무림맹의 일을 벌써 잊었나 보구려.”
“으음, 그건…….”
“나는 아직도 기정이가 내 등에 칼을 들이댔을 때의 느낌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소. 잊지 마쇼. 천사교에 미치면, 부모형제도, 친구도 없다는 걸.”
천광호는 나직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종규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정말 본 궁의 간부 중에 첩자가 있다고 보느냐?”
“물론이죠. 세상에 불만 많은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 삼성궁이라고 해서 없겠수?”
“좋다, 그럼 돌아가서 믿을 만한 사람들을 만나 상의해 보자.”
천광호가 눈을 치켜떴다.
“아직도 내 말을 못 알아 들으셨수? 내가 그 말을 한 것은, 첩자를 잡아내자는 것이지, 상의하자는 게 아니오. 어떤 놈이 첩자인 줄 모르는데 누구하고 상의한단 말이오?”
“그래도 전주나 소궁주라면 믿을 수 있지 않겠느냐?”
허리를 반쯤 숙인 천광호는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말했다.
“나는 본 궁의 어떤 간부도 믿지 않수. 아마 형이 오늘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다면, 형에게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요.”
8장. 납치
회룡당과 승룡당 무사들이 부상자와 시신을 잔뜩 떠메고 도착하자 진원보가 발칵 뒤집혔다.
간부들은 간부들대로 부산을 떨었고, 아랫사람들은 부상자와 시신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칠 대로 지친 회룡당 무사들은 부상자와 시신을 넘기고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 진원보의 임시 회의실인 일원전에서 긴급 간부회의가 열렸다.
천광호가 먼저 미친 호랑이답지 않게 조리 있는 말투로 상황을 정리해서 이야기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저 사람이 정말 광호야?’ 했지만, 이어진 말을 듣자 곧 광호라는 데 이견을 달지 않았다.
“그 개자식들의 대가리를 잘라서 가져오려다가 부상자와 시신이 많아서 그냥 놔두고 왔습죠. 이상입니다.”
천광호는 이를 갈며 말을 맺고 자리에 앉았다.
선우강은 곽조승을 바라보았다.
“서평에 있는 적의 숫자가 삼사백이라 하지 않았나?”
“그렇게 보고 받았습니다. 전주, 아무래도 이번 일에 놈들의 전력이 거의 다 동원된 것 같습니다.”
“현재 들어온 소식은?”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사소한 정보가 몇 개 있긴 합니다만, 전주께서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선우강은 곽조승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보를 모아서 상황을 유추하는 것까진 몰라도, 결정은 자네가 내리는 게 아니야, 곽 령주. 그 일이 신경 쓸 정도로 중요한지 아닌지 하는 판단은 내가 내린다.”
곽조승은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주.”
“말해 봐. 어떤 정보지?”
“화산에서 이십여 명의 중견 제자들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저희가 움직이자 기회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천사교에 무너진 섬서 문파의 생존자들이 암암리에 힘을 결집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만,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어서 사람을 파견했습니다.”
“그게 전부인가?”
선우강이 다그치듯 묻자, 곽조승은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말을 이었다.
“우리 쪽 계획이 새고 있는 것 같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제기랄, 첩첩산중이군.”
천광호는 긴급회의를 다녀오자마자 삼대의 대주들과 북궁천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주력이 도착하면 쉴 틈도 없을 것이다. 단단히 각오하고 있도록. 그리고 미리 말해 두는데, 혹시라도 나에게 이상이 생기면 단화린이 회룡당을 지휘하게 될 것이다.”
일대주 송찬과 삼대주 방수평이 북궁천을 힐끔거렸다.
“왜, 불만 있어?”
송찬과 방수평이 후다닥 손을 저었다.
“아뇨, 없습니다.”
“당주님의 결정이라면 따라야죠.”
미친 호랑이에게 물리긴 싫으니까.
그리고 그 지독한 천사교도들에게조차 공포심을 느끼게 만든 북궁천과는 다툴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좋아, 그럼 그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봐, 단화린.”
“예, 당주.”
“소궁주께 가 보게.”
북궁천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구양우경이 왜 자신을 부르는 걸까?
천광호는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마저 말을 이었다.
“종규 형님이 자네에 대해 말했지 뭔가. 나는 어지간하면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혹시라도 가기 싫으면 말하게. 내가 어떡하든 막아 볼 테니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수라는 게 이번 일로 증명되었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일반 무사로 있는 것일 터. 그럼에도 그는 이것저것 복잡하게 따지지 않았다.
떠나기 전까지 단화린은 그의 수하고, 자신은 그의 상관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북궁천은 천광호의 뜻을 알고 조용히 웃었다.
“가서 만나보지요. 소문대로라면 대단한 사람 같던데, 소문이 맞나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
천광호도 피식 웃었다.
“대단하긴 하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본다면…….”
말을 흐리는 그의 표정이 묘하게 이지러진다.
북궁천은 눈 깊은 곳에서 이채를 번뜩이며 슬쩍 천광호를 떠봤다.
“소궁주의 겉과 속이 다르단 말씀입니까?”
천광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좌우간 내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자네의 기준으로 판단해 보게.”
방을 나선 북궁천의 눈빛이 만장해저(萬丈海底)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마침내 구양우경을 만나게 되었다.
그를 만나는 게 모험일 수도 있다. 그가 자신을 경계한다면 일이 이상하게 흐를 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물러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시기가 조금 빨라졌을 뿐, 언젠가는 마주쳐야 할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려려도 함께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군.’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약간의 준비를 해야 했다.
* * *
북궁천은 얼굴과 목의 성대를 약간 손보고 구양우경을 만나러 갔다.
구양우경은 진원보의 안쪽에 있는 조용한 별원을 사용하고 있었다.
북궁천이 그곳으로 다가가자, 소리 없이 네 사람이 나타나 그를 에워쌌다.
“그대는 누군데 소궁주님의 방으로 가는 것이냐?”
북궁천은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조관에게 들었던 삼성궁의 수룡위사대 대원들이었다.
“회룡당의 단화린이오. 소궁주께서 부르셨다는 말을 듣고 왔소.”
전면에 있던 삼십 대 중반의 장한은 북궁천을 세세히 훑어보았다.
“잠깐만 기다려라. 소궁주께 아뢰겠다.”
그때 방 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를 들여보내라.”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단아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구양우경이 보였다.
헌원려려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북궁천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구양우경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일 장 앞에 멈춰 섰다.
구양우경은 의자에 앉은 채 북궁천을 올려다봤다.
“멀리서 보던 것보다 더 크군.”
북궁천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살짝 고개만 숙였다.
구양우경은 무심한 북궁천의 표정을 보고 이채를 반짝였다.
“듣자 하니 이번 임무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고 하더군.”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일 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오.”
“승룡당주의 말에 의하면, 그대 혼자서 수십 명을 죽였다고 하던데.”
가늘어진 구양우경의 눈이 머리카락 하나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북궁천을 주시했다.
북궁천은 어깨만 살짝 으쓱하고 담담히 말했다.
“그저 죽어라 싸우다 보니 그런 결과가 나온 것뿐이오.”
“천사교도의 무공 수준은 본 궁의 정예 무사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들었다. 그런데도 수십 명을 혼자서 죽였다면 아주 큰 공을 세운 거라 할 수 있지.”
“과찬이오.”
“해서 하는 말인데, 본 공자는 그대가 세운 공을 인정해서 그대를 중용하고자 한다. 단화린,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겠느냐?”
북궁천은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대답했다.
“말씀은 고맙소만, 나는 그냥 회룡당에 있는 게 편하오.”
“본 공자의 직속 무사로 있으면 출세의 길이 훨씬 빠를 텐데?”
“출세를 원했다면 회룡당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거요.”
“하긴 그것도 그렇군. 그런데 그 실력으로 왜 회룡당에 들어갔지?”
“천사교와 싸우기 위해 삼성궁에 들어왔는데, 회룡당에 배정된 것뿐이오. 그리고 나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소.”
구양우경은 북궁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뻣뻣한 청년 무사를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은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해서 안달하고, 극히 일부만이 조심스럽게 그의 청을 거절했다.
그래서 그런지 불쾌감보다는 신선한 충격이 느껴졌다.
‘이런 놈이 하나쯤 있는 것도 괜찮겠지.’
심복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명령만 받들어서 움직일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 전에 확실히 길들여야겠지만.
“그 나이에 욕심도 없군. 남자로 태어났으면 좀 더 높은 곳을 바라봐야 하지 않겠나?”
“욕심이 하나 있긴 한데…….”
“그래? 어떤 욕심이지?”
북궁천은 잠시 뜸을 들이고 담담히 대답했다.
“남들이 인정하는 대협이 되고 싶소.”
구양우경은 말문을 닫고 북궁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장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하게 보이지만.
“대협이란 자신이 되고자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본연의 마음이 우러나서 의협의 길을 가야 진정한 대협이라 할 수 있지.”
“소궁주는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대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대협?”
구양우경은 그 한마디를 반문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그보다 더 우스운 말은 없기라도 한 것처럼.
“프하하하하, 대협이라. 내가 대협이 될 수 있냐, 이거지? 하하하하, 그거 참 재미있는 질문이군. 그대가 보기에는 어떤가? 내가 대협이 될 수 있을 것 같은가?”
“내가 보기에는, 소궁주는 대협이 되지 못할 것 같소.”
북궁천의 솔직한 대답에 구양우경은 피식 웃었다.
“맞아, 나는 대협이 되지 못하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없지만 말이야.”
“왜 대협이 되지 않겠다는 거요?”
“왜냐고? 그야 재미가 없기 때문이지. 대협이라는 사람들은 대부분 따분하게 살고 있는데,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거든?”
“그럼 어떻게 살고 싶소?”
구양우경은 붉은 입술을 묘하게 비틀며 웃었다.
그는 북궁천의 질문에 진정으로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물어보지 않았다. 주위의 누구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고 싶냐고?
한번쯤은 그에 대해서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나는……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면서 살고 싶네. 어떤 일이든지. 그래서 나는…… 대협이 될 수 없는 거라네.”
마지막 말에는 묘한 뜻이 담겨 있었다.
대협이 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대협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왜? 삼성궁의 소궁주가 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지만 눈빛이 너무 차갑다. 겉모습과 속마음이 다른 자라는 걸 들었지만, 남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할지도 모르겠군.’
그때 구양우경이 물었다.
“혹시 나에게 원하는 거라도 있는가? 뭐든 말해 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