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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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18화
218화
공손량은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했다.
“나는 그 아이를 걸음마 때부터 키운 사부이기도 했지만, 부친을 죽인 원수이기도 했다. 그 아이는 친아버지처럼 의지했던 내가 원수임을 알고 갈등을 견디지 못했던 게야.”
풍천은 공손량을 노려보며 다그쳤다.
“그럼 어머니는 왜 함께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어린 아들을 남기고 함께 자결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공손량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일에 관해서는 입이 열 개여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
“아마…… 내가 최후통첩처럼 보낸 서신 때문에 함께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정아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아주 격한 어조로 글을 써 보냈으니까.”
돌아오지 않으면 주위의 모두를 용서치 않겠다고 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풍천의 어머니는 천외천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자식을 빼돌린 후 남편과 함께 죽음을 택한 것이다.
공손량은 그걸 알기에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네 부모의 죽음은 모두 내 잘못이다. 그러니 죄를 묻고 싶거든, 언제든 내 목숨을 가져가도록 해라.”
양곽연이 번쩍 고개를 들더니 무릎걸음으로 다가가서 풍천의 앞을 막으며 두 팔을 벌렸다.
“안 돼! 차라리 나를 죽여라!”
풍천의 몸에서 은은한 벽광이 뿜어졌다.
앞을 막았던 양곽연의 몸이 한쪽으로 주르륵 밀려났다.
“기억을 봉인당한 채, 부모님의 얼굴도 모르고 살아야 했던 아이의 마음을 아십니까? 그토록 원했던 부모님에 대한 소식을 알았는데, 두 분이 자결했다는 말을 들어야만 하는 제 마음을 당신은 아시냔 말입니다!”
풍천은 한 맺힌 말을 씹어 뱉으며 손을 뻗었다.
“대답해 봐요!”
찰나였다. 쭉 뻗은 풍천의 두 손에서 뇌전이 튀어나갔다.
“안 돼에에에!”
한쪽으로 밀려난 양곽연이 대경해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가 어찌할 새도 없이, 시퍼런 뇌전은 삼 장의 거리를 일수유의 순간에 좁히고 공손량을 덮쳤다.
쩌저적!
일순간, 만근 바위도 관통할 위력의 뇌전이 공손량의 양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스르르르.
뒤늦게 공손량이 앉아 있는 커다란 의자의 양쪽 어깨 부위가 먼지처럼 부서져서 흘러내렸다.
격정과 불안감이 뒤범벅된 암울한 고요 속에서 공손량은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풍천은 목숨을 포기한 듯한 그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죽이고 싶습니다. 정말 미치도록, 죽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돌아가신 부모님이 원하시지 않을 것 같군요.”
가까스로 몇 마디 내뱉은 그는 고개를 쳐들고 허공을 올려다봤다.
끝내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버지, 어머니. 바보같이 왜 목숨을 끊으셨습니까! 차라리 다른 곳으로 멀리 도망이라도 치지 그러셨습니까? 바봅니다. 두 분은 정말 바봅니다.’
그때 공손량이 눈을 떴다.
“미안하구나.”
풍천은 공손량을 쳐다보지도 않고 홱 몸을 돌렸다.
그래도 공손량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정아 부부의 위패는 선암봉 아래의 승령당에 있다.”
풍천이 멈칫하며 주먹을 움켜쥐자 양곽연이 후다닥 일어나더니 풍천을 재촉했다.
“내가 안내해줄 테니 가세.”
공손량은 풍천이 양곽연에게 떠밀리다시피 밖으로 나간 후에야 허리를 숙였다.
“콜록, 콜록. 정말…… 무서운 기운이로다.”
그때였다. 두 사람이 천장에서 내려오더니 공손량의 좌우로 내려섰다.
그들은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는데, 쌍둥이처럼 얼굴과 몸집이 거의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천주, 왜 말리셨습니까?”
그들은 좀 전에 풍천이 공손량을 다그칠 때 공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손량이 전음으로, 설령 자신이 죽어도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서 꼼짝을 못 했던 것이다.
공손량은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아내고는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라.”
“천주…….”
“그 정도입니까?”
“그는 내가 절정기의 상태였어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안휘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듣고도 설마 했거늘, 소문보다 더 강한 것 같아. 콜록, 콜록. 어쩌면 그래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부족함을 아쉬워했는데, 그라면 혼자서 열 명의 몫을 할 수 있을 게야.”
“그가 도와주겠습니까?”
“다행히 그는 무헌이를 싫어하지 않는다. 무헌이라면 그를 움직일 수 있을 거야.”
공손량은 숨을 몇 번 들이쉬며 충격을 받은 몸을 진정시키고 나직이 입을 열어 명을 내렸다.
“이제부터 너희 둘은 대풍을 따라가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천주, 저희는 천주의 안전을 보호해야…….”
“명령에 따르도록 해라. 이곳은 수천대와 남은 장로들만 있어도 족해. 그러니 너희들은 대풍을 따라가서 본천이 강호에 잘못 뿌린 씨앗을 거두는 데 힘을 보태도록 해라.”
4
선암봉은 불귀곡 서편에 있는 거대한 바위산이었다.
산 아래에는 남쪽을 향한 전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불귀곡의 사자를 위한 사당, 승령당(昇靈堂)이었다.
양곽연은 수천 개의 위패 중 사공정과 송화연의 위패를 곧바로 찾아냈다.
위패 앞에 무릎을 꿇은 풍천은 먹먹한 가슴으로 눈물을 흘렸다.
‘보고 싶었는데, 정말로 보고 싶었는데…….’
자식의 기억을 봉인해서 떠나보냈을 때 사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토록 가슴 아픈 사연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였다.
‘제가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버지, 어머니.’
승령당까지 오면서 양곽연에게 지난날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적, 아버지는 공손량을 친부처럼 따랐다고 했다. 공손량 역시 아버지를 친아들과 다름없이 대했고.
하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손량을 원망하기보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신세를 한탄하며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자결에 충격을 받은 공손량은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사공정 부부에 대한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는 낙양에서 살았던 오 년의 세월이 가장 행복했다고 했네. 그리고 삼십 년 동안 누릴 행복을 모두 누렸으니 아쉬울 것 없다고 했지. 그때 그의 마음을 눈치챘어야 하는데…….”
뒤에 서 있던 양곽연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판단을 잘못 내려서 그리되기라도 한 듯 후회가 역력한 말투였다.
풍천은 그래도 양곽연 덕분에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차마 그에게는 화를 내지 못했다.
“양 대주님은 미안해할 것 없수.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도와줬잖수.”
그런데 그때, 양곽연이 풍천을 지그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한 가지 해줄 말이 있네.”
“뭔데요?”
“어릴 때만 해도 사공 형은 부모님의 일에 대해서 일절 모르고 있었네. 천주님이 철저히 감추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누가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몰래 알려주기라도 했다는 거요?”
“바로 그거네.”
풍천은 고개를 돌려서 양곽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말을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양곽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오랜 세월 가슴 속에 묻혀 있던 말을 꺼냈다. 사실 그가 안내해주겠다며 나선 것도 그 말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천주를 친부처럼 모시던 사공 형의 행동이 갑자기 변한 것은 어느 한 사람을 만난 후부터네.”
풍천의 눈빛이 무저동처럼 깊이를 알 수 없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아버님이 누군가를 만나서 조부님에 대한 말을 들었고, 그래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말이요?”
“우연히 두 사람이 만나는 걸 봤네. 당시 사공 형의 반쯤 넋이 빠진 표정을 보고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그냥 보고 지나쳤지. 그런데 며칠 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사공 형이 갑자기 불귀곡을 뛰쳐나가더군.”
“사실을 알려준 걸 잘못이라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에 따라 문제가 달라지겠지.”
그 말에서 뭔가를 느낀 풍천은 이마를 골 깊게 찌푸렸다.
“설마 대공이……?”
양곽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공이었네. 당시 사공 형의 천재성은 모두가 놀랄 정도였지. 오죽했으면 천주께서 가끔씩 대공께 이런 말을 했네. ‘네가 게을리해서 정아에게 뒤처지면 본천의 다음 대 주인은 사공씨가 맡게 될 것이다.’라고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대공이 후계자의 위치를 위협받으니까, 아버님을 쫓아내기 위해서 진실을 말해주었다는 거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풍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저도 대공이 싫습니다. 대공의 야망을 무너뜨릴 생각도 가지고 있죠. 하지만 냉정히 따졌을 때, 그가 아버님께 진실을 알려준 것은 죄라 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오히려 부모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알려줬으니 은혜를 입었다는 생각마저 할 수도 있었다.
양곽연도 모르지 않았다. 문제는 그 일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가 천주님의 명을 받고 낙양으로 갔을 때, 자네 아버님은 이미 대공이 보낸 사람을 만난 후였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그때 자결을 결심한 것 같더군.”
대공의 말이 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말.
그러잖아도 부모님이 지나치게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는데, 거기에도 어떤 이유가 있는 듯하다.
풍천은 이를 악물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대공이 직접 부모님을 죽이진 않았다 해도 자결이라는 외길로 내몬 것만큼은 분명했다.
“후, 후후후후, 그러고 보니 대공과는 처음부터 악연이었나 보군요.”
묘했다. 비록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분노할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오히려 가라앉았다.
‘아버님이 정말 그렇게 똑똑한 분이었다면 대공의 뜻을 몰랐을 리 없어. 무턱대고 대공이 말하는 대로 움직였을 분이 아니야. 하지만 누구든, 부모님의 죽음에 티끌만 한 영향이라도 미친 사람은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풍천은 몸을 일으켜 제단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제단에 있는 위패를 들어냈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좋은 곳으로 모셔야죠. 이곳에 계속 놔둘 수는 없잖습니까?”
조부의 위패가 있는 백마사라면 아버지와 어머니도 좋아할 것 같다.
양곽연은 풍천의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겠군. 천주께서도 승낙하실 거네.”
무심코 내뱉은 그의 말에 풍천의 눈썹이 역팔자로 꺾였다.
“승낙? 부모님의 위패를 모셔가는데 내가 왜 그 양반의 승낙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 양반이 승낙하지 않아도 모셔갈 거요. 어디 막으려면 막아보라죠!”
자신의 말이 풍천의 성질을 건드렸다는 걸 안 양곽연은 머쓱한 표정으로 재빨리 말을 돌렸다.
“잠깐만 기다리게. 내가 위패를 넣을 수 있는 상자와 보자기를 구해오겠네.”
풍천은 위패가 든 상자를 양곽연이 가져온 봇짐에 넣어서 어깨에 걸쳤다.
그때 양곽연이 말했다.
“이향은 돌아오지 않았네. 은양이 보호하고 있으니 별걱정은 하지 않네만,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군.”
공손이향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은양은 누구지?
“연락도 없었습니까?”
“작년 가을에 한 번 서신이 왔었네. 아무 일 없으니 걱정 말라더군.”
“어디에 있다는 말은 하지 않던가요?”
“상구 어디라던데…… 혹시 어딘지 아나?”
상구라면 천풍장에 가 있는 것 같다.
풍천은 그녀가 자신의 집에 있다는 말을 하지 않고 대충 말했다. 그 말을 하면 또 자신을 의심하면서 볶아댈지 몰랐다.
“제가 아는 곳에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럼 부탁 하나 하세. 그곳에 가서 그 아이를 만나거든, 마음껏 구경하고 돌아오라고 하게. 생각해보니 이곳에 있는 것만이 최선은 아닌 것 같군.”
힐끔 양곽연을 흘겨본 풍천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죠.”
승령당을 나선 풍천은 불귀곡을 바로 떠나려다가 발길을 무심헌으로 돌렸다.
공손천우가 백초령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신예가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무심헌에서 살고 있다 하지 않던가?
그로서는 공손량이 원망스럽다 해서 신예까지 미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무심헌에 도착했을 때 신예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방과 신예의 방도 자물쇠로 잠겨 있었고.
그는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방문 앞에 서서 망설였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