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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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36화
236화
2
공손무백의 명령은 신검문과 경천산장에 있던 천외천의 사람들에게도 떨어졌다.
불귀곡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곡을 지키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긴 채 모두 회남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전해진 것이다.
공손량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 보고를 들었다.
“인원을 모으면 몇 명이나 되느냐?”
양곽연이 대답했다.
“내곡에서 백, 외곡에서 사백, 합이 오백 명입니다.”
“그들을 보내줘라.”
“천주…….”
“무백의 욕심 때문에 형제들을 회남에서 모두 죽게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니냐?”
양곽연은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공손량의 말대로 회남에 간 형제들의 죽음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되어서 신마성을 물리쳤을 경우, 공손무백이 기고만장해져서 천하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천외천의 종말을 의미했다.
세상은 독불장군을 원치 않는 법. 천하는 천외천의 강함을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일어날 것이 두려워서라도 천외천의 뿌리까지 철저하게 짓밟으려 할 것이다.
천외천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천하를 모두 상대할 수는 없는 일. 어쩌면 영원히, 천외천은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었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따라야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 양곽연은 피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천주.”
“곽연, 너무 걱정 마라. 무헌이 예견했던 일이 이제야 진행되고 있는 것이니까.”
푹, 숙여졌던 양곽연의 고개가 번쩍 쳐들렸다.
“예? 그럼 이공께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단 말씀이십니까?”
공손량은 공허한 웃음을 지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무백은 오늘의 명령을 후회하게 될 게야.”
3
이틀째 되던 날.
천중수 백리진학이 강소, 절강의 고수들과 함께 신검문 무사들이 있는 곳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회령장 전체에 퍼졌다.
탁능한과 공손선우를 비롯한 천룡회의 주요고수들은 사람을 보내 백리진학을 초청했다. 원한다면 천룡회의 주요 요직을 내주겠다면서.
하지만 백리진학은 자신에게 신경 쓰지 말라며 그들의 초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천룡회에선 백리진학 일행에게 보다 좋은 거처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백리진학은 이번에도 그들의 호의를 거절했다. 신검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편하다면서.
회령장에 있던 천룡회의 무사들은 백리진학의 행동을 칭송했다.
높은 직위와 편안함을 거부하고 말단무사들과 함께 지내겠다니. 진정 대협다운 행동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풍천은 그러한 말을 듣고 코웃음 쳤다.
‘킁, 높은 자리에 있으면 귀찮으니까 거부한 거지 뭐. 거처야 나 때문에 못 옮기는 거고.’
그래도 무늬만 대협인 자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니 자신이 받아들인 거지만.
어쨌든 백리진학이 계속 거부하자, 결국 탁능한과 공손선우가 간부들과 함께 비검당의 거처를 찾아왔다.
“백리 형,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탁능한이 먼저 백리진학의 허락을 구했다. 백리진학도 차마 두 사람의 방문까지 거절하지는 못했다.
“들어오시오.”
탁능한과 공손선우는 눈짓을 하고서 방문으로 다가갔다. 그들이 문을 열려고 할 때, 마침 방문이 열리고 비검당 사조원인 강대구가 밖으로 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쟁반에는 백리진학 일행이 먹고 남은 음식접시가 두어 개 겹쳐 있었다.
서둘러 밖으로 나오던 강대구는 바로 앞에 탁능한과 공손선우가 서 있는 걸 보고 흠칫 놀라서 옆으로 비켜섰다. 그런데 그가 급히 움직이자, 쟁반 위의 접시가 기름기에 쭉 미끄러졌다.
강대구는 깜짝 놀라서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
얼음 위를 지치듯 빠르게 미끄러지던 접시 끝이 겨우 그의 손끝에 걸렸다.
순간, 접시는 떨어지지 않았지만, 대신 그 반동으로 접시 위에 남아 있던 음식찌꺼기가 허공으로 튀었다.
안도하던 강대구의 얼굴이 석고처럼 굳어버렸다.
하필이면 튀어 오른 음식찌꺼기가 탁능한과 공손선우를 덮친 것이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피할 틈도 없었다. 더구나 두 사람은 방안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탁능한은 그나마 좌측에 있어서 자잘한 찌꺼기가 조금 묻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공손선우는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재빨리 몸을 틀었음에도 기름기 번들거리는 음식찌꺼기가 옆구리에 떨어져서 허벅지까지 흘렀다.
게다가 그는 백색비단무복을 입고 있어서 붉은 기름기가 유난히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이, 이런……!”
공손선우는 기름기보다 더욱 붉게 변한 얼굴로 분노를 터트렸다.
“네놈은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느냐!”
당황한 강대구는 급히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공손선우의 옷에 묻은 기름기를 닦기 위해서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죄, 죄송합니다, 공자. 제가 닦아 드리겠…….”
“비켜라! 어디다 그 더러운 손을 대는 것이냐!”
공손선우는 노성을 터트리며 강대구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공력을 주입하지 않았다 해도 절대지경을 눈앞에 둔 고수의 분노가 실린 일장이었다. 그 장력에는 뼈를 가볍게 부술 수 있을 정도의 공력이 무의식중에 스며든 상태였다.
퍽!
“큭!”
허리를 숙이던 강대구가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그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어깨가 축 늘어진 걸 보니 뼈에 이상이 생긴 듯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강대구는 눈앞에 있는 음식찌꺼기를 떼어내기 위해 오른손을 뻗었다.
“공자, 죄송……. 제, 제가 닦아…….”
공손선우는 손을 저어서 강대구가 뻗은 손을 쳐냈다.
“비천한 놈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비키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고는 발을 뻗어서 강대구를 힘껏 차버렸다.
퍼억!
강대구의 몸이 뒤로 훌쩍 날아가서 떼굴떼굴 굴렀다.
탁능한과 공손선우의 등장에 몰려들었던 삼파의 무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강대구가 실수한 것은 분명했다. 그로 인해서 하얀 비단옷이 기름기로 물들었으니 화가 날만도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의 행동이었다.
더러운 손이라고? 비천한 놈?
‘저는 얼마나 잘나서?’
‘부모 잘 만나서 잘 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없나?’
‘좆 까고 있네, 씨발 놈.’
‘우리 조장 없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개자식.’
비검당 사람들은 속으로 욕을 퍼붓고, 석초산도 불만스런 목소리로 항의했다.
“너무 하는 거 아니오, 공자? 강 조원이 실수한 것은 분명하오만 그리 심하게 맞을 정도는 아니잖소?”
다른 사람들 역시 공손선우를 쏘아보며 무언의 항의를 했다. 심지어 뒤로 약간 처져 있던 사공화 등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공손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를 삭였다.
“미안하게 되었소. 너무 급작스럽게 일이 벌어지다 보니 내가 그만 흥분한 것 같군요.”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에게 욕이라도 할 것처럼 인상을 쓰고 노려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찮은 놈들이 어디서 눈을 부릅뜨고 쳐다봐? 신마성만 무너뜨리면 네놈들 따위는 내 발바닥을 닦기 위해서 줄을 서야 할 거다.’
그러면서도 형식적으로 포권을 취해 보인 그는 탁능한을 재촉했다.
“옷을 갈아입고 오기도 뭐한데, 일단 백리 대협을 먼저 만나 뵙지요.”
“그렇게 하세.”
탁능한은 은근히 고소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일체 드러내지 않고 방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손선우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바짝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풍천은 건물 끝 쪽의 기둥에 기대서서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강대구가 당하는 걸 지켜본 그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가슴에서 발화한 분노가 손끝, 발끝, 머리끝까지 퍼졌다.
그는 공손선우가 탁능한과 함께 방으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시선을 뗐다.
그때 은초당과 백승문이 강대구를 부축해서 그의 앞으로 데려왔다.
“조장…….”
삼파의 무사들은 풍천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비검당 사조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기에 그들의 눈빛에는 어떤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풍천은 기둥에서 어깨를 떼고 강대구를 보며 혀를 찼다.
“쯔쯔쯔, 조심 좀 하지. 그런 실수를 왜 하는 거요?”
“죄송합니다, 조장님. 저 때문에 괜히…….”
풍천은 고개를 젓고는 은초당에게 말했다.
“방으로 데려가 눕히쇼. 어깨뼈가 탈골된 것 같으니까 조심하고.”
은초당은 입술을 질겅 깨물고 한마디 하려다가 그냥 고개를 숙였다.
“예, 조장.”
담담히 말하는 풍천의 눈과 마주친 순간,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그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눈빛보다 무섭고 두려운 눈빛이었다.
그러나 풍천의 눈빛을 보지 못한 삼파 무사들은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변했다.
그렇게 무시무시하던 비검당 사조도 천외공자 공손선우에게는 어쩔 수 없나?
어깨가 처진 그들은 곧 사방으로 흩어져서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갔다.
풍천은 방으로 들어가서 강대구의 탈골된 어깨를 맞춰주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장난처럼 말했다.
“혹시 동전 한 푼 있수?”
4
회령장에 머문 지 사흘째 되던 날,
삼백 명의 이차 지원무사가 도착했다. 그리고 닷새째 아침, 이백여 명의 지원무사가 추가로 달려왔다.
지원무사의 숫자가 일천을 넘어가자 천룡회 무사들의 표정에서도 활기가 돌았다.
그 일천 명 중에 천외천의 무사가 이백이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감이 생긴 탁능한과 공손선우도 철목보를 되찾기 위해서 머리를 맞댔다.
총 인원 일천오백. 그 정도면 철목보는 물론 대월산장까지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날 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풍천은 등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방문을 열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초웅이 물었다.
“형, 어디가?”
“주방에 가서 밥 남은 거 있나 물어보려고.”
같은 방에 있던 사람들은 풍천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초웅은 그 말을 듣고 군침이 돌았다.
“나도 같이 갈까?”
“너는 여기 있어. 내가 알아보고 올 테니까.”
“알았어.”
밖으로 나온 풍천은 주방으로 가지 않고 어슬렁거리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를 알아본 삼파의 무사 몇 명은 슬쩍 고개를 숙이며 아는 척했다.
가끔 묘한 짓을 해서 그렇지 어쨌든 자신들을 구해준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일각 정도 돌아다니던 풍천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자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훌쩍 몸을 날려서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북쪽에 있는 별원으로 날아갔다.
별원에는 탁능한과 공손선우 등 천룡회의 간부들이 머물고 있었다.
풍천은 지붕 위에서 공손선우가 머무는 방을 쳐다보며 새파랗게 눈을 빛냈다.
‘공손선우, 사람 잘못 건드렸어. 은혜는 열 배로 갚고, 원한은 백 배로 갚는다는 게 내 원칙이거든.’
마땅한 기회가 없어서 참고 지냈을 뿐 한 번도 원한을 잊은 적이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 한 놈은 돈 떼어먹고 도망간 놈보다 열 배는 더 나쁜 놈이었다.
‘그것만 해도 죽을죄를 지었거늘, 어디서 그따위 짓을 저질러?’
엊그제까지만 해도 적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긴장감이 팽배했었다.
그러나 지원무사가 일천을 넘어가면서 긴장감이 많이 풀어진 상태, 잘하면 기회가 올 것 같았다.
아니 기회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처리할 작정이었다.
내일이라도 철목보를 공격할지 몰랐다. 싸움이 시작되면 호위무사들에게 둘러싸일 터, 그만큼 기회를 잡기가 어려워질 것이었다.
안으로 숨어들어 가서 목을 따버려?
‘아냐, 그건 너무 간단해. 최소한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알고 죽어야 돼.’
밖으로 불러낼까? 자존심이 센 놈이니까 슬슬 긁으면 혼자 나올 것 같은데…….
풍천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공손선우의 목을 열두 번도 더 떼어냈다 붙였다.
‘놈이 죽으면 공손무백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어. 그럼 그만큼 이 싸움도 빨리 끝나겠지.’
초령이와 함께 천풍장으로 돌아가는 날도 빨라질 것이고.
풍천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결정했어! 공손선우, 오늘 저녁이 마지막 식사가 될지 모르는데, 많이 먹었겠지? 안 먹었으면 지금이라도 먹어라. 저승길 가면서 배고프다고 하지 말고.’
그것이 그가 공손선우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호의였다.
바로 그때, 방문이 열리고 공손선우가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