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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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0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37화
237화
공손선우가 나오자 세 명의 호위무사가 건물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바람을 쐬려는 것이니 걱정 마라.”
공손선우는 슬쩍 손을 저으며 별원의 정원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풍천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식, 그렇게 빨리 가고 싶은가? 뭐 원한다면 소원을 들어주지.’
그는 앞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검을 등 뒤로 매고 장포를 옆으로 비스듬히 잡아맸다.
초웅이 봐도 눈을 껌벅일 정도로 모습을 바꾼 그는 환신술을 펼쳐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공손선우는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정원을 지나 후원으로 갔다.
그런데 후원으로 깊숙이 들어갔을 때 저 앞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투덜대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고, 뭔가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누가 감히 자신의 사색을 방해한단 말인가?
공손선우는 기분이 상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소리 나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누군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지 못했거늘.
‘응? 어떻게 된 거지?’
그때 저 앞쪽에서 또 목소리가 들렸다.
“공손선우, 그 더러운 자식이…….”
자신을 욕하는 소리.
‘어떤 놈이 감히!’
확 열이 솟구친 공손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그가 다가가는 중에도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아주 나쁜 놈이라니까. 지 아버지 힘만 믿고……. 아주 비겁한 자식인데……. 오죽하면 수하나 괴롭히고…….”
저만치 담장이 보였다. 목소리는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죽일 놈!’
공손선우는 앞뒤 가리지 않고 담장을 넘었다.
마침내 목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나무 앞에 선 놈은 뒤돌아선 채 나무 뒤쪽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는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서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미끄러지듯이 다가갔다.
순식간에 거리가 삼 장으로 줄어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제야 말을 멈추고 돌아섰다. 모습이 조금 전과 확연하게 바뀐 풍천이었다.
“왔어?”
“네놈은 누군데…….”
분노의 눈길로 풍천을 노려보던 공손선우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풍천은 다시 한번 그의 자존심을 확실하게 긁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당신 나쁜 놈이잖아. 비겁한 놈인 것도 맞고. 안 그래?”
“이 죽일 놈이……!”
공손선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날리며 두 손을 휘둘렀다.
“이크.”
풍천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공손선우는 물러서는 그를 따라가며 재차 공격했다. 하지만 풍천은 미꾸라지처럼 그의 공세를 빠져나가며 도망치듯이 뒤로 물러섰다.
“그자식, 성질 더럽게 급하네.”
“찢어 죽일 놈!”
몇 번 그러는 사이 담장과의 거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공손선우는 얼굴이 벌게져서 풍천을 계속 쫓아갔다. 그러잖아도 철목보의 패배로 자존심이 구겨져 있던 그는 풍천을 죽여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상대의 행동에 의심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살펴봐도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상대는 혼자라는 말.
설마 천외천의 대공자인 자신이 저딴 놈에게 당하랴!
게다가 여기서 멈추면, 저놈은 분명 자신에게 또 겁쟁이라고 욕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잡힐 듯 말듯 쫓고 쫓기다 보니 어느새 회령장에서 백여 장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그 사이 두 사람의 거리는 이 장으로 줄어든 상태. 이제 잡았다 생각한 공손선우는 득의의 살소를 흘리며 쌍장에 공력을 집중시켰다.
“후후후, 어디 더 도망가 봐라, 미꾸라지 같은 놈!”
그의 쌍장에서 은은한 홍광이 흘러나오며 혈룡처럼 꿈틀거렸다.
천외천 십대무공 중 하나인 용화신공이 펼쳐진 것이다.
풍천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천라신수를 펼치며 공손선우의 공세에 정면으로 마주쳤다.
우르르릉. 쩌저적!
어둠이 산산이 부서지며 공손선우의 몸이 뒤로 튕겨졌다.
풍천도 두 걸음 뒤로 물러나서 눈을 번뜩였다.
‘천외천의 십대무공 중 하나인가?’
그렇다면 단순한 천라신수로 상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쌍수에 벽라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단전에서 잠자고 있는 벽라의 인을 깨웠다.
고오오오.
벽라진기의 통로를 따라 벽라의 인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때 공손선우가 이를 갈면서 재차 공격해 왔다.
“죽여 버리겠다, 이놈!”
풍천은 푸르스름한 눈빛을 빛내며 공손선우의 공세 속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그의 쌍수에서 벽광이 칼날처럼 뻗어 나왔다.
벽라족의 한이 실린 벽라의 인이 마침내 그 모습을 정식으로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콰르릉!
벽력음과 함께 용화신공과 천라신수가 뒤엉켰다.
혈룡의 그림자가 벽라의 인에 갈가리 찢겨지며 어둠속으로 흩어졌다.
“크윽!”
공손선우는 진기가 토막 나는 충격에 신음을 토하며 뒤로 비틀비틀 물러났다.
풍천은 물러서는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가며 또다시 쌍수를 휘둘렀다.
은은한 벽광을 발하는 수십 개의 뇌전이 공손선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낯빛이 석고처럼 창백해진 공손선우는 안간힘을 다해서 용화신공을 끌어올리고, 최강의 방어초식인 용화벽(龍華壁)을 펼쳤다.
일순간, 푸른 뇌전이 공손선우가 펼친 용화벽을 연속적으로 두들겼다.
퍼버벅! 콰과광!
“커억!”
공손선우는 피를 뿜으며 뒤로 튕겨졌다. 그리고 서너 바퀴 구른 후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충격이 너무 심해서 두 다리가 후들거린 공손선우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이가 없었다.
용화신공이 팔성 경지에 머물러 있고, 검이 없어 실력을 전부 발휘하지 못했다지만, 자신이 이렇듯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대체 이놈은 누구란 말인가!’
그때 그의 귓속으로 한줄기 전음이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공손선우, 지옥에 가면 천응단과 유천삼위가 반겨줄 것이다.]
동시에 칼날 같은 벽광이 쭉 뻗어 나가더니 공손선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공손선우는 혼신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시퍼런 벽광은 눈이라도 달린 듯 방향을 틀어서 아랫배에 꽂혔다.
벽라의 인이 실린 천라신수에 탄유의 요결이 합쳐진 일수였다.
‘끄어억!’
입을 쩍 벌린 채 풍천을 바라보는 공손선우의 눈빛이 폭풍을 만난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이, 이제야 알겠……, 네, 네놈은 대…… 풍.”
“너 때문에 내가 무슨 고생을 했는지 알면 조금도 억울하지 않을 거다, 공손선우. 잘 가라.”
풍천은 나직이 말하며 왼손을 가슴 높이로 쳐들었다.
벽광을 번뜩이는 신월이 손바닥 가운데에서 솟구쳤다.
그걸 본 공손선우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천외천의 대공자로서 독선적인 정의감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는, 자존심을 버리고 목숨을 구걸하는 자를 경멸했다.
남자라면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무사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이 눈앞에 닥치자,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잠깐……. 사, 살려 줘, 대풍…….”
“자신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면서 왜 죄 없는 나는 악착같이 죽이려고 했지? 생각해봐, 정말 웃기는 일 아냐?”
공손선우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때 문득 대풍이 돈을 무척 좋아하더라는 교비은의 말이 떠올랐다.
“그 일은……, 내가 잘못……. 대풍, 나를 살려주면……, 돈을 주마. 네가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돈을…….”
솔직히 풍천도 그 말에는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공손선우 하나 죽인다고 돈이 돼, 아니면 누가 고맙다고 해? 아니지, 신마성 쪽에서는 고맙다고 하려나?
‘음, 그놈들 좋아하는 것도 싫은데, 엄청난 거금을 받고 살려줄까?’
하지만 동전 한 푼의 청부가 먼저였다. 고금제일의 해결사는 돈의 유혹에 흔들려서 신의를 저버리면 안 되는 법.
이유는 그거면 충분했다.
“아쉽군. 너보다 먼저 청부한 사람이 있거든.”
풍천이 거부한 순간, 공손선우는 잠깐 사이 모은 공력을 모조리 쏟아내서 튕기듯이 뒤로 날아갔다.
동시에 풍천의 손 위에 솟구쳤던 벽라의 인이 환하게 빛나는가 싶더니, 번개처럼 튀어 나갔다.
뽁!
기묘한 소음과 함께 신월처럼 휘어진 벽광이 공손선우의 뒤통수로 스며들었다.
퍽!
날아가던 그대로 나무둥치에 처박힌 공손선우는 흐릿해지는 눈으로 풍천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몇 번 움찔거리더니 그자리에서 축 늘어졌다.
풍천은 생명의 기운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공손선우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살다 보니까 말이야, 돈이 꼭 인생의 전부는 아니더라고.”
무심한 목소리로 한마디 충고를 남긴 그는 고개를 들어서 어둠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손무백, 다음에는 당신 차례야.’
단, 그를 죽이기 전에 알아봐야 할 것이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기에 부모님이 자결한 것일까?
제6장. 탈환(奪還)
1
공손선우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풍천이 거처로 돌아와서 식사를 마친 지 한 시진 후였다.
그의 죽음은 일순간에 회령장을 뒤집어놓았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것은 바로 알려지지 않았다.
수뇌부는 발표를 뒤로 미룬 채 일단 일급 경계령을 내리고, 모든 무사들에게 대기토록 지시했다.
그리고 각 세력의 수장들이 모여서 공손선우의 시신을 세밀히 살펴보았다.
“신월마존 좌궁화의 신월마수에 당한 상처처럼 보입니다.”
“좌궁화가 이곳까지 와서 대공자를 죽였단 말이오? 그걸 지금 믿으라 말씀하시는 거요?”
“무공의 흔적만 봐서는 그렇게 보인단 말이지요. 사실 그 정도 고수가 아니고서야 어찌 대공자를 살해할 수 있단 말이오?”
“전설의 암기인 혈목령(血牧玲)에 당해도 이렇게 신월모양의 상흔이 남는다고 들었소이다.”
이 사람 저 사람 많은 말이 나왔다. 하지만 확신에 찬 말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상흔이 단순하면서도 섬뜩할 정도로 깨끗했던 것이다.
탁능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철목보의 패배에 이어 이제 공손선우가 죽었다. 그것도 자신들의 세력권 내에서.
공손무백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는 굳이 짐작할 필요도 없었다. 자식의 죽음을 본 부모는 대부분 같은 반응을 보이니까.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실내에 모인 아홉 사람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내부 소행일 가능성은 어느 정도 된다고 보시오?”
사람들은 흠칫하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때 사공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의 흔적을 봐선 암습을 당한 것이 아니외다. 그렇다면 정면대결을 펼쳤단 말인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대공자를 능가할 수 있는 고수가 몇이나 되겠소이까?”
“아는 사람에게 급습을 당해서 부상을 입은 상태로 싸웠을 수도 있지 않소?”
“으음,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싸움이 벌어진 곳을 살펴본 바로는 그것도 아닌 것 같소이다.”
“무슨 말씀이시오?”
“대공자가 무공을 펼친 흔적이 오십여 장 이어져 있었소이다. 누군가를 쫓아가며 공격했다는 것이지요.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을 리가 없잖소이까?”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이유였다.
“하면 정말 신마성의 고수가 대공자를 살해했단 말이오?”
“쫓아가면서 공격한 걸로 봐서는, 누군가가 이곳에 숨어들려다가 대공자께 들켜서 도망친 것 같소이다. 그리고 그자가 대공자를 격전이 벌어진 곳까지 유인한 다음,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자와 협공해서 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만.”
지금으로서는 누구도 그 이상의 결과를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강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런 결론이 서로를 의심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탁능한도 그걸 모르지 않기에 마도연합의 고수가 공손선우를 살해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렇다면 적의 고수들 중 최소한 두 명 이상은 왔다고 봐야겠구려.”
“중요한 것은 놈들의 목적입니다. 만약 단순 정보를 얻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대공자를 살해하기 위해서 온 거라면, 그 목적이 본 천 무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데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무사들이 동요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탁능한은 사공화의 말을 수긍하며 실내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옳은 이야기요. 회주께서 오시기 전까지 각자 이끌고 있는 수하들에 대해서 철저히 단속해 주시오.”
다른 사람들도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아군을 의심하는 결론이 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내부의 사람이 공손선우를 죽였다는 결론은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만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상흔을 유심히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