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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정록 29화

무료소설 마정록: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8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마정록 29화

 

29화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종리 아우도 같이 갈 거지?”

 

종리기진은 ‘남양’이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그렇게 될 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형님이 간다면 저도 가야죠.”

 

“개인적인 일로 가는 거니까, 자네들은 함께 가지 않아도 되네.”

 

북궁천은 그들의 동행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과 태극문 제자들은 사정이 달랐다.

 

그런데 황보청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무슨 소립니까? 동생으로 삼은 지 하루 만에 저희를 내팽개치겠단 말씀이십니까?”

 

누가, 언제 내팽개쳐?

 

북궁천은 황보청의 지나친 반응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그의 청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하남에 대해선 그들이 태극문 제자들보다 훨씬 잘 아는 만큼 최소한 길을 헤매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함께 가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대형.”

 

황보청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마치 환호라도 지르고 싶은 표정이었다.

 

‘흐흐흐, 석 달 만에 예매를 볼 수 있겠군.’

 

북궁천이 그런 황보청을 보며 물었다.

 

“황보 아우는 남양에 대해서 잘 아나?”

 

“남양 사람만큼은 아니어도 어지간한 자들보단 잘 알죠.”

 

“그럼 남양 일대의 강호 세력에 대해서도 잘 알겠군. 몇 가지 알아볼 게 있는데, 우린 남양이 초행이니 자네가 좀 도와줘야겠네.”

 

“하하하, 그런 일이라면 걱정 마시고, 찾아가고 싶은 곳 있으면 어디든 말씀하십쇼.”

 

자신만만한 황보청의 대답에 북궁천도 흡족해했다.

 

‘아우로 삼길 잘했군. 실력도 쓸 만하고, 많은 도움이 되겠어.’

 

 

 

객잔에서 밤을 보낸 북궁천 일행은 아침 식사를 하며 황보청과 종리기진을 기다렸다.

 

그런데 젓가락을 놓기도 전에 황보청이 득달같이 객잔으로 들어오더니 출발을 재촉했다.

 

“대형, 식사 다 하셨으면 빨리 가죠.”

 

“식사야 거의 다 끝났지. 그런데 왜 그리 서두르는 건가?”

 

“남양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 하, 하.”

 

황보청은 북궁청에게 말하고 머쓱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종리기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갈 길이 멀어서 서두르는 것이 아니다. 북궁천이 자신들을 떼어 놓고 갈 것이 염려되어서 일찍 온 것도 아니다.

 

황보청은 부친이자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중에게 말했다. 남양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아버님, 새로 생긴 대형을 따라서 남양에 다녀오겠습니다.”

 

황보중이 그 말을 듣고 대노했다.

 

“뭐야? 대형? 어떤 놈이 너 같은 술꾼을 동생 삼았단 말이냐?”

 

“단화린이라고, 산서 태원에서 오신 분인데....”

 

“뭐? 산서의 단화린? 이놈이 술만 퍼먹고 돌아다니더니, 대 황보세가의 아들이 이름도 없는 산서 무사를 형으로 삼아? 안 돼!”

 

“경험도 쌓을 겸 잠깐 다녀오면....”

 

“지랄 말고 수련이나 해! 아니, 아예 이 기회에 일 년 동안 폐관수련 하도록 해라!”

 

 

 

결국 황보중은 황보청에게 폐관수련의 명을 내렸고, 황보청은 몰래 도망쳐서 객잔으로 달려온 것이다.

 

황보중의 명령을 어겼으니 이제 자신까지 덤으로 찍힌 상황. 종리기진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도 모르겠다. 내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는 황보청을 설득하는 걸 포기한 상태였다.

 

황보청이 악착같이 따라가려는 진정한 이유를 아는 것이다.

 

어쨌든 북궁천도 황보청이 서두르는 게 싫진 않았다. 그의 마음은 벌써 남양에 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북궁천 일행은 생각보다 반 시진 정도 일찍 정주를 출발했다.

 

 

 

 

 

 

 

2장. 준동

 

 

 

 

 

차가워지는 바람에 온 세상이 탈색되어 가는 계절.

 

동서로 길게 이어진 거산준봉이 석양빛에 황금빛으로 물들어 간다.

 

끝도 없이 펼쳐진 웅장한 산세.

 

“저 산이 소림사가 있다는 숭산이란 말이지?”

 

북궁천은 감탄한 표정으로 물으며 산을 올려다봤다.

 

지금까지 숱한 산을 봤다. 그중에는 눈앞에 있는 산보다 훨씬 더 높고 거대한 산도 많았다.

 

그럼에도 산을 보면서 은연중 엄숙함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오악 중 중악(中嶽).

 

태산북두 소림사를 품고 있는 숭산.

 

검을 찬 무사들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 가 보고 싶은 산이 바로 앞에 있기 때문인가.

 

“예, 대형. 내일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황보청이 넌지시 제안했다.

 

하지만 북궁천은 소림사를 구경하는 것보다 남양으로 가는 게 더 급했다.

 

“오늘은 숭산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소림사 구경은 다음에 하세.”

 

 

 

북궁천 일행이 숭산의 관문인 등봉현에 도착한 것은 석양이 붉게 물들 무렵이었다.

 

한창 때만 해도 등봉현에는 소림사를 방문하려는 무사들과 숭양서원을 가려는 학사들이 오가는 사람의 반은 될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소림사가 제자들의 산문 출입을 자제시킨 지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무사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학사들만 간혹 눈에 띄었다.

 

그렇게 북궁천 일행이 등봉현을 동서로 가로지른 대로에 들어섰을 때였다.

 

두두두, 콰르르르.

 

어딘가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 한 대가 무사 십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우측 길에서 나타났다.

 

붉은 기둥에 가죽으로 뒤덮인 지붕, 옆으로 늘어진 화려한 매듭. 전체적으로 고급스런 이두마차였다.

 

마부석 옆에는 파란색 깃발이 하나 꽂혀 있었는데, 펄럭일 때마다 ‘포(抱)’라고 수놓인 글자가 보였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그 마차를 본 황보청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저건 포원산장(抱原山莊)의 마차잖아?”

 

“아는 곳인가?”

 

북궁천이 마차를 보며 물었다.

 

“예, 대형. 전에 한번 장주인 서문 대협이 저희 세가에 온 적 있습니다.”

 

“포원산장이란 곳은 어떤 곳이지?”

 

“노산 포원산장은 삼성궁을 따르는 세력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이죠. 특히 장주인 서문각 대협은 강호의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분입니다.”

 

삼성궁이라는 말에 북궁천도 흥미가 인 표정으로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차의 문이 닫혀 있어서 안을 볼 수는 없지만, 호위무사들이 뛰어난 걸 봐서 귀한 신분을 지닌 자가 타고 있는 듯했다.

 

‘려려도 뛰어난 무사들이 호위하고 있었다고 했지……….’

 

다만 마차가 아닌 가마를 타고 있었다고 했다. 상아처럼 빛나는 하얀색 가마를.

 

그사이 마차는 우측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가 마차를 바라보고 있는데, 황보청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소림사에 다녀오는 길인가 본데요?”

 

“소림사에?”

 

“소림사 장로인 광원대사께서 서문 대협의 친형님이거든요. 그래서 큰일이 있을 때마다 가족들이 소림사를 방문하곤 하죠. 오늘은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누가 소림사를 방문했던 무슨 상관이랴.

 

그런데 북궁천은 이상할 정도로 마차에 신경이 쓰였다.

 

마치 운명의 끈이 이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차 안에는 사십 대 후반의 중년 여인과 스물서너 살 정도의 젊은 여인이 타고 있었다.

 

귀티가 흐르는 중년 여인은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만족한 표정으로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았다.

 

조카는 정말 아름다웠다.

 

언뜻 보면 길거리를 가다 간혹 볼 수 있는 미녀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조카에게는 그 어떤 여인에게도 없는 신비한 아름다움이 존재했다.

 

눈을 보고 있으면 빨려들 것 같고, 입술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뛰었다. 

 

티 한 점 없는 옥빛 피부에 옴폭한 보조개, 적당한 콧날, 강렬한 아름다움보다 더 치명적인 내미지상(內美之象)을 지닌 여인.

 

여자인 자신이 봐도 눈을 떼기 싫은데 어떤 남자가 저 아이를 보고 욕심나지 않을까?

 

더구나 그녀는 자신의 조카가 천하제일을 다툴 청년의 여인이 된다는 게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이제 본 가의 모든 절차를 끝냈으니 혼인식을 올리는 일만 남았구나.”

 

그 말에 젊은 여인의 눈빛이 보일 듯 말 듯 흔들렸다.

 

하지만 여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중년 여인은 자신의 기분만 한껏 즐겼다.

 

“호호호호, 대공자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몇 달 전부터 그렇게 너를 맞이하려고 애쓰셨는데 말이다. 좌우간 모든 게 너의 복이다. 오죽 좋아하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도 너를 부인으로 삼으려 하겠느냐?”

 

중년 여인의 표정이 밝아질수록 젊은 여인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저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아요, 고모.’

 

그녀는 안개가 서린 눈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검원장을 떠나온 이유는 자신의 몸속에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북궁천이 알면 아기를 빼앗아 갈지도 모르는 일. 그녀는 그들의 이목이 닿지 않는 만 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몰래 아이를 낳을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많은 갈등이 일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로서 아이를 빼앗기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그녀는 힘든 길이 되더라도 떠나기로 결심했다.

 

북천궁의 안주인이 될 마음이 없는 이상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만 리 길이나 되는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유일한 혈육인 고모를 만났다.

 

그리고 몇 달 후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를 낳은 그녀는 몸이 추슬러지면 검원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여섯 달이 지나도 떠날 수가 없었다. 선천적인 기맥으로 인해서 아기의 몸이 너무 약했던 것이다.

 

그녀는 아기가 건강해질 때까지 좀 더 머물기로 했다.

 

그런데 때마침 고모부의 생신 자리에 나타난 삼성궁의 대공자가 그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을 그녀의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사사건건, 알게 모르게 대공자와 고모부가 그녀의 행동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대공자였다. 자신의 눈에 비친 그는 알려진 것과 많이 달랐다.

 

‘사람들은 너무 모르고 있어, 대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느낀 그에 대해서 말할 수도 없었다.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아니, 안다 해도 모른 척할 것이 분명하니까.

 

가슴이 답답해진 그녀는 마차의 벽에 난 작은 창문을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마차는 등봉의 거리를 빠른 속도로 통과하고 있었다. 마차에 바짝 붙어 있는 호위무사들 사이로 건물과 사람들이 스치듯이 지나갔다.

 

호위무사들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호위무사 중 절반은 포원산장의 무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삼성궁의 대공자가 붙여 준 검신가의 고수들이었다.

 

혼사를 성사시키지 못해 안달하던 서문각은 그녀의 안전을 챙기는 대공자의 마음씀씀이를 칭찬했다.

 

대공자의 내심을 아는 그녀로선 그들의 존재가 조금도 반갑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그녀의 안전을 지키는 것 외에 또 다른 임무가 있었다.

 

그녀가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

 

그녀는 보이지 않는 새장에 갇힌 새였다.

 

훨훨 날아가고 싶어도 새장을 벗어날 수 없는 신세.

 

혼자였다면 상처를 입더라도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할 텐데, 지금은 그럴 수도 없으니 가슴만 아팠다.

 

‘너무 방심했어.’

 

그때 언뜻, 호위무사들 사이로 저만치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낭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형. 곧 어두워질 것 같은데, 여기서 하루 지내고 가실 겁니까?”

 

황보청의 질문에 북궁천은 마차에서 시선을 떼고 되물었다. 마차 안의 여인이 창문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남양까지 얼마나 걸리지?”

 

“빨리 달려도 이틀은 가야 합니다.”

 

“중간에 쉴 만한 곳이 있나?”

 

“아마 노숙을 해야 할 겁니다. 차라리 여기서 자고 아침 일찍 출발하지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세.”

 

 

 

여인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순간적으로 지나쳐서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커다란 덩치 뒤에 서 있던 사람은 상당히 키가 컸다.

 

당당한 체구는 아니어도 그 사람만큼이나 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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