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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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2화
12화
“나요?”
흠칫한 이정한은 거부하려고 했다. 그런데 동호량이 절룩거리면서 재빨리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아닌가.
‘저 자식이!’
게다가 초강과 강소하도 눈빛을 반짝이며 이정한을 바라보았다.
사제들이 기대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물러서면 대사형의 체면이 뭐가 되랴.
‘그래, 오늘 이 대사형의 진면목을 보여 주마!’
이정한은 들고 있던 목검을 불끈 쥐고 턱을 쳐들었다.
“좋소. 그럼 한번 해봅시다.”
일각 후. 바닥에 드러누운 이정한은 떠가는 구름을 멍하니 쳐다보며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미, 단화린 말대로 그때 그렇게 변화시켰으면 훨씬 나았는데, 왜 지금까지 몰랐지?’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나중에 펼친 태극일화(太極一化)도 원을 좀 더 작게 그렸어야 돼. 초식의 연결도 틀에 박힌 대로만 할 것이 아니라…….’
강소하는 넋 나간 것처럼 보이는 이정한이 염려되어서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대사형, 괜찮아요?”
동호량과 초강이 그녀를 말렸다.
“사매, 그냥 놔둬.”
“건들지 마라, 소하.”
“사형, 왜……?”
강소하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돌아다보았다.
두 사람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강소하는 눈치 빠르게 뭔가를 깨닫고 큰 눈을 깜박였다.
“혹시 두 분 사형도……?”
동호량과 초강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첫날 이후, 이정한을 비롯한 태극문의 제자들은 질 줄 뻔히 알면서도 북궁천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열기에 찬 눈빛을 번뜩이며 비무에 임했다.
그리고 비무가 끝나면 숨이 턱까지 닿은 상태에서도 생각에 골몰했다.
북궁천은 그러한 모습을 보고 새로운 재미에 흠뻑 빠졌다.
남에게 배우기만 하던 시절이 지난 후부터는 북천궁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싸우는 게 일상이었다.
사오 년 동안 백 회 이상 싸웠고, 그중 경천동지의 격전을 벌인 것만 해도 이삼십 회는 되었다.
북천마제는 그렇게 생사를 넘나드는 혈전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뿐,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비록 며칠이지만 태극문의 제자들을 가르치다 보니 재미가 있었다.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어서 기뻐하는 걸 보면 그 나름대로 즐거운 것이다.
그렇게 닷새가 흐르자, 북궁천은 자신에게 즐거움을 준 네 사람을 위해서 수련의 강도를 높이기로 했다.
힘은 들겠지만 견뎌 내면 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태극문을 일으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이제부터는 공력을 끌어 올리고 공격해 보시오. 나 역시 그에 맞는 힘을 쓰도록 하겠소.”
네 사람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들이 이길 것 같진 않고, 그렇다면 공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 위험하다는 말과 같았다.
설령 위험하지 않다 해도 그만큼 힘들 것은 뻔했다.
하지만 이정한은 곧, 에라 나도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게 하죠, 뭐.”
그런데 동호량이 한술 더 떴다.
“검도 진검으로 사용하면 어떻겠수?”
이판사판이었다.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어?
* * *
진자방은 제자들이 매일 북궁천에게 패하는 걸 보고 속이 무척 상했다.
괜히 단화린을 수련에 동참하게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놈이 저렇게 강한 줄 누가 알았나?’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은, 제자들이 별 불평불만을 하지 않고 계속 단화린에게 달려든다는 것이었다.
초강이야 그렇다 치고 이정한과 동호량은 조금 삐딱한 성격인데도 말이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그는 이정한을 불러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정한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부님, 그게 말이죠, 단 형이 저희 태극문 무공의 약점을 교정해 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질 줄 뻔히 알면서도 계속 달려드는 겁니다.”
진자방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그게 정말이냐?”
“처음에는 초강의 말을 듣고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며칠 해 보니까 초강의 말이 맞지 뭡니까.”
“그런데 왜 나에게 말을 안 한 거지?”
“단 형도 정확한 말을 해 주지 않아서, 확실하게 어떤 결과가 나오면 말씀드리려고 했죠. 그전에 말하면 괜히 사부님의 심기만 불편해질지도 모르고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진자방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제자들의 패배가 가슴 아픈 것은 분명하지만, 그보다는 태극문의 재건이 우선이었다.
더구나 강해지면 강호에 나가서 그만큼 안전해진다는 뜻.
그렇다면 북궁천이 조금 더 심하게 다루어도 상관없었다.
힘들면 힘든 만큼 더 강해질 테니까. 그동안은 그저 제자들이 잘 견뎌 주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역시 보통 젊은이가 아니야. 몇 달 전에 꿈에서 용 한 마리가 날아들더니, 역시 길몽이었나?’
당시는 개꿈인 줄 알았다.
꿈에 나타난 용이 어디서 쥐어터지고 왔는지, 뿔도 하나 부러지고 비늘도 여기저기 빠져서 워낙 볼품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볼품이 없어도 용은 용인 모양이었다.
‘드디어 태극문에도 햇살이 비치는구나.’
북궁천은 진자방이 바라는 대로 태극문의 제자들을 심하게 다뤘다.
비무를 하면서 진검을 쓰지는 않았지만, 진검을 쓴 것같이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강하게 몰아붙였다.
아마 그가 마지막에 힘을 적절히 조절하지 않았다면 태극문의 네 제자는 며칠씩 앓아누웠을 것이 분명했다.
이정한 등은 조금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북궁천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도 모르지 않았다. 그 안에 하나라도 더 배워야 했다.
배우면 배우는 만큼 험한 강호에서 더 오래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시간이 계곡물 흐르듯 빠르게 흘렀다.
태극문 제자들은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흐르는 것 같아 아쉬웠다.
하지만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아쉬움이 클수록 시간이 빨리 가더니 순식간에 떠날 날이 다가왔다.
* * *
떠나기 전날 밤.
대주천을 마친 북궁천은 만족한 표정으로 기운을 단전에 갈무리했다.
‘이제 칠성은 회복된 것 같군.’
정체불명의 알에서 얻은 열양진기 덕분인지 같은 칠성 공력이라 해도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라면 강호에 나가도 큰 어려움은 없을 듯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그는 방을 나섰다.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날.
앞마당 끝의 절벽까지 다가간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빛을 가슴에 안았다.
중천에 뜬 보름달이 유난히 크고 밝았다. 헌원려려를 처음 본 그날처럼.
‘벌써 이 년이 지났구나, 려려.’
그랬다. 오늘이 바로 그의 생일이었다.
이 년 전과 달리 축하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생일.
하지만 그는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자신은 세상에 나와 있었다.
북천궁에 있을 때보다는 헌원려려가 있는 곳과 훨씬 가까웠다.
그리고 이제 날이 밝으면 헌원려려를 찾기 위해 이곳을 떠날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려려. 내가 곧 찾아갈 테니까.’
덜컹.
뒤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자방의 방이었다.
“험, 달이 참 밝구먼.”
방에서 나온 진자방은 휘휘 하늘을 둘러보며 건성으로 한마디 던졌다.
그러고는 북궁천 옆으로 다가가서 나란히 섰다.
북궁천이 말없이 바라만 보자, 그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뭔가를 간절히 원해본 적이 있는가?”
북궁천도 보름달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있습니다.”
지금도 원하고 있고.
“나도 그랬지. 전쟁이 벌어졌다는 말에 집으로 달려가면서 마누라와 아이들이 살아 있기를 부처님께 간절히 빌었지. 그런데 집에 도착해 보니 처참한 시신으로 변해 있더군. 아마 고통스럽게 죽어 가면서 나를 많이 원망했을 거야.”
“힘든 시간이었겠군요.”
“반쯤 미쳐서 복수를 하기 위해 전쟁터에 뛰어들었지. 그때…….”
제자가 된 아이들을 만났다.
집이 불에 타고 부모가 처참하게 죽어 있는 곳에서 아이들이 넋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구했다네. 솔직히 말하면 그때 그런 용기가 어떻게 났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정신없이 싸우면서 애들을 피신시켰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전쟁터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나 몰라라 할 수가 없더군. 그래서 곧바로 그곳을 떠나 이곳으로 들어왔네. 그런데 벌써 십오 년이나 흘렀다니, 정말 세월은 빨라.”
전에 어렴풋이 듣긴 했지만 그렇게 절박한 상황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 한 터였다.
북궁천은 진자방과 그의 제자들이 일반적인 사제 간보다 더 끈끈한 정으로 얽힌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제자들이 자식 같겠군요.”
“맞아. 자식이나 같지.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하늘이 내 바람을 완전히 외면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네. 마누라와 자식을 데려간 대신 새 자식을 넷이나 줬으니 말이야.”
담담히 미소를 지은 진자방은 고개를 돌려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단 공자, 내 비록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그런 나도 자네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네. 오래 살다 보니 눈치만 늘었지 뭔가? 내 자네에게 주제넘은 말 한마디 해도 되겠나?”
“하십시오.”
“가끔 하늘은 사람을 놀릴 때가 있네. 줘야 할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주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줄 때가 있거든. 그때는 하늘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되지. 노력한 것이 덧없다는 생각만 들고. 하지만 하늘의 불공평을 탓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노력하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네. 최소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간절히 바라며 노력할 때, 보다 많은 기회가 주어지거든.”
그동안 말없이 지켜보더니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간절함을 엿본 듯했다.
산속 생활 십오 년에 반쯤 도사가 된 모양이다.
북궁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노력해 볼 생각입니다. 말씀 고마웠습니다.”
“허허허, 좋게 받아 주니 나도 마음이 편하군. 떠나는 마당이니 한잔하겠나? 숨겨 놓은 술이 조금 있는데, 아주 잘 익었거든.”
“죄송합니다. 저는 당분간 술을 안 마시기로 했습니다.”
“술을 마시자는 게 아니네.”
“그럼?”
“곡차를 마시자는 거지.”
눈을 찡긋한 진자방이 뒤를 향해 소리쳤다.
“정한아! 가서 곡차 좀 내오너라!”
* * *
마침내 햇살이 동천에서 폭죽처럼 솟아오르는 아침이 찾아왔다.
마지막 아침 식사는 아쉬움과 설렘 속에서 조용히 끝났다.
진자방조차 말 한마디 없더니 식사를 마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전에 말했다시피 태원까지 우리 아이들과 함께 가도록 하게. 장 의원도 꼭 만나보고.”
“알겠습니다.”
“나는 자네를 남으로 생각하지 않네. 자넨 우리 태극문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야.”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허허허, 정말 겸손하고 예의 바른 젊은이라니까.”
북궁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사대원로가 진자방의 말을 들었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잠시 후. 자신의 방으로 간 북궁천은 검을 옆구리에 차고 밖으로 나갔다.
이정한과 동호량, 초강이 먼저 나와 있고, 때맞춰서 진자방이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진자방은 눈빛이 달라진 제자들을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적당히 벌면 돌아오도록 해라.”
사부의 자상한(?) 작별 인사에 이정한이 대표로서 대답했다.
“예, 사부님. 사부님도 건강 조심하십시오.”
“소하가 있는데, 뭐. 아무 걱정 마라.”
그랬다. 이번에는 이정한 대신 강소하가 남기로 했다.
세 사람이 일을 나가면 한 사람이 사부 곁에 남아서 쉬는 게 원칙이었다.
원래 이번에는 동호량이 남아야 할 순서였다. 그런데 동호량이 일을 나가겠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대신 강소하에게 쉬라고 했다.
물론 강소하를 위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단화린과 강소하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다. 그가 이곳에 남고 강소하가 따라가면, 그는 아마 속이 타서 죽을지도 몰랐다.
단화린에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강소하는 강소하인 것이다.
“동 사형, 이번에는 말썽 부리지 말고 잘 다녀와요.”
강소하가 동호량을 타박하며 말했다.
그래도 동호량은 그녀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전에 한번 고수를 잘못 건드렸다가 혼난 적이 있는데, 아직도 그 일을 잊지 않았나 보다.
“걱정 마. 그런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
“피이, 말은 청산유수라니까.”
강소하는 동호량을 흘겨보고는 북궁천을 향해 방긋 웃었다.
“단 공자, 나중에 꼭 찾아오셔야 해요?”
북궁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태극문 사람들은 처음 만나 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자신에게 정이란 게 뭔지 알게 해 준 사람들.
덕분에 헌원려려를 만난다 해도 전과는 다르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좋은 경험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