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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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37화
37화
백초 대결에 자신이 없는 그는 그쯤에서 머쓱한 표정으로 북궁천의 뜻을 받아 주었다.
“뭐, 정 그렇다면 내가 이긴 것으로 하지. 그래도 십초를 버텨 냈으니 앞으로 욕은 자제하마.”
북궁천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성질이 좀 고약하긴 해도 무사다운 면이 있는 자군.’
회룡당에 들어오게 된 것도 악운만은 아닌 것 같다.
“당주, 어차피 수련을 멈췄으니 잠시 쉬었다가 다시 수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그, 그럴까? 좋아. 이봐! 모두 이각 동안 휴식!”
한바탕 소란은 북궁천에게 많은 이득을 안겨 주었다.
사실 소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의 반은 북궁천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처음에는 천광호를 자극해서 그가 자신의 행동에 간섭을 못 하게 하려고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뜻대로 됐다.
그런데 천광호에게 괜찮은 면이 있다는 것을 안 그는 방향을 살짝 틀었다. 단순히 간섭을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신을 돕게 하면 더 좋을 것 같았던 것이다.
순진한 천광호는 속도 모르고 북궁천의 뜻대로 움직였다.
휴식이 끝나 갈 무렵, 그는 대주들이 모인 자리에 그를 불러서 말했다.
“단화린, 이제부터 너는 수련에서 열외다. 대주 자리를 원하면 언제든 말해.”
옆에 있던 삼대의 대주들이 흠칫하며 천광호와 북궁천을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오른쪽 눈썹 위에 커다란 점이 박힌 자는 일대주 송찬이었고, 바윗덩이처럼 탄탄한 체구를 지닌 자는 삼대주 방수평이었다.
그들은 굴러온 돌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이 걱정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북궁천은 처음부터 대주 자리에 눈곱만큼도 욕심이 없었다.
“그냥 이대에 있겠습니다.”
“그래? 그럼 네 마음대로 해. 단, 임무를 수행할 때는 대원으로서 열심히 해야 한다. 그게 싫으면 지금이라도 회룡당을 떠나라.”
“그렇게 하지요.”
천광호로서도 북궁천의 존재가 기분 나쁠 것은 없었다.
천사교가 준동해서 언제 파견될지 모르는 상황. 고수가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그만큼 회룡당 무사들의 생존율이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단화린, 네가 누군지 알려 하지 않겠다. 속은 좀 상해도 패배 역시 상관하지 않겠다. 대신 재수 없게 내 밑에 들어와 궂은 일 도맡아서 하는 이놈들을 부탁한다.’
그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언젠가 혈풍이 불 거라는 걸. 삼성궁의 몇 사람만이 알고 있는 극비의 정보를 말이다.
수하들을 유난히 닦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강해져야 나중에 살아서 볼 수 있을 테니까.
5장. 수상한 죽음
이틀간 회룡당에서만 지낸 북궁천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만 더해갔다.
하루의 시간이 촌각보다 더 빨리 가는 듯했다.
남은 시간은 보름이거늘, 아무 것도 해 보지 못한 채 이틀이 물 흐르듯 지나가 버린 것이다.
늦은 밤 모두가 잠들었을 때 설매원을 살펴볼까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첫날 밤 소변을 보는 척하며 밖으로 나가 본 후 포기했다.
곳곳에서 타오르는 화톳불로 인해 삼성궁 전체가 밝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또한 헌원려려가 밤에는 밖으로 나오지 않을 터, 그녀를 찾기 위해서 설매원 깊숙이 들어가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다.
그녀를 납치해서 도망칠 것이 아니라면, 자칫 그녀만 힘들게 만들지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회룡당에 들어온 지 사흘째 되던 날. 누군가가 천광호를 찾아왔다.
그로부터 일각 후, 천광호가 조관을 불러들였다.
조관은 천광호를 만나고 오더니 북궁천에게 다가왔다.
“단화린,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네.”
의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던 북궁천은 조관을 바라보았다.
“임무라도 떨어졌소?”
“아직 정확한 것은 모르네. 잠은각으로 오라니 가 보면 알겠지. 실력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에 당주께선 자네와 함께 가 보라 하셨네.”
잠은각(潛隱閣)은 정보 조직을 총괄하는 곳이라 들었다.
왜 그들이 십이당 중에서도 괄시받는 회룡당의 사람을 원하는 걸까?
‘가 보면 알겠지.’
북궁천은 찻잔을 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알았소. 그럼 가 봅시다.”
조관과 함께 회룡당을 나선 북궁천은 잠은각으로 가는 길의 광경을 머릿속에 세세히 기억해 두었다.
혹시라도 밤에 움직여야 할 일이 있게 되면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런데 회룡당이 멀어질 즈음, 조관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잠은각은 설매원 옆에 있다네. 잘하면 서문려려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순간적으로 북궁천의 눈 깊은 곳에서 열기가 피어났다.
“잠은각에서 설매원 안을 볼 수 있소?”
“이 층으로 올라가지 않는 이상 담장 때문에 안은 보이지 않네. 대신 문 앞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잠깐 동안은 안을 볼 수 있지. 사실 저번에도 문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봤다네.”
북궁천도 지난 사흘 동안 삼성궁의 조직과 인물, 건물 배치 등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교육 받았다.
그래서 잠은각이 설매원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을 가며 설매원 안쪽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미처 모르고 있던 터였다.
‘려려가 나와 있으면 좋을 텐데……,’
잠은각은 설매원의 담장에서 십여 장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반듯하게 뻗은 길을 백여 장 걸어가다가 좌측으로 꺾어지자 길게 뻗은 담장이 나타났다.
조관이 기다렸다는 듯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곳이 설매원이고, 저 건물이 잠은각이네.”
잠은각은 설매원의 담장에서 십여 장가량 떨어져 있었다.
잠은각까지 가는 길 중간에 설매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고, 그 앞에는 무사 두 명이 삼엄한 눈빛을 빛내며 경비를 서고 있었다.
북궁천은 설매원 입구 앞에 서 있는 경비무사를 의식치 않고 입구 앞까지 걸어갔다.
경비무사가 조관과 북궁천의 복장을 보더니 조소를 지었다.
조관은 상관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지만, 북궁천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잘됐군.’
그는 두 사람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설매원 안쪽이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지금 우리를 보고 비웃은 거요?”
두 경비무사는 북궁천을 가소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경비를 서고 있긴 하나 단순한 일반무사들이 아니었다. 삼전 중 검신가의 지휘를 받는 검화전(劍華殿)의 무사들로 회룡당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하물며 말단무사쯤이야…….
“웃기는 놈이군. 우리가 언제 너희를 비웃었단 말이냐?”
“그럼 입가에 떠 있는 조소는 뭐요?”
“내가 조소를 짓던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기분이 나쁘잖소?”
북궁천은 이마를 찌푸리고 받아쳤다.
그러면서도 눈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안쪽을 살폈다.
소문대로 설매원 안쪽은 바깥과 딴 세상이라 할 정도로 잘 꾸며져 있었다.
인공과 자연을 절묘하게 배합시킨 정원은 늦가을에 남은 노랗고 빨간 단풍으로 더욱 멋이 풍겼고, 건물 하나하나가 정원과 조화를 이루어서 선계처럼 아름다웠다.
‘려려, 어디 있느냐?’
그때 조관이 그를 말렸다.
“화린, 그만 가세. 저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 비웃은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경비무사 중 하나가 막 북궁천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다가 조관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
“그래도 대주쯤 되니 눈치가 빠르시군.”
북궁천은 그 말에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때마침 시빗거리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일개 평무사가 대주에게 그따위 말투라니. 윗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수하들을 잘못 가르친 것 같군.”
“이놈이 정말……!”
경비무사는 눈을 치켜뜨고 북궁천을 노려보았다.
바로 그때, 설매원 안쪽의 전각에서 두 여인이 나오더니, 등을 보이며 다른 전각으로 걸어갔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북궁천은 그중 한 여인이 헌원려려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보았다.
‘려려…….’
당장 달려가서 그녀 앞에 서고 싶었다. 소리쳐 불러 세워서 자신이 왔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럴 수가 없으니 더욱 가슴이 답답했다.
‘내가 왔다, 려려. 고개를 돌려 봐라. 얼굴이라도 보여다오!’
일단 부딪쳐볼까?
그러다 려려가 싫어하면 어떡하지?
그가 갈등하고 있는데, 하늘이 그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헌원려려가 고개를 돌려서 입구를 바라본 것이다.
북궁천은 숨이 멎는 듯했다.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단순히 오래 떨어져 있어서, 그리움이 사무쳐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북천궁에 왔을 때는 수수한 옷차림에 대충 빗어 올린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좋은 옷을 주고 시비를 붙여 꾸미려 해도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꿈꾸었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가꾸어진 얼굴에 눈처럼 하얀 옷을 걸친 그녀는 하늘에서 금방 내려온 선녀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북궁천은 그녀의 그러한 변화가 조금은 야속했다.
‘나와 있을 때도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아.’
하지만 서문려려는 입구를 보면서도 북궁천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북궁천 모습은 과거와 너무나 많이 달랐다.
헤어질 때에 비해서 반쪽이 된 몸. 살이 빠지면서 얼굴도 많이 달라졌고, 대충 흘러내린 머리카락마저 얼굴을 절반가량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더구나 북천의 주인이 삼성궁에 왔을 거라고 어찌 그녀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녀는 입구를 보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돌리고 다시 전각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시녀로 보이는 여인이 문을 열자 안으로 들어갔다.
‘후우우우.’
북궁천은 그녀가 전각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경비무사가 싸늘하게 말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꺼지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다, 애송이.”
목적을 달성한 북궁천은 그들과의 시비를 그 정도에서 멈췄다.
“오늘은 바쁘니 그만 가겠소. 아! 내 충고 하나 하는데, 지나가는 사람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지 마시오. 기분이 무척 나쁘니까.”
경비무사에게 한마디 던져 준 그는 상대의 반응을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뭐야? 뭐 저런 자식이 다 있어?”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놈 같은데 겁대가리가 없군. 언제 한번 혼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리지…….”
경비무사들은 어이가 없는 듯 구시렁거렸지만, 북궁천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잠깐이었지만 고개를 돌리기 직전의 헌원려려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았다.
혼인이 얼마 남지 않은 여인이라면 조금이라도 들떠 있어야 하거늘…….
‘원치 않는 혼인인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온갖 생각이 뇌리를 흔드는 와중에도 두 눈 깊은 곳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만약 혼인에 문제가 있다면, 자신에게는 잘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 * *
잠은각은 비룡가와 관련된 조직 중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각주인 천유문은 예순다섯 살로 비룡가 가주인 천군호의 숙부였으며, 당연히 천광호에게도 숙부가 되었다.
그는 천광호가 가장 신뢰하는 가문의 어른이자, 천광호를 미친 호랑이가 아닌 미친 고양이 취급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관과 북궁천이 안으로 들어가자, 보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허리를 세웠다.
“왔군.”
“부르셨습니까, 각주?”
천유문의 눈이 북궁천을 향했다.
“저 젊은이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며칠 전에 새로 들어왔습니다.”
“그래? 실력이 괜찮은가 보군. 그 덜떨어진 고양이 새끼가 내세운 걸 보면 말이야.”
조관은 얼굴의 상흔을 씰룩이며 겨우 웃음을 참고 말했다.
“실력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각주.”
천유문은 북궁천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몸도 좋고, 눈빛도 좋고. 고양이 새끼가 사람 복은 있단 말이야.”
그러고는 서탁 위의 책을 덮고 본론을 꺼냈다.
“너희들이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우리 아이들을 시킬까 했는데, 아무래도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을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부른 거다.”
“말씀하시지요.”
“평산에 가서 몰래 잡아와야 할 놈이 있다.”
“누굴……?”
“두종진이라는 이름을 쓰는 놈이다.”
“저희가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습니까?”
자칫하면 죽어라 일해 놓고 욕만 먹을 수 있다.
몇 번 그런 경우를 당해본 조관은 자신들이 손을 쓸 수 있는 한계를 알고 싶었다.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다. 그저 목숨만 살려서 내가 말하는 곳으로 데려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