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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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30화
30화
‘그 사람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금쯤은 나를 잊었겠지?’
중년 여인이 그늘진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대공자께서 진아를 데려간 것 때문에 걱정되느냐? 너무 걱정 마라. 다 너와 진아를 위해 그런 것이니까.”
여인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중년 여인은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혼자 떠들어댔다.
“삼성궁에서 신경을 쓴다면 진아의 병쯤은 금방 낫게 될 거다. 그리고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면 사람들이 너를 하찮게 생각할 것 아니냐?”
‘고모는 몰라요, 그 사람이 왜 진아를 데려갔는지.’
“호호호호, 정말 생각도 깊으시지. 진아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너는 아무 걱정 말고 행복하게 살아라. 네 고모부, 아니 양부가 대공자와 너를 맺어 주려고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느니라.”
여인은 중년여인의 수다를 들으며 창문을 닫고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대공자가 진아에게 관심을 보일 때 조심했어야 했다. 그런데 한순간의 방심이 모든 것을 뒤틀어 놓았다.
자신이 대공자의 집요한 청혼을 거부하자, 서문격과 대공자가 진아의 병을 이용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너무 몰라.’
그런데 고모부, 이제는 양부가 된 서문격은 대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을까?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이 바람도 없는데 파르르 떨렸다.
마차가 멀어지자 북궁천도 몸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고개를 다시 돌려 마차를 바라보았다.
청력을 집중해서 마차 안에서 들리는 말이라도 들으면 누군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마차는 이미 방향을 돌려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일개 마차의 호위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강한 자들이다. 누가 타고 있기에 그런 자들이 호위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때 황보청이 그를 불렀다.
“대형, 저쪽 객잔으로 갑시다. 근처에서는 저 객잔의 방에서 숭산의 경치가 제일 잘 보입니다. 뭐 술맛도 제일 좋고요. 하하하.”
* * *
등봉의 객잔에서 하룻밤을 지낸 북궁천 일행은 아침 일찍 객잔을 나섰다.
“대형, 정말 그냥 가실 겁니까? 여기까지 오셨으니 소림사 구경은 하셔야죠.”
객잔을 나서자마자 황보청이 채근 댔다.
북궁천은 고개를 돌려 숭산을 바라보았다.
하루 정도 아니, 한나절 정도 남양에 늦게 간다 해서 무슨 일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조급증이 일어서 소림사가 아니라 황궁이라 해도 구경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오늘은 그냥 가세.”
북궁천이 단호하게 말하고 돌아서자, 황보청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쉬움을 털어냈다.
“대형께서 싫다면 어쩔 수 없죠.”
그렇게 숭산을 뒤로 한 채 등봉을 빠져나온 그들은 곧장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런데 관도를 따라 얼마쯤 갔을까, 저만치 앞쪽에서 달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펄럭이는 옷자락, 번쩍이는 머리. 멀리서 봐도 한눈에 승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차림새였다.
일반적으로 승려들이란 움직임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남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경공술을 펼치며 날듯이 달려왔다.
그 바람에 북궁천 일행과 빠르게 가까워졌다.
황보청은 그들과의 거리가 십여 장으로 줄어들자 반색하며 소리쳤다.
“대정스님 아니십니까?”
달려오는 승려는 모두 다섯. 똑같은 승복을 입고 머리마저 삭발을 한 터라 멀리서 보면 비슷비슷했다. 그런데 그들 중 뒤쪽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승려들은 황보청의 외침을 듣고 걸음을 늦췄다.
그들 중 삼십 대로 보이는 승려가 황보청을 보며 말했다.
“아미타불. 황보세가의 시주가 이곳에는 어인 일이오?”
“하하하, 대형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길입니다.”
소림사의 제자들은 덩치 큰 청년이 황보세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숭산이 코앞인데, 무슨 일로 그리 급하게 달려가시는 겁니까?”
황보청의 질문에 대정의 눈빛이 찰나간 흔들렸다. 말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있던 승려가 말했다.
“천사교가 준동했다 하오. 맹에서 전령을 보냈다 하니 곧 황보세가에도 소식이 전해질 거외다. 여행은 나중으로 미루고 세가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소?”
황보청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천사교(天邪敎)는 이십여 년 전에 무림맹을 뒤흔든 천사종(天邪宗)이 세운 사교다.
그들이 다시 준동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무림맹의 주축이었던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게 청천벽력이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이미 종남과 화산이 그들에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라 하오. 빈승들은 장문인께 급히 소식을 전해야 하니 이만 가 보도록 하겠소.”
“그럼 다음에 보지요. 아미타불.”
대정도 황보청을 향해 반장을 취하고는 몸을 돌렸다.
떠나가는 소림 제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황보청의 눈빛에 갈등이 일었다.
돌아가야 하나, 그냥 계획대로 남양에 가야 하나.
하지만 그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대형, 그만 가죠?”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나?”
“제가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데요, 뭐.”
혼이나 안 나면 다행이지.
그리고 그에게는 남양에 가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나름의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 * *
늦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오후, 이십 대 청년 여섯 명이 남양성에 들어섰다.
그들은 비를 막기 위해서 대나무로 만든 챙이 넓은 갓을 쓰고 있었다.
이틀 전에 등봉을 출발한 북궁천 일행이었다.
남양성에 들어선 그들은 황보청을 앞세우고 동서로 뻗은 대로로 들어섰다. 황보청이 잘 아는 곳이 있다며 객잔에 머무는 것보다 나을 거라 해서 그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 서너 채의 건물이 들어선 작은 장원 앞에 도착한 황보청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장원의 정문 위 현판에는 ‘선유원(仙儒院)’이라는 글자가 용사비등(龍蛇飛騰)의 멋진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황보청은 젖은 머리카락까지 깔끔하게 다듬은 후에 문을 두드렸다.
탕탕탕!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대답이 들렸다.
“누구요?”
“정주의 황보청이라 합니다.”
곧 문이 열리고 쉰 살가량의 중년인이 문을 열었다.
“어이구, 정말 황보 공자시군요. 들어오시지요.”
황보청은 마치 자기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대형, 들어오십쇼.”
황보청은 곧장 선유원주를 찾아갔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원주님.”
황보청은 백색 장삼을 입은 중년인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중년인이 묘한 표정으로 황보청을 보며 답했다.
“나야 변함없지. 그런데 황보 공자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예까지 왔는가?”
“대형께서 남양에 볼일이 있다기에 따라왔습니다.”
“예아 때문에 온 것은 아니고?”
중년인이 던진 뜬금없는 말 한마디에 정곡을 찔린 황보청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하, 하, 하. 뭐, 그런 이유도 조금은 있지요.”
“조금이라. 예아를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인가 보군. 그것 참 다행이야. 난 또 우리 예아를 괴롭히려고 온 줄 알았지.”
“예? 제가 언제 예매를 괴롭혔단 말씀이십니까?”
“저번에 그러더군. 황보 대협의 회갑 잔치에 갔을 때, 자네가 어찌나 바짝 붙어서 졸졸 따라다니는지 얼굴이 화끈거려서 혼났다고 말이야.”
“에이, 그것은 대인께서 잘못 아신 겁니다. 저는 예매를 보호하기 위해 호위를 한 것입니다.”
“예아는 그렇게 말하지 않던데? 술 냄새 풍기면서 얼굴을 들이대는 것도 호위하는 방법인가?”
“그, 그건 예매의 얼굴에 뭐가 묻어서…….”
“험, 좌우간 머무는 것은 뭐라 하지 않겠네만, 조용히 있다가 가게. 마음 약한 예아 괴롭히지 말고.”
황보청은 할 말이 많았지만 가슴 속에 묻어 두었다.
고슴도치도 자신의 자식은 예쁘게 보이는 법. 아버지의 눈에는 아무리 사나운 딸도 귀엽게 보이는 법이니까.
“저, 그런데 예매는 어디 갔습니까?”
“요즘 신부 수업 중이네. 혼기가 찼으니 좋은 남자 골라서 시집보낼 생각이야.”
헉!
대경한 황보청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굳이 서두를 이유가 있겠습니까? 일이 년 정도는 더 여유가 있을 텐데요.”
“그럼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그냥 놔두란 말인가? 그러다 아무도 안 데려가면 어쩌라고?”
“걱정 마십시오! 그때가 되면 제가……….”
“자넨 안 돼.”
단호한 거부.
얼굴이 붉어진 황보청은 울상이 되었다.
“원주님…….”
“혹시 모르지. 술을 끊는다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그도 아니면 강호에서 자네의 뛰어남을 증명해 보이든가.”
첫 번째는 솔직히 힘든 일이다. 그러나 두 번째라면 어떻게 될 것도 같다. 마침 이번에 절세의 고수를 대형으로 모시지 않았는가 말이다.
“좋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제 능력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단, 결정은 예아가 내릴 것이니 그리 알게.”
절반의 허락.
그것만 해도 어딘가?
황보청이 힘차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원주님!”
중년인은 못 미더운 눈빛으로 황보청을 흘겨보고는 시선을 황보청의 뒤로 돌렸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처음 보는군.”
“아! 제가 이번에 대형으로 모신 분과 그분의 의형제들입니다.”
중년인은 북궁천을 보고 한동안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선유원은 강호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그곳의 주인인 백선수사(白鮮修士) 유원당은 강호명숙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무공과 학문이 동시에 뛰어난 사람.
명예욕이 없어 세상에 나오지 않는 사람.
세상에 나오면 제갈세가와 그 지혜를 다툴 수 있는 사람.
그게 강호명숙이 평하는 유원당인 것이다.
그런 유원당이 북궁천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대단한 관상이군. 황보청이 대형으로 삼을 만해.’
그때 황보청이 고개를 돌려 북궁천에게 말했다.
“대형, 이분은 백선수사라 불리시는 유원당 어른이십니다.”
북궁천은 담담히 포권을 취했다.
“단화린입니다. 머무는 걸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차피 남은 방을 내준 것이니 너무 부담 가질 것은 없네. 그런데 고향이 산서………? 아니지, 그보다 더 북쪽 같은데, 맞나 모르겠군.”
유원당은 몇 마디만 듣고도 북궁천의 고향을 정확히 짚어 냈다. 나름대로 사투리를 숨겼거늘. 세상의 온갖 사투리를 알고 있지 않다면 힘든 일이었다.
감탄한 북궁천은 솔직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무슨 일로 온 건가?”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단 공자와 무척 가까운 사람인가 보군.”
북궁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닌 사이일 수도 있지요.”
“여자인가?”
북궁천은 유원당을 무심한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북천궁에도 뛰어난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유원당처럼 간결한 질문만 가지고 핵심을 파고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유원당은 적당한 선에서 물러설 줄도 알았다.
“부디 그 사람을 찾아서 잘되기를 바라겠네.”
모든 것을 짐작한다는 투의 말.
북궁천은 가슴 속이 훤히 드러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불쾌감을 주지 않고 말을 맺는 유원당을 보고 다시 한번 감탄했다.
“감사합니다.”
“황보 공자, 일행과 함께 유벽당으로 가게. 불편한 점이 있으면 이 총관에게 말하고.”
* * *
북궁천은 유벽당에 머물면서 가마를 타고 뛰어난 무사들의 호위를 받는 미인에 대해 수소문해 보았다.
하지만 육 개월 전의 일을, 그것도 스쳐 지나간 일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틀째 되던 날 오후, 황보청이 마침내 그녀의 존재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대형이 말한 여인을 봤다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래?”
북궁천은 들뜬 마음을 억누르고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은 어디에 있지?”
“지금 암평도국이라는 도박장에 있다고 합니다.”
“직접 만나지 않았나?”
“다른 사람에게 말만 듣고 바로 이곳으로 왔습니다. 어차피 이곳을 지나가야 하는 길이어서요.”
“그자가 본 사람이 그녀라는 걸 어떻게 확신한다고 하던가?”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 가마를 타고 가는 그녀에게 접근하다가 하마터면 맞아 죽을 뻔했다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해 준 사람은 그자의 부러진 다리뼈를 치료해 준 의원입니다.”
이정한 등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북궁천은 그들이 오면 자신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총관에게 남겨놓고, 황보청과 종리기진만 대동한 채 선유원을 나섰다.
그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려려가 있는 곳을 알고 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