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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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25화
25화
그자들. 죽립인들이 싸우고 있다는 말.
이정한과 초강은 물론이고 북궁천도 창밖을 바라보았다.
동호량의 말대로 죽립인들이 선착장에서 싸우고 있었다.
상대는 칠팔 명 정도. 형세는 비등했는데, 죽립인을 공격한 자들 중 하나가 아직 싸움에 끼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저자들 때문에 표정이 굳어 있었나?’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알 수가 없으니 도와주기도 어정쩡했다.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고.
바로 그때, 지켜보고 있던 자가 죽립인들 중 중년인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그가 끼어들자 형세가 급전으로 치달았다.
죽립인들 중 하나가 피를 뿌리며 쓰러지자, 중년인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몸을 뒤로 뺐다. 동시에 그의 남은 일행 둘도 뒤로 물러나서 강가를 따라 달렸다.
“흥! 삼절수사, 빠져나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나중에 끼어든 자가 소리치며 죽립인들의 뒤를 쫓았다.
그들이 쫓고 쫓기며 사라지자 초강이 말했다.
“대형, 아무래도 죽립을 쓴 자들은 백검맹 사람들 같습니다.”
백검맹(百劍盟)은 허창 인근에 본산을 둔 세력으로 중소문파들의 결집체였다.
무림맹이 유명무실해진 지 이십 년이 넘은 지금, 그들은 똘똘 뭉쳐서 천무회(天武會), 삼성궁(三星宮)과 함께 하남 무림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초강이 그들을 백검맹의 사람으로 추정한 것은 ‘삼절수사’라는 별호 때문이었다. 삼절수사(三絶修士) 조관수가 백검맹의 장로인 것이다.
그의 말에 이정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검맹의 장로를 공격하다니. 그들이 누군지 모르겠군요.”
“혹시 천무회나 삼성궁의 사람들이 아닐까요?”
동호량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어쩌면 당연한 생각일지 몰랐다. 하남에서 백검맹을 저렇게 몰아붙일 수 있는 곳은 그들 외에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하지만 북궁천은 그들이 듣지 못한 것을 들은 터였다. 치열하게 싸우던 중 조관수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사교 놈들이냐?”
나직한 데다 싸우는 소리에 묻혔지만 그가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천사교라는 곳이 어떤 곳인 줄 아는가?”
이정한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천사교요? 천사교는 이십여 년 전에 중원을 뒤집어 놓고 사라진 사교입니다. 무림맹이 유명무실해진 것도 그들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조관수가 상대에게 그렇게 물은 것 같았네. 그런데 대답을 하지 않아서 확실한 것은 모르겠군.”
“에이, 설마요. 이십 년 전에 사라진 그자들이 나타났으면 벌써 강호가 뒤집어졌을 겁니다.”
상대가 누구든 이미 사라진 상태다. 그들이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그들과 엮여 봐야 헌원려려를 찾는 일만 늦어질 터.
북궁천은 더 상관하지 않고 찻잔을 잡았다.
“끼어들어 봐야 좋을 것이 없겠군.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세.”
이정한 등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십여 일 동안 간이 몇 번은 떨어졌다 붙은 그들이었다. 이번에도 나섰다가 저들의 싸움에 휘말리면 살아서 황하를 다시 넘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 * *
다음 날 아침.
북궁천 일행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객잔을 나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미시 무렵, 낙수를 건너간 그들은 공현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동남쪽으로 뻗은 산 사이의 관도를 통해 정주로 향했다.
그런데 그들이 산길을 따라 이십 리쯤 갔을 때였다. 야트막한 고갯길을 넘어가는데 좌측의 울창한 숲 속에서 누군가가 구르듯이 튀어나왔다.
북궁천 일행은 모두 그를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전날 배에서 이정한을 비웃었던 던 자였다.
온몸이 피로 물든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며 다가오면서 사정하듯이 말했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게.”
이정한은 전날의 상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까칠하게 말했다.
“삼류 문파의 제자를 왜 부르는 거요?”
“적을 겨우 따돌리긴 했는데 장로께서 부상이 심하네. 좀 도와주게.”
전날 일만 생각하면 못 들은 척 등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피로 물든 상대를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대형,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북궁천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와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어제는 멀쩡한 몸이었고, 오늘은 중상을 입은 채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강호의 대협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나? 중상을 입은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돕겠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대답이다. 대협이 되기 위해 안달 난 대형이 아닌가.
“아무래도 그러겠죠.”
이정한은 북궁천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의아함을 떨칠 수 없었다.
대형은 왜 저리 대협이라는 말에 집착하는 걸까?
“고, 고맙네. 어제는 정말 미안했네.”
장한이 감격한 어조로 답하며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북궁천은 흐뭇한 표정으로 옆을 보며 말했다.
“누가 저 사람을 업어야 할 것 같은데…….”
이정한과 동호량은 슬쩍 초강을 바라보았다.
초강의 등에 업힌 장한은 손짓으로 길을 안내했다.
어제의 그 중년인, 조관수는 길에서 삼십여 장 떨어진 곳의 동굴 속에 있었다. 그는 죽은 듯이 누워 있었는데, 가슴의 기복만 아니면 정말 죽은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북궁천은 조관수의 맥문을 잡고서 상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곧 조관수의 엉망이 된 기의 흐름을 바로잡기 위해서 공력을 주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관수의 몸에서 뿌연 김이 피어올랐다.
동굴 벽에 기대고 있던 장한은 북궁천이 상승의 내가요상법을 펼치는 걸 보고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요상법을 펼치려면 막대한 공력이 필요했다.
자신은 흉내도 낼 수 없는 수법을 펼치는 자에게 삼류 문파의 제자라고 비웃다니.
쥐구멍이 있으면 기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북궁천은 일각가량 조관수의 몸을 다스린 후 공력을 회수했다.
조관수를 치료하면서 자신의 공력이 팔성가량 돌아왔다는 걸 확인한 그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한두 달만 더 지나면 십성 공력을 모두 회복할 수 있을 것 같군.’
그뿐 아니라 과거보다 공력이 더 늘어나 있다는 점이 그를 더욱 기분 좋게 했다.
‘육대기가 넘겨 준 상자에 든 것이 영약은 영약이었던 모양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짧은 시간에 자신의 예전 능력을 되찾고 공력마저 늘 수 없었다.
“일단 뒤틀린 기혈을 바로 잡고 내장을 안정시켰소. 큰 충격을 받지만 않는다면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요.”
북궁천이 고개를 돌리며 말하자 장한은 그 자리에서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절검문의 포영이라 합니다. 제가 어리석어서 태산이 앞에 있었는데도 몰라봤습니다, 공자. 용서해 주십시오!”
북궁천은 가볍게 손을 저어서 그의 몸을 일으켰다.
“당신까지 부상이 더 심해지면 괜히 나만 힘들어지니 조심하시오.”
포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자.”
“정한, 약 있지? 이 양반 상처 좀 봐 주게.”
북궁천에게 머리를 숙이는 걸 보고 이정한도 그에 대한 마음이 어느 정도 풀어졌다.
“옷 벗어 보쇼. 약 좀 뿌리게.”
조관수가 정신을 차린 것은 이각가량이 지난 후였다. 그는 포영에게 간단히 설명을 듣고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고 북궁천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구해 줘서 고맙네. 나는 백검맹의 조관수라 하네. 이름을 알려 주면 나중에 은혜를 갚겠네.”
“단화린이라 합니다. 길 가다가 다친 사람을 보면 도와주는 게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저 할 일을 한 것뿐이니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북궁천은 제법 대협답게 말하며 조용히 웃었다.
조관수는 감탄한 표정으로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을 잃어 가슴이 아팠는데, 단 소협과 같은 의협지사를 만나 위안이 되는군.”
“별말씀을.”
북궁천은 담담히 답하면서도 흐뭇했다.
조관수의 칭찬을 들으니 자신이 대협의 길에 한 발짝 다가선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 말을 려려가 들어야 하는데…….’
북궁천은 곁에 헌원려려가 없음을 아쉬워하며 조관수에게 물었다.
“어쩌다 그자들의 공격을 받은 겁니까?”
조관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사정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맹주의 명으로 철군성에 다녀오던 길이네. 그자들은 내가 순순히 맹에 도착하는 걸 원치 않는 거지.”
철군성이란 말에 북궁천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며칠 사이 철군성과 연관된 일에 연이어 엮이는 걸 보면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공손무극이 고민하고 있다는 일과 관련된 건가? 좌우간 꼬마의 집안과 관련된 일이라면 도와주길 잘했군.’
사정이야 어쨌든 동생으로 삼았으니 자신과 아주 무관한 일도 아니다. 게다가 나중에 만나면 생색낼 수도 있을 것이고.
북궁천이 내심 만족해하며 다시 물었다.
“공격한 자들이 천사교 사람들입니까?”
순간 조관수의 눈이 느닷없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커졌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싸울 때 장로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교는 이십여 년 전에 사라졌다 들었는데, 왜 그자들이 나타나서 공격한 겁니까?”
이정한 등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귀를 기울였다.
어제만 해도 설마 했거늘, 정말 천사교가 나타났단 말인가?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아니니 그에 대해선 뭐라 말하기가 그렇군. 사정을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고 싶지만, 그에 대한 것은 내 권한 밖이니 이해해 주게.”
조관수는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말하며 북궁천의 질문이 이어지는 것을 막았다.
북궁천도 깊게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더 묻지 않았다.
“사정이 있으면 그럴 수도 있지요.”
자신이 본명을 밝히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데 이번에는 조관수가 물었다.
“단 소협은 어디로 가는 길인가?”
“정주에 가는 길입니다.”
“부탁 할 게 하나 있네만…….”
갈 길이 바쁜 북궁천은 두 세력의 다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작정 거부할 수도 없어서 일단 조관수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말씀해 보시지요. 들어 본 다음에 판단하겠습니다.”
“나와 포영을 정주까지만 데려다 주게. 그곳까지만 가면 놈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네.”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은 부탁이다. 어차피 정주로 가던 길이니까.
북궁천은 담담히 웃으며 조관수의 부탁을 승낙했다.
“어차피 부상이 심한 분을 그냥 놔두고 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하, 하, 하.”
그는 웃으면서 의협심이 투철한 의동생들을 바라보았다.
“아우들이 수고 좀 해야 할 것 같군.”
이정한은 동호량과 초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상자가 셋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초강이 조관수를 업고, 동호량이 포양을 업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 이정한은 두 사람의 무기를 자신이 챙겼다.
“대형, 출발…….”
“잠깐.”
북궁천이 손을 들어 이정한을 입을 막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밖을 바라보았다.
다섯을 셀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쏴아아아아.
폭풍이 불어오듯 바닥의 나뭇잎이 날리면서 강렬한 기세가 밀려들었다.
그리고 곧 산속에 울려 퍼지는 나직한 웃음소리.
“후후후. 조관수, 거기 숨어 있었군.”
공명처럼 울리는 음습한 목소리가 끝날 즈음, 동굴 입구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짙은 감색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내려섰다.
뒤이어 여덟 명의 무사가 그의 좌우로 내려서서 동굴 입구를 포위했다.
어제 조관수 일행을 공격했던 자들과 같은 복장을 한 자들이었다.
북궁천은 그들을 향해서 걸음을 옮기며 검병을 만지작거렸다.
“모두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말고 입구만 지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