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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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17화
217화
잠시 후.
탁능한은 수하의 보고를 듣고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떴다.
“뭐야? 육안의 대월산장(大月山莊)이 무너졌다고?”
“예, 성주!”
육안 일대에서 가장 큰 장원인 대월산장은 남단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회남까지 하루가 걸리는 거리. 곽산에 있는 신마성의 북진을 막는 최전선인 것이다.
하거늘 죽은 듯이 곽산에 웅크리고 있던 신마성이 대월산장을 공격했다고 하자, 탁능한은 눈을 부라리며 다그쳤다.
“피해 정도는?”
“이백 명 정도 살아남았는데, 일단 육안에서 오십 리 떨어진 철목보(鐵木堡)로 후퇴했습니다.”
“적들의 수장은 누구라 하더냐?”
“혁련후와 삼령신마 악초당, 무영신마 염사진, 그리고 북천맹 쪽에서는 북성마검 연좌평이 놈들을 이끌고 있다고 합니다.”
쇳덩이처럼 얼굴이 굳은 탁능한은 상석에 앉아 있는 공손무백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공?”
말없이 상석에 앉아 있던 공손무백이 무채색의 눈빛으로 탁능한을 응시했다.
“왜 그들이 조용히 있다가 대월산장을 공격했을 거라 보는가?”
탁능한은 별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저희가 워낙 강하게 압박하니까, 곽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공손무백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이 짧아.’
탁능한은 백무천과 비교가 되었다. 그였다면 저런 식으로 답하지 않을 것이거늘.
하지만 머리야 어쨌든 그는 자신에게 구룡회를 바친 훌륭한 조력자가 아닌가.
공손무백은 탁능한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되물었다.
“단순히 그것뿐일까?”
“하면……?”
공손무백은 답을 미루고 손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톡톡 치며 냉소를 지었다.
가을부터 겨울을 거쳐 봄까지, 크고 작은 싸움이 숱하게 벌여졌다. 그러니 신마성도 천룡회, 정확히는 천외천의 강력한 힘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이 단순하게 세력만 넓히려 했다면 굳이 피해를 감수하면서 육안을 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경천산장의 남쪽이 완전히 무너졌으니 하남 쪽이나, 하다못해 호북을 먼저 공격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그게 그가 은근히 바랐던 바였다.
그래야 신검문과 검각, 경천산장이 천룡회에 손을 벌릴 것이고, 천외천의 고집불통들이 더 이상 눈치만 보고 있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육안을 먼저 공격해서 천룡회를 자극하고 있다.
달려들기를 바라며 손을 들어 까딱거리는 것처럼.
공손무백은 전쟁이 왜 길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깨닫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혁련궁이 우리를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신마성이 저주에 둥지를 틀고 머뭇거린 것도, 천혈궁과 합류한 후 전격적인 공격을 하지 않은 것도 조금은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천외천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가정을 한다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
‘우리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서 장기전을 펼쳤던 건가?’
그렇다면 그들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봐야 했다. 천외천의 전력 중 칠 할 이상이 밖으로 드러났으니까.
게다가 자신들을 이용해서 북천맹과 서천무련의 힘마저 끌어들인 상태가 아닌가.
생각을 정리한 공손무백의 두 눈에서 은은한 분노가 일렁였다.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
혁련궁은 기다리는 자가 아니거늘. 그런 자가 소극적으로 움직이며 기다렸을 때 알았어야 하거늘!
어쩌면 부친의 말이 옳았을지 몰랐다.
천외천을 드러내지 않고 구룡회와 천의맹을 돕는 선에서 신마성을 쳤다면, 북천맹과 서천무련으로선 움직일 명분이 없었을 테니까.
‘좀 더 신중하게 움직였어야 했나?’
하지만 이미 지난 일.
자책하기에는 너무 앞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자책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하늘은 모든 것이 옳아야 하니까.
‘막으면 무너뜨리면 될 일. 혁련궁, 아직 웃지 마라. 이제부터는 나 역시 세상의 눈을 생각지 않을 것이니까.’
공손무백은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전각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은 우리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서 대월산장을 공격했을 게야. 나는 그들의 자신감을 철저히 뭉개서, 다시는 마가 활개치지 않는 세상을 만들 것이네!”
탁능한은 감동한 듯 벌떡 일어나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외쳤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회주!”
공손무백은 형형한 신광을 뿜어내며 탁능한을 내려다보았다.
“최고의 정예로 천룡단을 출정시킬 것이니, 그대가 그들을 이끌고 철목보로 가서 놈들로 하여금 한 치도 더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명대로 행하겠사옵니다, 회주!”
그때였다. 한쪽에 서 있던 공손선우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 저도 가보겠습니다.”
“네가?”
“혁련후가 제법 뛰어난 자라 하더군요. 가서 어떤 자인지 직접 알아볼 생각입니다.”
공손무백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본천의 무사들을 네가 이끌고 가서 탁 성주를 도와주도록 해라.”
3
풍천은 앞만 보고 달렸다.
세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아버지가 두려워했던 것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천외천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왜 천외천을 두려워한 걸까?
어떻게 천외천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안휘의 전쟁도, 강호의 흥망도 남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왜 불귀곡으로 가셨단 말인가?’
풍천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사공정. 천외천의 사대가문이었다가 지금은 쇠락한 사공가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낙양에서 살았고, 다시 불귀곡으로 돌아간 후 돌아오지 않은 걸까?
왜 아버지는 자신을 멀리 떠나보낸 걸까? 그것도 기억까지 봉인해서.
이를 악문 풍천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중천에 반달이 걸려 있었다.
반쪽만 보이는 달이 마치 자신의 신세처럼 처량하기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은 반쪽의 사실을 알아내고 말겠어.’
자신의 모든 힘을 다 개방하더라도. 불귀곡에 시뻘건 핏물이 흐르는 한이 있어도!
다음 날 사시(巳時; 오전9시∼11시) 무렵.
불귀곡에 도착한 풍천은 안개 속의 진세를 뚫고 곡 안으로 들어갔다.
“정지! 누구냐?”
수천대원 넷이 앞을 막았다.
풍천은 품속에서 패를 꺼내 내밀었다. 령주패가 아닌, 그가 가지고 있는 일반 단천무령의 신분패 중 하나였다.
“단천무령 풍천이다. 천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왔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수천대 무사들은 단천무령이라는 말에 놀라면서도 황급히 그의 앞을 막아섰다.
“잠깐 멈추시오!”
“급하니까 비켜!”
냉랭히 소리친 풍천은 손을 휘둘러서 수천대 무사 둘을 한쪽으로 밀쳐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이 앞을 막을 새도 없이 곡 안으로 몸을 날렸다. 이전에 기본 이치는 알아놓은 터라 진세는 더 이상 그의 앞을 막지 못했다.
양곽연은 소란스런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빠르게 다가오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가오는 자 뒤쪽에서는 십여 명이 쫓아오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수천대의 무사들이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지?’
그는 의아해하면서도 날듯이 달려오는 풍천의 앞을 막았다.
“누군데 이리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풍천은 속도를 조금 늦추고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천주님, 안에 계쇼?”
많이 들어본 말투, 목소리다.
양곽연은 바로 대답을 못 하고 어깨를 후드득 털었다.
“너는 누구지?”
“대충 목소리 들었으면 알 거 아뇨? 있어요, 없어요?”
양곽연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
풍천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몸이 반쯤 굳어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양곽연의 옆을 휭 지나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양곽연은 부리나케 풍천을 쫓아갔다. 그리고 고개만 뒤로 돌린 채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모두 돌아가서 볼일들 봐!”
공손량은 천상궁의 내실 깊숙한 곳에 있었는데, 일 년 전보다 많이 늙은 모습이었다.
풍천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얼굴이 달라졌음에도 풍천의 정체를 바로 눈치채고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허허허허, 살아 있었구나.”
“염라대왕이 절 싫어하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살아 있었다니 정말 다행이야.”
“글쎄요. 다행일지 아닐지는 두고 봐야 알겠죠.”
왠지 삐딱한 풍천의 말투에 양곽연이 발끈해서 한마디 했다.
“뭐 잘못 먹었나? 어디서 감히 천주께 그따위 말툰가?”
“그럴 만하니까 하는 거 아뇨?”
“뭐야? 네가 진정……!”
양곽연이 눈을 부라리자 공손량이 말렸다.
“곽연.”
“천주님, 이놈이 간덩이만 부어서 돌아왔나 봅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질 않느냐? 일단 말을 들어보자. 그래, 그럴 만한 이유란 게 뭐더냐? 무백에게 형편없이 밀려서 구석에 처박힌 이 늙은이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풍천은 숨을 들이켜고 공손량을 직시했다.
“제가 찾아온 것은 이곳의 일 때문도 아니고, 강호의 일 때문도 아닙니다. 지금 제 마음은 천외천이 망하든, 강호가 망하든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공손량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풍천의 말투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말해봐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풍천은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공손량 앞에 두루마리를 폈다.
촤르르륵.
두루마리가 펴지며 그림이 드러났다.
“이 그림,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본곡을 그린 것이군.”
“아래쪽에 그려진 두 사람이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그림에는 불귀곡만 그려져 있는 게 아니었다. 한 청년이 불귀곡 안에서 검무를 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한 사람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손량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 옆에 써진 두 줄의 글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 그곳이 나에게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었으니, 사부여, 저는 어찌해야 하옵니까?
풍천은 그림을 내민 채 공손량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지만, 극한의 인내로 꾹 참았다.
한참 만에 공손량의 입이 열리고,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지, 알아. 내가 나를 왜 모르겠느냐.”
“검무를 추는 사람은 누굽니까?”
“그 청년은…… 정아다. 내 제자…….”
풍천은 더 참지 못하고 악을 쓰듯이 물었다.
“왜, 왜 제자가 사부를 두려워했습니까? 왜 사라져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까? 그림의 청년은, 제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손량은 잠깐 사이 백 년은 늙은 듯 멍한 표정으로 풍천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지금 아버지라 했느냐? 정아에게 아들이 있었다고?”
“대답해주시죠!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 떻, 게, 된, 겁, 니, 까?”
공손량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양곽연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털썩.
양곽연이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제가 천주님을 속였사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왜 말하지 않았느냐, 곽연?”
“마지막 부탁이었사옵니다. 천주께서 아시면 또 아들을 불귀곡으로 데려가실 거라며, 찾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보낼 것이니 굳이 찾으려 하지 말라고…… 죽여주시옵소서!”
당시 사공정 부부를 데려오기 위해 낙양으로 간 사람이 바로 양곽연이었다.
그런데 그가 사공정의 부탁을 받고 아들의 존재를 숨겼던 것이다.
“허, 허, 허, 허. 그랬던 거였군. 어쩐지 그 아이들이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끊는다 했더니…… 이 세상에 아들이 남아 있기에 마음이 편했던 거였어.”
풍천은 공손량의 입에서 독백처럼 흘러나오는 말을 듣고 기운이 쭉 빠졌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결하셨다고요?”
“모두 나 때문이다. 나는 그 아이를 내 곁에 두고 싶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간 그 아이를 데려왔지.”
“그런데 왜, 왜 자결하신 겁니까?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