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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풍전설 219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26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천풍전설 219화

 

219화

 

 

 

 

 

 

고개를 돌린 풍천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검을 든 신예가 눈에 쌍심지를 켠 채 뛰어오고 있었다.

 

‘경공이 제법인데? 일 년 사이 많이 늘었어.’

 

그가 바라보는 동안 코앞까지 다가온 신예는 방문 앞을 막고 서서 풍천을 쓰윽 훑어보았다.

 

“누구죠? 누군데 감히 우리 령주님의 방문 앞에서 얼쩡거리는 거죠?”

 

풍천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신예를 바라보았다.

 

일 년이 지나면서 키가 더 커졌고, 가슴도 볼록해져서 제법 여자다운 티가 났다.

 

조금 가꾸기만 한다면 불귀곡의 청년들이 줄을 서서 뒤를 졸졸 쫓아다닐 것 같았다.

 

풍천이 대답을 하지 않자 신예의 말투가 사나워졌다.

 

“처음 보는 사람 같은데, 귀 먹었어요? 왜 왔냐고 묻잖아요?”

 

풍천은 방문 앞에 위패가 든 봇짐을 내려놓고는 매일 본 사람처럼 태연히 말했다.

 

“신예야, 주방에 가서 소쿠리나 가져와라. 오랜만에 가재나 잡아서 구워 먹자.”

 

“…….”

 

“뭐해? 빨리 가져와.”

 

하얀 이가 보이도록 입을 반쯤 벌린 신예는 멍한 표정으로 풍천을 쳐다보았다.

 

“얼씨구? 나이 한 살 더 먹으니까 이 령주님의 말이 말 같지 않게 들려?”

 

“저, 정말…… 령주님?”

 

풍천은 씩 웃고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개울 쪽으로 걸어갔다.

 

“설마 나 없는 동안 혼자 다 잡아먹은 것은 아니겠지?”

 

풍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예는 앞에 있는 사람이 대풍임을 확신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령, 주, 님! 으아앙!”

 

풍천은 고개를 돌리고 혀를 찼다.

 

“쯔쯔쯔, 하여간 덩치만 커졌지, 하는 짓은 작년이나 똑같네.”

 

 

 

결국 풍천은 신예가 끓여준 차를 마시는 것으로 가재잡기를 대신했다.

 

“근데 너 가슴이 제법 커졌다?”

 

“령주님!”

 

“왜 소리를 질러?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게 지금 숙녀에게 할 소리예요?”

 

“하면 안 돼?”

 

“참나, 아무 데서나 그런 말하면 뺨 맞는다고요.”

 

“여긴 아무 데나가 아니잖아. 가만, 엉덩이도 커졌잖아? 무겁겠다.”

 

“령, 주, 님!”

 

얼굴이 벌게지도록 신예를 놀린 풍천은 차를 마시며 실소를 지었다.

 

왠지 슬퍼 보이는 미소.

 

신예는 그 미소를 보고 갑자기 가슴이 아릿해져서 입을 닫고 풍천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풍천이 차를 다 비우자 다시 잔을 채워주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저, 무슨 일 있었어요? 왜 그런 표정이세요?”

 

풍천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잔을 반쯤 비웠다.

 

슬픔을 털어내기 위해서 장난을 쳐봤는데, 가슴이 묵직하고 답답한 걸 보니 그다지 효과가 없는 것 같다.

 

“아주, 아주 옛날부터 알고 싶었던 걸 마침내 알게 되었거든. 그런데 내가 꿈꿔왔던 것과 현실이 너무 많이 달라서 이 령주님의 마음이 많이 아프다.”

 

말하는 와중에 물기가 눈을 적셨다. 목소리도 살짝 떨렸다.

 

그 표정이 어찌나 슬퍼 보이는지 풍천을 보던 신예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령주님이 그런 표정을 지으니까 이상해요.”

 

그래도 풍천은 여전히 이상한 표정으로 차를 마저 비우고 신원창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아무래도 계속 신예와 마주 앉아 있으면 우는 모습을 보일 것만 같았다.

 

“신예야, 그 붉은 도마뱀 노인이 어디 사는지 알아?”

 

 

 

5

 

 

 

붉은 도마뱀 노인, 신원창은 구석진 곳의 작은 계곡에 살고 있었다.

 

그곳에는 모두 네 명의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모두 신원창처럼 백 세 전후의 전대 원로들이었다.

 

풍천이 찾아가자, 신원창은 붉은 뿔머리를 건들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네놈은 누군데 여기에 들어온 거냐? 다리뼈를 부러뜨리기 전에 썩 나가라.”

 

“접니다.”

 

풍천은 만사 귀찮은 표정으로 영패를 척 내밀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신원창은 풍천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얼굴이……?”

 

“바뀔 수도 있죠 뭐.”

 

두어 마디에 사람 울컥하게 만드는 건방진 말투. 분명 그놈이다.

 

신원창은 그제야 확신을 갖고 풍천을 반가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잘 왔다, 안 오면 찾아 나설까 했는데…….”

 

신원창은 전각 안으로 풍천을 데려가더니 함께 살고 있는 세 노인을 소개했다.

 

“여기 이 사람은 공손완이다. 지금의 천주에게는 숙부가 되지. 그리고 여기 이 사람은 화경선, 문오의 숙부고, 저분은 용무승이라는 분이다. 용가에서 제일 어른이시지.”

 

그들은 천외천의 사람들 중에서 전설이 거꾸로 잘못 알려졌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인지 풍천도 마음 편하게 입을 열 수 있었다.

 

“화 장로님께 들으니 저를 찾으셨다고 하던데, 무슨 일로 찾으신 겁니까?”

 

“너, 유령총에 들어가 봤다고 했지?”

 

“왜요, 안 믿어져요?”

 

“어디를 통해야 들어갈 수 있지?”

 

풍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거기를 들어가려고 하시는 거죠? 설마 전처럼 또 박살 내시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

 

신원창이 붉은 뿔머리를 흔들며 툭 쏘아붙였다.

 

“이놈아, 우리라도 가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그런다. 됐냐?”

 

“뜻은 좋은데, 죄송하지만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좌우간 알려주기나 해라. 정 안 되면 밖에 사죄비라도 하나 세워줄 테니까.”

 

그것은 괜찮을 것 같다. 비록 천주인 공손량이 직접 사죄하는 것만은 못해도 천외천의 최고 원로들이 아닌가? 또한 사죄비가 세워지면, 자신이 임무를 완수했다는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정말 그러한 이유 때문에 가시려는 거죠?”

 

그에 대해선 용무승이라는 노인이 대답했다.

 

“죽기 전에 그렇게라도 해야만 마음 편히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이니라. 맹세하라면 하지.”

 

아무래도 진정인 것 같다.

 

하긴, 백 살이 넘은 노인네들이 그곳에 가서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으랴.

 

결국 풍천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유령총의 뒤쪽 출구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그리고 신신당부했다.

 

“들어가려고 하지는 마십쇼. 어차피 밖에서는 문을 열 수도 없고, 억지로 열려고 하면 입구가 무너져서 큰일 나니까요. 그러니 입구의 바위에 사죄하는 내용의 글이나 새겨주시면 그들도 만족할 겁니다.”

 

“음, 알았다. 네 말대로 하마.”

 

 

 

신원창을 만나고 무심헌으로 돌아온 풍천은 위패가 담긴 봇짐을 둘러맸다.

 

그걸 보고 신예가 또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 하루도 안 주무시고 바로 떠나실 거예요?”

 

“어. 왜?”

 

“왜는요, 서운해서 그러죠.”

 

“용돈이 떨어져서 그런 것은 아니고?”

 

순간, 눈물을 글썽이던 신예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풍천을 노려보았다.

 

“돈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 필요 없어요! 제가 뭐 돈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아요?”

 

“자식.”

 

풍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신예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신예도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혼자서 살아왔다고 했다. 동변상련이라고나 할까? 꿋꿋하게 살아가는 신예가 안쓰러우면서도 기특했다.

 

그때 다시 공손천우의 말이 떠올랐다.

 

“나 떠나고 나서 공손천우가 찾아왔다며?”

 

“한번 찾아온 적이 있는데 제가 쫓아냈어요. 자꾸 령주님의 방에 들어가려고 하잖아요.”

 

“그놈이 또 그런 짓하면 나에게 말해. 혼내줄 테니까.”

 

그런데 그때 신예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대공자님도요?”

 

멈칫한 풍천은 신예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공손선우? 왜? 그놈이 너에게 이상한 짓 했어?”

 

“저번 겨울에 잠깐 돌아왔었거든요? 그때 저를 시비로 삼겠다고 했는데, 제가 거부했어요. 그랬더니 사람을 보내서 저를 강제로 데려가려고 하지 뭐예요? 마침 고조부님이 오셨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끌려갈 뻔했어요.”

 

풍천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 자식이 어디서 감히 우리 신예를!”

 

“정말 령주님이 대공자님을 혼내줄 수 있어요?”

 

“걱정 마! 내가 혼내줄 수 있으니까!”

 

“그럼 엉덩이를 한 대 세게 차주세요.”

 

풍천은 눈을 부릅뜨고 신예의 엉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엉덩이를? 혹시 그놈이 네 엉덩이를……?”

 

“그런 것은 묻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거 진짜 나쁜 놈이네. 부인까지 있으면서 신예처럼 어린아이를 노리다니! 내 만나기만 하면 엉덩이를 부숴버리겠어!”

 

풍천의 너스레에 기분이 풀렸는지 신예는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말을 돌렸다.

 

“근데 령주님, 밖에 여자들은 어떤 옷을 입고 다녀요?”

 

“뭐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입고 다니지.”

 

“아무래도 좋은 것은 비싸겠죠?”

 

“그것도 가지가지지. 좋은 것은 아무래도 그만큼 비쌀 것이고…….”

 

풍천은 말을 흐리며 신예의 눈치를 봤다.

 

신예는 풍천의 표정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제가 가진 돈으로 살 수 있을까요? 은자를 언니들에게 거의 다 나눠주고 이제 두 냥 남았는데…….”

 

“그, 금두는?”

 

“그건 시집갈 때 밑천으로 써야죠.”

 

정말 알뜰한 신예였다.

 

 

 

잠시 후. 신예는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풍천을 배웅했다.

 

“령주니이이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돼요! 자주 찾아오세요!”

 

풍천도 손을 흔들어주고 걸음을 옮겼다.

 

가슴의 돈주머니는 손을 흔드는 신예의 밝은 표정만큼이나 가벼워져 있었다.

 

그런데 신예가 정말 언니들에게 돈을 나누어줬을까?

 

풍천은 갑자기 그것이 궁금해졌다.

 

‘비연당에 가서 확인해보면 알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오래 있을수록 마음이 울적해질 뿐. 그는 부모님을 업고서 곧장 불귀곡을 빠져나왔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등에 업히니까 기분 좋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백마사로 모셔다 드릴게요.’

 

 

 

불귀곡을 나서는데 얼굴과 체구가 거의 같은 두 사람이 뒤따라 나왔다.

 

“누군데 나를 따라오는 거요?”

 

둘 중 오른쪽에 서 있는 자가 답했다.

 

“우리는 쌍무혼(雙武魂)이오. 나는 도혼, 이분은 내 형님이신 검혼. 우리는 천주님의 명령을 받고 령주를 돕기 위해 따라온 것이오.”

 

쌍무혼. 쌍둥이인 그들은 열두 명의 망혼 중 은양과 함께 최강의 고수로 비밀리에 천주를 호위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풍천은 그들의 신분이 뭐든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냥 돌아가쇼. 필요 없으니까.”

 

“우리도 이곳에 남아서 천주님을 지키고 싶소. 하지만 명이 떨어진 이상 이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해해주시오.”

 

“그럼 더욱더 따라올 필요 없수. 그리고 천외천과의 관계도 오늘로서 끝낼 생각이니까 가서 그렇게 말하쇼.”

 

“설마 령주도 본천의 사람이란 걸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이제 단천무령주의 지위도 내던질 거라니까?”

 

“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오. 령주가 정말 사공정이라는 분의 아들이라면, 결국 본천 사공가의 종손이라는 말이 아니오?”

 

풍천은 도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사공가의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런데 사공가의 사람일 뿐만 아니라 종손이라니.

 

‘빌어먹을.’

 

하지만 그는 그들과의 관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종손이라는 말을 듣자 더 화가 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바라만 봤던 사람들과는 아는 척도 하기 싫수. 그러니 내 앞에서 사공가니 뭐니 그딴 이야기 하지 마쇼.”

 

이번에는 왼쪽에 서 있는 검혼이 말했다.

 

“사대가문에 속했던 사공가가 왜 몰락했는지 알고 하는 소리요?”

 

얼굴이 거의 같은 데다 목소리까지 비슷해서 마치 한 사람이 말하는 것 같다.

 

풍천은 좌우를 번갈아 보고는 조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 종손인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대단한 노력이라도 했단 말입니까?”

 

“자세한 일은 우리도 잘 모르오. 어릴 적 일이기도 하고, 천상궁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하지만 천주님의 친구이셨던 사공진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일어난 일은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소. 당시 천주님의 결정에 반발한 사공가는 그 일로 인해서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 채 문을 걸어 닫고 십여 년 전까지 천주님과 완전히 등을 돌리고 살았소. 그 바람에 부친께서 부인과 자결하셨을 때도 손을 쓸 수가 없었소.”

 

그 말을 듣고서야 풍천은 사공가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 조부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영향이 부모님에게까지 이어졌다는 것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방관이 당연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 그 후라도 따졌어야 할 거 아뇨?”

 

“그때는 그럴 만한 입장이 되지 않았소. 아니, 따지기는커녕 령주 아버님으로 인해서 또 다른 족쇄가 채워질까 봐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을 거요. 하지만 천주님께서는 그 일을 후회하시며 본천의 지엄한 율법마저 예외로 하고 사공가를 얽매고 있던 족쇄를 풀어주셨소. 하거늘 사공가에서 어찌 따질 수 있단 말이오?”

 

생각보다 사정이 복잡하다.

 

결국 모든 것은 조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 풍천은 도혼을 쏘아보며 그 일을 물어보았다.

 

“그 양반이 왜 조부님을 죽였는지 아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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