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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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4화
4화
* * *
요화는 서신을 들고 날듯이 달려서 사대원로를 찾아갔다.
서신을 보고 놀란 사대원로는 북천사룡을 급히 불러들였다.
“인근 백리 안을 샅샅이 뒤져 봐! 개미새끼라 해도 혹시 궁주님 닮았나 잘 살펴보고!”
북천궁 반경 백리 안이 뒤집혔다.
그러나 궁주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사대원로는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했다.
궁주의 부재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일 년간의 무단 외출.
그 사실이 알려지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세력들이 야심을 드러낼지 터.
원로들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떠난 북궁천을 원망하며 하얗게 센 머리를 밤새도록 쥐어뜯었다.
하룻밤 사이에 주름이 배로 늘어난 기분이었다.
짜증이 난 악사종은 천수마종을 다그쳤다.
“그러게 왜 떠나라고 한 건가! 엉!”
“…….”
갈태경도 넌지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
“이 기회에 말을 갈아타는 것은 어떤가?”
그랬다가 세 원로의 잘 벼린 칼날 같은 눈빛에 난도질당할 뻔했다.
“좀 그럴 듯한 방안을 생각해보게! 머리 좀 굴려봐! 자네들은 머리를 멋으로 달고 다니나!”
음령노조가 버럭버럭 소리쳤다.
세 원로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속으로 투덜댔다.
‘지 대가리는 왜 안 굴려?’
‘제길, 삼십 년 전에 깨진 후로는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데 어쩌란 말이야.’
‘잘하면 뒤집어엎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입이 마르고 눈이 버석해지도록 대책을 논의한 사대원로는 날이 샐 무렵에서야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태양이 떠오를 무렵.
음령노조는 간부들을 모두 모아 놓고서, 짐짓 기쁨에 찬 표정을 지으며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기뻐하라! 궁주께서 그간의 나태했던 생활을 청산하고자 술을 끊고 폐관에 들어가셨다! 궁도들은 궁주께서 나오실 때까지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라!”
오오오! 드디어 북천마제께서 정신을 차리셨도다!
북천궁 무사들은 모두가 진정으로 기뻐하며 환호했다.
원로들은 시커멓게 타 버린 가슴으로 이를 갈았지만.
‘술 안 끊고 돌아오기만 해 봐라!’
2장. 일탈
왜 이리 마음이 편하지?
가을바람이 심장을 훑으며 관통하는 것처럼 시원하다.
“진작 나올걸 그랬어.”
북궁천은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쏟아질 것 같은 쪽빛 하늘을 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북천의 주인 자리를 박차고 떠나온 지 만 하루. 황량한 들판을 지나고, 강을 건너고, 바위산을 넘어서 적어도 오백 리를 달렸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짙푸른 초목이 가득한 이름 모를 산중. 앞에는 거산준봉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대원로의 추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지금쯤 난리가 났겠군. 나를 원망할 것도 없지. 떠나라고 한 사람들은 그 노인네들이니까.’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하하하하하하!”
온 세상이 자신의 것 같았다. 북천의 주인 자리도 하찮게 느껴졌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거산준봉을 보며 소리쳤다.
“려려! 기다려라! 내가 너를 찾아갈 것이다!”
일만 척 거봉들이 그의 외침에 대꾸했다.
메아리치며 되돌아온 소리가 마치 기다리겠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상한 소리마저 들려서 북궁천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어떤…… 미친…… 새끼가…… 짖어 대는…… 거냐!”
카랑카랑한 목소리.
자신이 외친 소리가 메아리쳐서 들려온 것은 분명 아니었다.
‘누구지?’
전이었다면 저런 욕을 듣고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이었다. 마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그는 지금의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조용히 쉬는데 내가 소리를 질러서 기분이 상한 모양이군. 그 정도는 용서해야지.’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를 생각해 낸 그는 날듯이 걸음을 옮겨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욕 좀 들었다고 싸우기에는 너무나 기분 좋은 날이었다.
그 시각.
만수종(萬獸宗) 육대기는 불같이 화를 내며 산속을 달렸다.
어떤 미친놈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지난 백 일 동안 노리던 영물, 화령금각사(花翎金角蛇)가 내단을 토해 내다 놀라서 도망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내려가서 그놈을 잡아 주둥이를 찢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미친놈을 혼내는 것보다 화령금각사를 잡는 게 더 중요했다.
자신이 영물을 노리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강호의 고수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잡아서 도망쳐야 했다.
‘놓치기만 해 봐라. 어떤 놈인지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고 말겠다.’
* * *
북궁천은 궁을 나선 후에야 새삼 자신이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이 스물이 되기 전까지 패왕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수련에 열중했고, 궁주가 된 후로는 지배 권역을 넓히기 위해 성난 호랑이처럼 날뛰었다.
궁의 대소사야 사대원로와 군사인 가릉효가 모두 알아서 처리했으니 그는 보고만 받으면 되었다.
그리고 헌원려려를 만난 후의 이 년이란 기간은 멈춰 버린 시간이었다.
듣기로는 헌원려려가 태원에서도 더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했는데, 그에게 그곳은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아니, 태원은커녕 헌원려려의 고향인 응원의 검원장도 물어 물어서 찾아가야 했다.
하지만 아는 것은 없어도 마음은 마냥 즐거웠다. 북천을 휘저을 때보다도 더 가슴이 뛰고 기대되었다.
‘여긴가?’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시각. 북궁천은 뒷짐을 진 채 커다란 장원을 바라보았다.
외진 곳에 있는 장원치고는 제법 커서, 길게 뻗은 담장이 삼십 장은 되었다.
하지만 장원은 피폐해진 자신의 몸만큼이나 황폐했다.
안에는 일고여덟 채의 건물이 들어차 있었는데,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듯 지붕 위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정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문 앞에는 풀이 자라 있고, 문과 기둥, 처마는 칠이 벗겨지고 먼지가 쌓여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폭이 일 장이 넘는 커다란 문은 꽉 닫혀 있어서 한참을 보고 있는데도 오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 정도인 줄은 몰랐군.”
북궁천은 정문에 걸린 색 바랜 현판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검원장(劍原莊)
일반적으로 ‘헌원가(軒轅家)’라 불리는 곳이기도 했다. 헌원려려의 고향집.
북궁천은 그녀가 이곳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찾아왔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냥 한번 그녀가 살던 집을 보고 싶었을 뿐.
‘굳이 떠날 것까진 없었는데…….’
그날 밤의 일 때문에 아예 자신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난 듯했다.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한편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면, 사대원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북천궁으로 끌고 왔을 테니까.
‘미안하다, 려려…….’
씁쓸한 마음으로 고개를 저은 그는 정문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탕탕탕.
한참이 지나도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두어 번 더 문을 두드린 후 누군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반 각이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문으로 다가와 늙수그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뉘시오?”
북궁천은 목을 가다듬고 나름대로 정중하게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소. 문을 열어 주시오.”
“죄송하지만 본 장은 사람을 받지 않소. 딱히 대답해 줄 것도 없고 말이오.”
“귀장의 주인인 헌원려려에 대해서 물어보려는 거요.”
“주인님에 대해선 더더욱 모르오. 어느 날 갑자기 떠나셔서 이 늙은이도 아는 것이 없소.”
북궁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어느 날 갑자기 떠났다는 말을 듣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면 그녀나 나나 비슷한 면이 있군.’
그는 자신과 그녀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어디로 갔는지 모르시오?”
“알면 말씀드리지 왜 안 드리겠소?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물었지만 대답은 항상 같았소. 당장 죽인다 해도 모르는 것을 알려 줄 수는 없는 일 아니오?”
그 말 역시 믿었다. 사대원로가 사람을 보내서 오죽 닦달했을까?
그 노인네들이 극성을 부렸을 텐데도 밝혀내지 못했다면 거짓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북궁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비록 그녀가 간 곳을 알아내진 못했지만, 그녀의 집에 와 봤다는 것만으로도 그간의 아쉬움이 많이 덜어졌다.
‘려려, 나중에 올 때는 너와 함께 왔으면 좋겠구나.’
고개를 돌려 헌원가를 돌아다본 그는 미련을 남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서 남에게 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우리 내기할까? 내가 려려를 찾을 수 있는지, 없는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또다시 말했다.
“만약 내가 려려를 찾아내지 못하면, 단숙에게 자유를 주지. 하지만 찾아내면, 단숙은 내 곁을 떠날 수 없어. 려려를 지켜 줘야 되니까.”
역시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서 십여 장 떨어진 숲 속의 허공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 * *
북천궁을 떠나온 지 사흘째.
북궁천은 한가로운 걸음으로 계곡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배가 조금 고프긴 하지만 주위 풍경이 워낙 아름다워서 참고 걸을 만했다.
‘괜찮은 곳이 있으면 이곳에서 하룻밤 지내고 가야겠군. 토끼라도 잡아서 배도 좀 채우고.’
그렇게 구름 위를 걷듯이 걸어가던 북궁천이 호수를 본 것은, 태양이 서산으로 곤두박질치며 붉게 타오를 때였다.
호수는 주위의 멋진 산세와 어우러져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호수의 아름다움에 취한 그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그곳에서 노숙을 하기로 결정했다.
암벽과 소나무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산을 베개 삼고, 별빛이 찬란한 하늘을 이불삼아 덮고 누워 있으면 선녀가 내려오는 걸 볼 수 있을 듯했다.
‘신선보단 선녀가 낫겠지? 그 전에 배를 채우는 게 먼저지만.’
신선이고 선녀고 배가 부른 다음의 이야기다.
‘돈을 좀 갖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끼니마다 짐승을 잡을 것도 없이 음식을 사 가지고 다니면 될 것이 아닌가.
그가 아쉬움을 달래며 호수를 향해 다가갈 때였다.
쏴아아아아.
바람이 솔잎을 쓸고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기이한 기운이 빠르게 밀려들었다.
북궁천은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좁혔다.
‘누구지?’
자신을 찾아 나선 북천궁 사람들인가?
그건 아닌 듯했다.
밀려드는 기운에서 살기가 느껴진다. 북천궁 사람 중에는 자신 앞에서 살기를 드러낼 만큼 간덩이가 부은 사람이 없다.
‘그럼 어떤 자들이……?’
그가 생각에 골몰한 사이, 살기 어린 기운이 근처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곧 호숫가에 세 사람이 날아들었다.
북궁천은 생각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선녀 대신 나타난 자들은 모두 사십 대의 중년인들이었다.
무기를 든 그들은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살기를 뿜어내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큰 키에 빼빼 마른 자는 검을 들었고, 키는 조금 작아도 체구가 탄탄해 보이는 갈의인은 도를 들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흐트러진 머리에 청의도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는데, 보아하니 검과 도를 든 두 사람이 그를 노리는 듯했다.
북궁천은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신경 쓸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강력한 기운을 지닌 자들이었다.
한 자리에 고수가 셋이나 나타나다니. 그것도 이렇게 외진 산속에.
북궁천은 나서지 않고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또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밀려드는 기운.
그 기운 중에는 북궁천을 긴장시킬 만큼 가공할 힘이 내포된 것도 있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런 고수들이 모여드는 걸까?
그는 호숫가를 보며 망설였다.
흥미 있는 구경거리임에는 분명했다. 마냥 즐거워하기에는 몰려드는 자들이 너무 강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지금의 그는 이 년 전의 북천마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북궁천이 그냥 돌아설 순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