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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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24화
224화
“더운 게 문제긴 한데, 햇빛으로 인한 고통은 없었다. 그리고 눈은 계속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만약 이대로 나간다면 보통 때는 눈을 감은 채 움직이고, 필요할 때만 눈을 뜨면 될 것 같다. 물론 빛에 적응되거나, 빛을 차단하면서도 앞을 볼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다면 계속 뜨고 있어도 되겠지.”
“손을 사용하는데 불편하지 않아요?”
“아, 손은 가죽으로 손 모양을 만들어서 끼면 좋을 것 같다. 이 상태론 너무 불편해. 좌우간 결론을 내리자면, 처음 만든 것치고는 괜찮다는 생각이다. 조금만 더 개선한다면 낮에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와아아아!”
아극령이 제일 좋아했다. 낮에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벽라족에게 꿈같은 일이었다.
문제는 사람들이 가죽으로 둘러싼 자신들을 어떻게 보냐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나중에 걱정해도 되었다.
아수비는 아극타, 아극령과 머리를 맞대고 가죽옷과 가죽모자에 대해서 연구했다.
오랜 시간 입으려면 불편함이 없어야 했다. 그리고 남의 눈에 너무 이상하게 보여도 안 되었다.
아극타는 아극령을 시켜서 민가로 내려가 무명으로 만든 옷을 구해오라고 했다.
훔치라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잡은 짐승의 고기를 주고, 옷을 가져오면 마을 사람들도 싫어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수비는 아극령이 가져온 무명옷을 가죽옷 안에 덧대서 살과 마찰되는 부분의 불편함을 줄였다. 나중에 딱딱한 가죽옷이 찢어지는 일이 발생해도, 안에 무명옷이 있으면 햇빛으로부터 조금은 더 안전할 것이었다.
그리고 가죽 중에서 부드러운 부위로는 장갑을 만들고, 딱딱하고 두꺼운 곳으로는 신발을 만들었다.
가죽옷과 장갑, 신발을 만든 아수비는 마지막으로 모자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았다.
토끼가죽으로 만든 모자는 모자라기보다 가죽복면에 가까웠다. 그걸 그대로 쓰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괴물 보듯 쳐다볼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고민하고 있을 때, 민가에 내려갔던 아극령이 대나무로 만든 모자를 하나 가져왔다. 양민들이 햇빛을 피하기 위해 쓰는 평범한 죽립이었다.
“누나, 이거 어때? 여기에 가죽을 뒤집어씌우면 편하지 않을까?”
아수비는 눈을 반짝이며 아극령이 내민 죽립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극령에게 그와 같은 죽립을 두 개 더 구해오라고 했다.
이틀 후. 아극타는 아수비가 내민 모자를 써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크지 않은 죽립이 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가죽은 사방으로 길게 내려와서 어깨와 등, 가슴에 닿을 정도였다. 그리고 어깨 쪽에는 끈이 달려 있어서 몸과 고정시킬 수도 있었다.
안쪽에는 노루의 내장으로 만든 띠를 빙 둘러서 붙여놨는데, 앞뿐만 아니라 옆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나머지 부족한 것은 밖으로 나가보면 채울 방법이 생기겠지.”
다음 날 저녁.
아수비는 아기를 부드럽고 깨끗한 가죽으로 싸서 등에 멨다.
이제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모두 끝났다.
세상이 자신들을 반겨주지 않을지라도 이제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멸시할지 모르지만, 마음 아파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자신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기를 바라보았다.
‘아가야, 너를 꼭 아버지에게 데려다 줄게.’
손가락을 빨고 있던 아기는 눈이 마주치자 까르르 웃으며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즐겼다.
그녀도 빙그레 웃고는 모자를 쓰고 턱 끈을 죄었다. 하지만 지금은 밤이었기에 가죽으로 앞을 가리지는 않았다.
아극타와 아극령도 준비를 마쳤는지 가죽보따리를 메고 일어났다.
3
풍천은 해동산과 황우연만 남겨놓고 일행과 함께 신검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신검문과 검각, 경천산장의 후퇴한 무사들로 이루어진 식현의 저지선이 뚫리고 말았다.
위태곤은 저지선이 무너지자 거기서 멈추지 않고 후퇴하는 삼파의 무사들 뒤를 쫓았다.
이대로 정양까지 접수한다면 신검문이 지척인 것이다.
신마성의 무사들은 내심 위태곤의 지휘력을 우려했었는데, 예상외로 위태곤이 선두에 나서서 직접 적진을 돌파하자 모든 우려를 떨치고 환호했다.
식현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검문이 들썩였다. 적이 정양까지 올라오면 신검문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백무천은 즉시 무사들을 소집하는 한편, 천외천의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반 시진이 지나자 무사들이 연무장에 집결했다.
백무천은 고심 끝에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
이럴 때 풍천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며칠 전에 급한 일이 있다며 회남을 떠났다는 연락이 온 터였다.
그렇다고 천의맹에 도움을 청하자니, 그곳 역시 내부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듯 요즘 들어서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백무천은 사백 명의 신검문 무사와 천외천의 사람들을 이끌고 정양으로 향했다.
천풍장을 출발한 지 이틀 후.
풍천 일행은 분위기가 뒤숭숭한 신검문에 도착했다.
풍천은 분위기만 보고도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하고, 일행들을 객당에 머무르게 한 후 신검전으로 갔다.
신검전에선 화청백과 다섯 명의 간부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영호관의 모습을 한 사마공유도 있었다.
풍천이 들어가자 근심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풍천은 사마공유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이 창백한 걸 보니 아직 완쾌되지 않은 듯했다.
“좀 어떻수?”
“많이 나아졌다. 죽을 정도는 아니니 걱정 마라.”
“다리는?”
“걷는 데는 지장 없다.”
‘제기랄! 잘났수!’
풍천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화청백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요?”
화청백이 조금 전보다 펴진 얼굴로 대답했다.
“때맞춰 잘 왔네. 놈들이 식현의 저지선을 뚫고 정양까지 올라오는 바람에 사부님께서 직접 그곳으로 가셨네.”
“상황은 어떻수?”
“놈들과 이십 리의 거리를 두고 대치한 상태인데, 그리 썩 좋은 상황은 아니네. 해서 이곳에는 경비를 위한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정양으로 보낼 생각이네.”
남은 무사들은 기껏해야 이백오십 정도. 그중에서 당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원은 백여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조차도 아쉬운 판이었다.
“안휘 쪽도 놈들이 공격했다면서요?”
“천룡회의 최대지부인 대월산장이 놈들에게 넘어갔다는군. 그 바람에 천룡회도 초비상이 걸려 있네.”
“아주 작정을 했군요.”
“전쟁이 길어져서 양민의 피해가 커지면 황군이 움직이게 되네. 그러니 신마성으로서도 전쟁이 길어져서 좋을 것이 없지.”
그때 풍천의 소식을 전해 들은 백초령이 신검전까지 뛰어왔다.
“풍천! 왜 이제 왔어?”
“그런 소리 마. 나도 며칠간 정신없이 보냈어.”
“그 변태가 신마성 무사들을 지휘하고 있대. 풍천이 가서 아버지 좀 도와드려, 응?”
“당연히 가서 도와드려야지.”
‘장인어른이 될 사람인데.’
풍천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하고 화청백을 바라보았다.
“정양에는 내가 가볼 테니, 화 형은 이곳이나 잘 지키쇼.”
“부탁하네.”
반쯤 몸을 돌리던 풍천은 사마공유를 째려보았다.
“아픈 척하지 마쇼. 그 정도 상처를 매일 달고 산 사람도 있으니까.”
“나도 안다. 아마 나 같았으면 미쳐서 도망쳤을 거다. 멍청한 너나 견뎠지.”
“쳇, 말은 여전히 청산유수네. 내가 말을 말아야지.”
풍천은 투덜거리며 신검전을 나섰다.
사마공유는 그런 풍천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아버지가 평생 하신 일 중 가장 잘하신 일은, 바로 너를 주워온 거였어.’
4
삼파의 무사들은 정양에서 동남쪽으로 이십 리 떨어진 조가장에 진을 치고 방어망을 구축했다.
반면 신마성의 무사들은 조가장에서 남쪽으로 십 리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을 차지하고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상대의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하면서 틈이 보이기만 하면 공격했다.
지난 이틀 동안 산발적으로 벌어진 격전은 모두 네 차례. 삼파가 두 번을 공격했고, 신마성도 이에 질세라 두 번 공격했다.
하지만 서로 간에 적잖은 희생자만 냈을 뿐 어느 쪽도 이득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치.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감만 더해지는 상황.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터라 양쪽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고 한시도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다.
풍천이 신검문을 출발하던 그 시각, 마을의 중앙에 있는 작은 장원에 신마성의 간부들이 모였다.
그들은 지속되는 대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곳은 하남이 아닌가. 시간이 흐르면 신검문과 검각에서 지원 병력이 올 게 분명했다. 어쩌면 천의맹에서도 무사들이 올지 모르고.
더 이상의 대치는 신마성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
물러가지 않을 거라면 건곤일척의 승부를 내는 수밖에!
위태곤은 간부들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자 지휘자로서 명령을 내렸다.
“놈들이 긴장을 풀고 잠자리에 드는 해시(亥時:저녁9시∼11시) 초에 공격을 시작하겠습니다. 삼면으로 공격해서 단숨에 방어막을 무너뜨릴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여하한 경우에도 후퇴명령은 없습니다. 그리 아시고, 놈들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다는 생각으로 전력을 다해서 놈들의 목을 치십시오!”
천막 안에 둘러앉은 신마성과 천혈궁의 간부들이 살기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이공자.”
“흐흐흐, 진즉 이렇게 했어야 했어.”
“벌써부터 피가 끓는군.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겠어.”
백무천은 신마성 무사들의 움직임이 평소에 비해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보고를 받고 이마를 좁혔다.
자신들조차 긴장감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분주하거늘, 기다림에 익숙하지 못한 마도의 무사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다니.
“유현, 놈들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철저히 주시하라 일러라.”
“예, 형님.”
백유현은 나직이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후정이 죽은 후 근 일 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그는 이전에 비해 많이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백무천은 방을 나가는 백유현의 뒷모습을 보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는 동생인 백유현의 변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동생은 신검문이 천외천과 손을 잡는 걸 원했다. 그것이 신검문을 하남 제일의 문파로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 믿었다.
하지만 자신은 생각이 달랐다. 그렇게 되면 신검문의 자유의지는 박탈당하고, 결국 천외천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뿐이라 생각한 것이다.
‘유현, 그래서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알리지 않은 것이다. 언젠가는 이 우형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야.’
석양이 질 때부터 밀려들던 구름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늘의 별들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어둠 속에서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점점 강해지는 바람에 조가장의 곳곳에서 타오르는 화톳불이 거세게 흔들리고, 순찰을 도는 무사들의 마음도 심란해졌다.
“이거 비가 오겠는데?”
정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전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화톳불도 없는 비 오는 밤의 경비임무는 그가 아닌 누구라 해도 맡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제길, 교대한 다음에 오면 좋겠는데…….”
그는 짜증 나는 표정으로 몸을 돌리려다 말고 멈칫했다.
저 앞 어둠 속에서 검은 구름이 밀려오는 게 보인 것이다.
그런데 검은 구름은 하늘에서 밀려오는 게 아니었다. 땅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적?”
흠칫한 그는 급히 옆의 동료에게 물었다.
“이봐, 저기 저게 뭐지?”
“응? 뭐가?”
땅을 발끝으로 긁고 있던 무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전면을 노려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저, 적이다! 빨리 들어가서 보고해!”
전필은 쪽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적이 온다! 비상! 비사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