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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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23화
223화
현판이 그대로인 걸 보면 이름이 바뀐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현판이 그대로라고 해서 주인도 그대로란 법은 없었다.
“왜…… 그러시오?”
참다못한 도혼이 물었다.
“천풍장은 분명한데, 집이 너무 다르군요.”
‘무슨 말이야?’
쌍무혼은 풍천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문 안에서 종 울리는 소리가 났다.
“밖에 누구쇼!”
초웅의 목소리.
순간 풍천의 얼굴이 밝아졌다.
“형이다, 초웅!”
“…….”
이번에는 문 안쪽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문이 부서질 듯이 열리더니 갑자기 산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혀어어엉! 어허어엉!”
쌍무혼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초웅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저게 곰이야, 사람이야?’
풍천은 그런 초웅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며 환하게 웃었다.
“잘 있었지? 안으로 들어가자.”
“어.”
솥뚜껑만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친 초웅은 몸을 돌리더니 안에 대고 소리쳤다.
“다 나와봐요! 형이 왔어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중에는 풍천이 있을 거라 예상했던 사람도 있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도 있었다.
허무정, 황우연, 해동산, 감능하, 공손이향, 이곡, 남궁도영, 관추양, 사공수.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다름 아닌 은양이었다.
풍천은 그들을 보자 부모님의 죽음으로 묵직했던 가슴이 많이 가벼워졌다.
“하하하, 그동안 다들 천풍장에 계셨군요? 관 형도 오셨고 말이죠.”
모두가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으며 풍천의 귀환을 반겼다.
“서신을 받고 올 때만 기다렸네. 며칠 전 큰 싸움이 벌어졌다고 해서 급한 마음에 회남으로 가볼까 했지만, 기다리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았지.”
허무정의 말에 풍천이 피식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잘하셨수. 회남으로 갔으면 만나지 못했을 거요.”
그리고 공손이향을 바라보았다.
“몸은 괜찮아요?”
공손이향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왠지 모르게 전에 봤을 때보다 차갑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아직은 견딜 만해요.”
음령지맥이 준동한 지 육 개월째. 음기가 이미 몸을 뒤덮어서 감정조차 얼어붙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풍천에게만큼은 그런 상태를 표내고 싶지 않았다.
풍천은 그녀에게 양곽연의 말을 전해주었다.
“이제 걱정 말고 맘껏 구경하고 가요. 태산으로 가서 방 의원님에게 진맥도 받아보고요.”
“그럴게요.”
말을 하는 와중에도 한기가 느껴진다. 병증이 깊어진 듯하다.
풍천은 마음이 아팠지만 아무런 표를 내지 않고 두리번거렸다.
“악 형은 안 왔나 보죠?”
관추양이 쓴웃음을 지으며 악진표에 대한 일을 말해주었다.
“그가 해 형의 동생을 죽였더군. 그 바람에 해 형이 그를 죽인다고 어찌나 설치는지, 결국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손가락 하나를 자르고 천풍장을 떠났네.”
“악 형이 해 형의 동생을 죽인 사람이라고요?”
풍천은 해연히 놀라며 해동산을 쳐다보았다.
해동산은 만감이 교차한 눈빛을 파르르 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분명히 그였어.”
풍천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시 해동산이 그렸던 엉터리 그림이 악진표를 닮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랬군요…….”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더군. 그냥 떠나도 현재의 내 실력으로는 잡을 수 없었을 텐데 말이야. 그래서…… 나도 순순히 보내줬네. 대신 진짜 실력으로 정당히 싸워서 죽일 생각이야.”
왠지 해동산이 많이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 동안 많이 변했군. 실력도 훨씬 좋아진 것 같고.’
그때 초웅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형, 나 추양 형에게 도법 배우고, 황 할아버지에게 내공심법을 하나 배웠어.”
“그래? 그거 잘됐네. 관 형이 다른 것은 몰라도 도법 하나는 진짜 대단한데.”
그 말에 관추양은 빙그레 웃고, 허무정은 초웅을 흘겨보며 구시렁거렸다.
“그 바람에 곰이 괴물이 되고 말았네. 뭐 자네만은 못할 테지만.”
허무정의 무위는 과거 신마성의 팔대신마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괴물이라 칭하자 풍천은 초웅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하긴, 저 엄청난 도로 관 형의 그 살벌한 도법을 펼치면 정말 볼 만할 거야.’
내심 초웅이 강해졌다는 것에 흡족한 마음이 든 풍천은 장 노인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한참이 지나도록 그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장 노인은 어디 갔지? 자나?”
풍천의 말에 초웅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쳇, 이제 안 운다고 할아버지와 약속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풍천은 초웅을 재촉했다.
“무슨 일이야?”
초웅은 눈물을 쓱 닦고 입을 열었다.
장 노인이 노마를 데리러 갔다 오던 중 습격을 받은 일과 관추양이 구해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때의 부상으로 인해서 얼마 전에 숨을 거두었다는 것까지.
“석 달 전에 돌아가셨어. 동산 형에게 할아버지의 친구를 죽인 자를 찾아내서 목을 따버리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끝내 초웅의 고리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풍천은 두 눈에서 서릿발 같은 한광을 흘리며 관추양에게 물었다.
“어떤 놈들인 줄 아쇼?”
“천응단 놈들이었네.”
“그 개새끼들이……!”
“나는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거야. 천응단이든 가압단(家鴨團)이든, 전부 죽여버릴 거야.”
초웅이 엄지손톱만큼이나 큰 이를 박박 갈며 복수를 다짐했다. 하지만 풍천은 분노의 눈빛을 번들거리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 마음은 아는데, 그건 불가능해.”
초웅이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을 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냐, 초웅이도 강해졌어, 형!”
“불가능하다니까. 그놈들이 나를 죽이러 왔다가 거꾸로 나에게 다 죽었거든. 그때 몸을 많이 다쳐서 치료하는 데 일 년이나 걸렸어.”
“어? 그래? 그럼 어떡해야 할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 있지?”
“걱정 마. 대신 그놈들에게 지시한 놈을 잡으면 되니까.”
공손선우를 말이다.
“알았어, 형. 그럼 그놈은 꼭 내가 죽일 수 있게 해줘.”
풍천은 초웅을 향해 느릿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마.”
한편, 은양은 풍천보다 풍천의 뒤에 서 있는 쌍무혼을 보고는 놀라서 전음으로 물었다.
[어떻게 저 사람을 따라온 건가?]
쌍무혼은 은양이 공손이향을 보호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기에 도혼이 보일 듯 말 듯 쓴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은양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풍천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세상에 별의별 일이 다 있어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지만, 우연히 단천무령주가 된 대풍이 사공가의 종손일 줄이야!
그때 풍천이 은양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귀하는 누구쇼?”
“은양이라 하네.”
“이름 말고 신분 말이오.”
은양은 숨을 한 번 쉬고는 간단하게 답했다.
“천주의 명으로 이향을 보호하기 위해서 따라온 사람이지.”
풍천의 가자미눈처럼 한쪽으로 돌아간 눈이 쌍무혼을 가리켰다.
“그럼 저 두 분을 잘 알겠군요.”
“물론이네.”
은양이 순순히 수긍하자, 풍천은 쌍무혼과 은양을 번갈아서 힐끔거렸다.
“이미 상황을 들은 것 같은데…….”
은양의 가슴이 싸해졌다. 속을 다 드러내 보인 기분. 일순간 입이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들었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손 소저 지키는 일이나 충실히 하쇼. 그게 싫으면 여길 떠나든지.”
“그렇게 하지.”
분위기가 바닥으로 가라앉자 황우연이 말문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 천룡회와 신마성을 비롯한 마도연합이 올해가 가기 전에 전쟁을 끝낼 작정인가 보던데.”
풍천은 천풍장으로 오면서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신검문으로 갈 생각입니다. 하남 남쪽을 먼저 정리하고 안휘로 가죠.”
서둘 이유가 없었다.
그때쯤이면 천룡회와 마도연합의 싸움이 절정에 이르렀을 터. 결정적인 순간이 닥쳤을 때 양대 세력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히면 전쟁의 불길도 한순간에 사그라질 것이었다.
‘그 후에 백초령을 데리고 천풍장으로 돌아오는 거야.’
씩, 나름 행복한(?) 미소를 지은 풍천은 풀죽은 표정으로 한쪽에 서 있는 이곡을 발견하고 뒤늦게 품속의 약병을 떠올렸다.
“아, 이 형. 부인의 병은 어떻게 되었죠?”
이곡의 어깨가 축 처졌다.
“후우우, 한 달 전 집에 갔다 왔는데…… 마누라의 몸무게가 사백 근으로 늘었소.”
사람들 모두 입을 떡 벌리고 이곡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여자의 몸무게가 사백 근이라니!
잠자다 깔리기라도 하면, 저 몸으로 견딜 수 있을까?
하지만 풍천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그는 역조생이 준 약을 꺼내 이곡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본래의 대나무 통보다 절반 크기의 작은 통이었다.
풍운보에서 오던 중 작은 통 두 개를 사서 둘로 나눈 것이다.
“이거 받으쇼.”
“그게 뭐요?”
“부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오.”
이곡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정말이오?”
“효과는 확실한 것 같소.”
그 인간이 분명 자신에게도 먹인 것 같았다. 이후로 삼 인분 이상을 먹지 못하는 걸 보면. 그러니 약의 효과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빌어먹을 영감!’
풍천의 마음이야 어쨌든, 이곡은 지옥에서 살아나온 사람처럼 좋아하며 대나무 통을 신주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고맙소, 령주!”
금방이라도 눈물이 주르륵 흐를 것 같은 표정.
풍천은 흐뭇하게 웃으며 약의 복용방법을 설명해주었다.
이곡은 풍천의 설명을 한 자도 잊지 않고 머릿속에 새긴 후 조급한 마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에 다녀와도 되겠소?”
“좋을 대로 하쇼. 단, 돌아올 거면 여기로 오지 말고 신검문으로 오쇼.”
“알겠소이다. 그럼 먼저 떠나겠소.”
이곡은 숨 쉬는 시간도 아까운지 곧바로 몸을 날려 천풍장을 떠났다.
풍천은 그제야 몸을 돌리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자,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계획을 짜봅시다.”
2
아수비는 아극령이 잡아온 노루와 토끼의 가죽을 깨끗하게 손질한 다음 옷을 만들었다. 일반 옷과는 조금 달랐지만 마을에서 사람들의 옷을 많이 봤기에 그럭저럭 비슷하게 만들 수 있었다.
아수비는 사흘에 걸쳐 옷과 모자가 완성되자 아극타에게 입어보라고 했다.
아극타는 아수비가 만든 가죽옷을 입어보더니 농담처럼 말했다.
“어떠냐? 멋있지?”
“풋, 네, 멋있어요.”
“어디 모자도 써볼까?”
모자 속에 머리를 집어넣은 아극타는 눈이 있는 곳과 바늘구멍이 난 곳을 맞추었다.
십여 개의 바늘구멍으로 밖이 어슴푸레 보였다.
“밖으로 나갈 때는 이걸로 눈을 가려보세요.”
아수비가 말하며 띠를 하나 건넸다.
그 띠는 노루의 내장을 말린 다음, 열매에서 추출한 파란 물로 물을 들여서 빛의 투과를 최대한 막은 것이었다.
아극타는 띠를 받아들고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아수비와 아극령은 초조한 표정으로 아극타의 옷 상태를 점검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햇빛이 직접 살에 비쳐서는 안 되었다. 특히 눈은 햇빛에 직접 노출되면 실명할지 몰랐다.
아직 자신들이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과거 선조들의 말이 그러했으니 두 눈을 걸고 모험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동굴 입구로 약한 빛이 스며들었다. 마침내 태양이 떠오른 것이다.
아극타는 염색한 노루의 내장으로 눈 부위를 가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가리자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감에 의지하며 밖으로 나갔다.
사실 눈까지 완벽하게 막아도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사물을 정확히 인지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앞을 볼 수 있어야 했다.
아수비와 아극령은 아극타가 나가는 걸 보며 두 손 모아 조상들께 빌었다.
아극타가 다시 동굴로 돌아온 것은 한 시진 후였다.
아수비와 아극령은 초조한 눈으로 아극타의 입을 주시했다.
아극타는 토끼가죽 모자를 벗고, 가죽옷을 벗었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바를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