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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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14화
214화
제6장. 나무에 새긴 이름은 그대로인데
1
다음 날 아침. 풍천은 석초산을 만났다.
“짧으면 열흘, 길면 보름 정도 어딜 좀 다녀와야겠수.”
본래 자유롭게 움직여도 된다는 백무천의 허락이 있었지만, 낙양에 가는 것은 개인적인 일. 석초산에게 알려놓아야 말썽이 없을 듯했다.
석초산으로선 전쟁 와중에 믿을 수 있는 고수가 열흘 이상 자리를 비운다는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어딜 가는데 열흘 이상 걸린다는 건가?”
“좀 멉니다.”
“꼭 지금 가야 하나?”
풍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전쟁의 향배보다, 공손선우에 대한 복수보다 부모님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게 더 중요했다.
석초산에게 허락을 구한 풍천은 곧장 북쪽으로 달려갔다.
낙양까지 이천 리 길. 풍천에게는 그 길이 이백만 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그런데 낙양이 가까워질수록 반가움보다 두려움이 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낙양이 저만치 보이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흔들리지 말자, 풍천. 너는 남자잖아?’
풍천은 낙양으로 들어가지 않고 동쪽으로 꺾어져서 백마사로 향했다. 처음 가보는 길이었지만, 근처에 사는 사람치고 백마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백마사는 북쪽으로 망산(望山)을 이고, 남쪽으로는 낙하(落河)를 바라보며 지어져 있었다.
백마사에 도착한 풍천은 입구에서부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문 앞에 돌로 만든 백마가 있었다. 기억에 떠올랐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백마의 머리에서 등까지 손으로 쓰다듬던 풍천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쏟아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수군거렸지만 그는 조용히 웃으며 백마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겼다.
아버지가 태워줬던 그날 그때처럼.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그는 제운탑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못가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동남쪽으로 걸어가니 저만치 탑이 보였다.
풍천은 탑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걸음걸음마다 당시의 일이 아련히 떠올랐다.
아버지는 왼손을 잡고, 어머니는 오른손을 잡고…….
입가에는 웃음이 걸리고,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닦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아버지, 어머니…….’
탑 앞에 도착한 풍천은 탑을 돌며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웃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바로 앞에 서 있는 듯했다.
‘여기서 날 숙부에게 맡겼던 것 같아.’
아버지는 처연한 표정으로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울음을 겨우 참으며 잘 살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며 정신을 잃을 때쯤 숙부가 자신을 끌어안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촌락이었다.
그 후로 숙부와 함께 한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상구의 객잔 처마 밑에서 숙부와 헤어졌다.
숙부가 자신을 그곳에 고의로 놔두고 떠나간 것이다.
솔직히 지금은 그것도 의문이었다.
숙부는 혹시 사부님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라면 어떻게 사부님이 단골로 다니시던 그 객잔 앞에 자신을 놔두고 다른 곳에 가지 말라고 하신 걸까?
하지만 그러한 의문은 이제 와서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부모님에 대한 것이었다.
‘부모님은 왜 나를 숙부에게 맡긴 걸까? 왜 돌아오지 못하게 기억을 봉인한 걸까?’
풍천은 걸음을 멈추고 탑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숙부도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듯했다.
자신을 떠나보낸 것도 그 일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하나 알아보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백마사를 한 시진 정도 돌아보고 밖으로 나온 풍천은 기억을 하나하나 되살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십 년 전의 기억, 그것도 네다섯 살 때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당시의 상황을 확실하게 떠올릴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나마 백마사를 떠올린 것만도 천행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어릴 때라 해도 자주 봤던 것은 기억 저편 어딘가에 쌓여 있을 터.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살펴보다 보면 쌓여 있는 기억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풍천은 낙양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갈지자로 오갔다. 하지만 밤이 깊어가도록 어릴 적의 기억을 자극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후우, 실망하지 말자. 이제 겨우 삼 할 정도밖에 안 찾아봤는데 뭐.’
급한 마음을 억지로 다스린 그는 객잔에 방을 얻었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방에 들어간 그는 차를 마시며 품속에서 부모님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꺼냈다.
그림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고요히 미소가 번졌다.
‘아버지도 나만큼이나 잘생겼단 말이야. 어머니는 초령이보다 딱 세 배는 아름답고. 아마 낙양 제일의 미남미녀 부부였을 거야.’
그때였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른 풍천은 찻잔을 입술에 댄 채 몸이 굳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런 멍청이!’
찻잔을 단숨에 비운 그는 후다닥 그림을 접어서 품속에 집어넣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백마사로 달려갔다.
3
백마사는 문이 닫혀 있었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아침까지 기다리기에는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담을 넘은 그는 백마사 안을 돌아다니며 나이 든 스님을 찾았다.
천왕전과 대불전을 지나 대웅전 쪽으로 걸어가는데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스님이 보였다.
그는 무작정 스님의 앞을 막아섰다.
“스님, 뭐 좀 물어보죠.”
사십 대로 보이는 중년승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시주, 밤이 깊었는데 아직 안 나가셨습니까? 본사는 유시가 넘으면 향객을 받지 않습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다시 왔습니다. 스님은 이곳에 계신 지 얼마나 되셨죠?”
“십오 년 정도 됐습니다만. 방장스님께서 아시면 아랫사람만 혼납니다. 제가 문을 열어드릴 테니 어서 나가십시오.”
그냥 나갈 거라면 담을 넘어서 들어오지도 않았다.
풍천은 끄떡도 하지 않고 다시 물어보았다.
“이곳에 계신 지 이십 년 이상 되신 스님을 소개해주십쇼. 기왕이면 향객들을 많이 상대하는 분일수록 좋습니다. 부탁합니다.”
그러고는 중년승의 손을 붙잡고 사정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글쎄, 지금은 만날 수가…….”
목이 떨어져도 안 될 것처럼 말하던 중년승은 말을 흐리며 힐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아서 하얗게 빛나는 은자가 손 안에 쥐어져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중년승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는 헛기침을 했다.
“험험, 그토록 급한 일이라면 부처님께서도 외면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삼십 년 동안 향객들을 맞이하며 살아오신 스님께 안내해드리지요.”
중년승은 풍천을 구석진 곳의 요사채로 데려갔다.
그는 방문을 툭툭 두드리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종진 사숙, 주무십니까? 저 오정입니다.”
“죽을 날 얼마 남지 않은 늙은 중이 벌써 자면 되겠는가? 무슨 일인데 이 밤에 찾아왔나?”
“잠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중년승은 문을 열고 풍천에게 눈짓을 했다.
방 안에는 육순가량의 노승이 혼자서 불경을 읽고 있었다.
노승은 오정이 풍천을 데리고 들어오자 주름진 눈꺼풀을 껌벅거리며 쳐다보았다.
“그 시주는 뉘신가?”
“물어볼 게 있다 해서 모시고 왔습니다.”
“알고자 하는 게 불법에 대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이 늙은 중에게 뭘 물어보겠다는 거지?”
풍천은 노승 앞으로 가서 품속에 손을 넣어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노승 앞의 서탁에 펼쳐놓고 노승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 그림을 한번 보시지요.”
노승은 눈을 내리고 서탁 위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허어, 정말 잘 어울리는 부부구먼.”
“이십 년 전의 얼굴입니다.”
“이십 년 전?”
“잘 보십시오. 이십 년 전에 가끔 백마사에 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정도 모습을 지닌 분이라면 혹시 기억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때 노승이 그림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흐으으음,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구먼.”
풍천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 소리에 노승이 깜짝 놀라서 기억이 흐려질까 두려울 정도였다.
“아시는 얼굴입니까?”
“정말 천상에서 내려온 것처럼 아름다운 부부였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어. 맞아, 그게 소시주가 말한 이십 년쯤 된 것 같구먼.”
자신을 떠나보낸 후부터 나타나지 않았다고?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를 두려워했던 두 분이 아니던가?
“정말 다시는 오지 않았습니까?”
“한두 해야 내가 미처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이라면 못 볼 리가 없지.”
“어디 사시는 분들이신지 아십니까?”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구먼. 별다른 봇짐도 없이 걸어서 오는 걸 보면 멀리 사는 사람들 같진 않던데 말이야.”
“말을 나눠보신 적은 없습니까? 기억나는 말이라도 있으면 말씀해주시지요.”
한참을 생각해보던 노승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나지 않는군. 인사하는 것 외에는 별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네. 이름도 모르고…….”
결국 여기서 또 막히는 건가?
낙담한 풍천은 그림을 조심스럽게 접어서 품속에 넣었다.
그나마 사는 곳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안 것만도 다행이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노스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인연을 찾는 것 같은데, 많은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이.”
“아닙니다. 그 정도만으로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풍천은 노승을 향해 합장을 하고 몸을 돌렸다.
그때 노승이 말했다.
“아, 방장을 만나 보시게나.”
“방장스님을요?”
“그 부부가 지금은 방장이 된 종화 사형을 만나서 뭔가를 부탁하는 것 같았네.”
부탁을 할 정도면 좀 더 많은 것을 알지도 모른다.
다시 희망의 불씨를 살린 풍천은 격동을 누르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호숫가에 지어진 방장원은 세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정은 풍천을 방장원이 보이는 곳까지만 데려다 주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곳이 방장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죄송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소시주 혼자서 가시구려. 그리고 빈승에 대해선 말씀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풍천은 오정의 사정을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출입금지 시간에 외부인을 방장원까지 데려온 것만 해도 오정에게는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죠.”
그러고는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오정을 뒤로한 채 방장원을 향해 걸어갔다.
방장원 주위는 오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바람 소리만이 들렸다. 저 아래쪽에 있는 대나무밭 때문인지 소리가 유난히 스산했다.
그런데 방장원의 정문을 십여 장 남겨놓고 풍천의 눈빛이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방장원 안에서 삼엄한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그것도 절정의 고수들이 지녔을 법한 강력한 기운이.
문제는 그 기운의 성질이 불법을 바탕으로 한 승려들의 기운과 다르다는 점이었다.
물론 백마사의 승려라 해서 불법과 상관없는 무공을 익히지 말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방장원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결코 일반 승려들에게서 흘러나올 만한 게 아니었다. 강한 기운임에도 워낙 은밀해서, 바람이 그쪽에서 불어오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풍천은 방장원의 입구가 가까워지자 환신술을 펼쳐서 움직였다.
바람에 몸을 숨기고 안으로 들어가자 기운이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느껴지는 기운은 모두 세 줄기. 하나같이 완숙한 절정의 경지에 이른 기운이었다. 그중 한둘은 절대지경에 근접한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누가 이런 기운을 흘려내는 걸까?
환신술을 펼쳐서 건물로 접근한 풍천은 처마에 몸을 숨기고 귀를 기울였다.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소리의 외부유출을 막기 위해 공력으로 제어했지만, 청력을 극대화시킨 풍천의 귀까지 막지는 못했다.
“……상황이 그러니 일단 맹 내에 있는 자들부터 처리할 생각입니다.”
“반발이 많을 것이오. 괜찮겠소?”
“각오하고 있습니다, 대선사. 어차피 그들을 처리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해온 일이 공염불이 될 테니까요.”
“나무아미타불. 그건 그렇지요. 서문 시주도 같은 생각이시오?”
“정의의 탈을 쓰고 숨어 있는 자들을 잡아내는 일입니다. 저는 무조건 찬성입니다.”
“흐음, 그럼 이야기를 더 길게 나눌 것도 없을 것 같구려. 미력한 힘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빈승도 한팔 거들겠소이다. 두 분 시주는 돌아가서 공각에게…….”
풍천은 ‘공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이마를 좁혔다.
‘응? 그 산적 같은 땡초 스님과 관계된 일인가?’
바로 그때, 방장원으로 불어오는 바람에서 섬뜩할 정도로 예리한 기운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