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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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5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09화
209화
사마공유가 움직일 수 없게 된 이상 그를 대신해서 신검문을 이끌 사람이 있어야 했다.
백무천도 모르지 않기에 잠시 생각하더니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무래도 청백을 내세우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군.”
화청백이라면 충분히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신검문 내부가 아니라 천외천의 반응이었다.
“공손무백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내가 나서는 것보다는 나을 거네. 그는 자신을 거부한 나를 싫어하니까.”
“이곳에 있는 천외천 사람들은 신검문에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죠? 그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요? 비록 싸우다 죽었긴 해도 용후정 부자가 죽었으니 뭔가 꼬투리를 잡을 것 같은데…….”
“예상했던 것보다는 조용히 지내고 있네. 간혹 사소한 마찰이 있긴 했지만 공손천우가 나서서 해결했지. 이번에도 우리가 먼저 자극하지만 않으면, 그들은 크게 상관하지 않을 것 같아.”
‘자식, 초령이 아버지께 잘 보이려고 별짓 다했나 보군.’
풍천은 공손천우를 가볍게 짓밟았다.
“공손천우야 속셈이 있어서 그런 거겠죠. 초령이를 강제로 납치해서 혼인하려 했던 놈인데 좋은 뜻으로 그랬겠어요?”
그런데 의외로 백무천이 넌지시 공손천우의 편을 들었다.
“자기 말로는 초령이를 구하려고 어쩔 수 없이 납치했다고 하더군.”
“그런 마음으로 납치했으면 집으로 데려다 줘야지, 왜 천외천으로 데려갑니까?”
“당장 안전한 곳을 생각하다 보니 그랬다더군.”
‘그놈의 거짓말에 속지 마십쇼, 장인어른!’
살짝 핏대가 솟은 풍천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좌우간 그놈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백무천도 그쯤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알겠네. 사실 나도 그가 천외천의 사람이어서 완전히 믿고 있진 않았다네. 어쨌든 천외천은 본문의 정예를 죽인 자들 아닌가?”
그랬다. 지금은 비록 신마성의 위협 때문에 함께 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천외천은 신검문과 원수나 다름없었다.
‘설마 천외천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양반이 공손천우에게 초령이를 주지는 않겠지?’
내심 안도한 풍천은 보다 편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천외천 사람들 중 수장은 누굽니까?”
“공손문이란 사람이네.”
공손문이라면 은천단의 단주다. 천주의 사람.
그렇다면 신검문에 있는 사람들은 천주 쪽 사람들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용후정이 죽었는데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건가?’
설령 공손무백이 진실을 안다 해도, 신마성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무천을 다그쳐봐야 이익이 없다는 걸 모를 그가 아니었다.
욕망은 정보다 우선하는 법.
그는 죽은 사람에 대한 복수보다, 신검문이 자신의 그늘 아래 있다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들 중 공손무헌이란 사람은 없습니까?”
“그런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네.”
‘어디로 갔지?’
풍천이 눈살을 찌푸리자 백무천이 물었다.
“누군데 그러나?”
풍천은 공손무헌에 대해서 자신이 아는 만큼 말해주었다.
그가 공손무백의 동생이면서도 공손무백에 대해 가장 강력한 억지력을 지닌 자라는 걸.
백무천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눈을 가늘게 좁히고 말했다.
“그런 자가 있다면 언제 한번 만나보고 싶군.”
“천외천 사람들 중에선 그래도 생각이 트인 사람이죠. 그 사람이 있었으면 상황이 조금 더 나아질 텐데…… 별수 없죠. 제가 그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그래주겠나?”
공손천우에 대한 걱정을 저만치 던져버린 풍천은 가슴을 쭉 펴고서 자신 있게 말했다.
“사정이야 어쨌든 저도 신검문 비검당의 사조장 아닙니까? 당연히 문주님을 도와드려야죠. 하, 하, 하.”
백무천은 풍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부탁하네. 아무래도 본문이 안정되어야, 자네도 나중에 초령이를 데려갈 때 마음이 편할 것 아니겠나?”
굳이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풍천은 당장 달려가서 초령이를 데리고 떠날 것처럼 벌떡 일어나 힘차게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마십쇼!”
장인어른!
2
밤이 늦은 시각임에도 풍천은 천외천의 사람들을 만나러 갔다. 깊은 밤은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아주 알맞은 시간이었다.
천외천 사람들은 신검문 뒤쪽에 있는 건물 네 채로 된 별원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풍천이 별원으로 다가가자 갈의를 입은 무사 하나가 손을 들어 막았다.
“여긴 허락 없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오.”
“나는 신검문 비검당의 사조장이오. 이곳이 언제부터 금지가 되었는지 금시초문이군요.”
“이곳은 신검문주의 허락 하에 본천이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곳이오. 신검문 사람이 그것도 모르시오?”
“하, 하, 하. 임무 때문에 오랫동안 밖을 돌아다니다 오늘 돌아와서 잘 모르고 있었죠. 그런데 그 유명한 천외천의 사람들이 여기에 머물고 있었다니, 이거 이 기회에 한번 뵙고 싶군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허락 없이 못 들어간다고 했지, 허락이 떨어지면 들어갈 수도 있다는 말 아뇨? 안에다 한번 말씀드려보쇼. 설마 벌써 다 주무시는 건 아니겠죠?”
“글쎄, 안 된다니까.”
“거 이상한 사람이네. 한번 말이나 해보라니까요?”
갈의 무사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풍천을 살펴보았다.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은 표정이었다.
그때 전각의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무슨 일이오?”
그를 본 풍천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밖으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오지회의 첫째인 공손승이었다.
풍천은 갈의 무사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천외천의 대단한 분들을 한번 만나 보려 했더니 정말 어렵군요.”
갈의 무사가 눈을 치켜뜨고 풍천을 노려보았다.
“이자가 정말…….”
그런데 공손승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만나는 게 뭐 어렵겠소?”
“하, 하, 하.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이 사람은 말도 해보지 않고 말이야.”
풍천은 웃으며 갈의 무사를 흘겨보았다. 갈의 무사는 속이 끓었지만 공손승이 나선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공손승이라 하오.”
“신검문 비검당의 사조장 풍천입죠.”
“그래, 뭐가 궁금해서 본천의 사람을 만나려 한 것이오?”
“대화를 나누기에는 장소가 조금 그렇군요. 저쪽에 좋은 곳이 있는데, 우리 자리를 옮겨서 허심탄회하게 강호 젊은이들의 속마음을 이야기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손승은 물끄러미 풍천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자가 분명한데, 왠지 모르게 껄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겁이 나 그런 것처럼 보일 터. 신검문의 일개 조장에게 얕보이고 싶지 않은 그는 흔쾌히 풍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소, 갑시다.”
바로 그때 또 다른 방의 문이 열리고, 머리와 수염이 사자갈기처럼 뻗친 노인이 머리를 내밀었다. 다름 아닌 화문오였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스러우냐?”
공손승은 사실대로 말했다.
화문오는 방을 나오며 풍천을 바라보았다.
“그래? 킁, 나도 심심한데 같이 갈까? 여긴 늙은이도 몇 없는데 왜 이리 고리타분한 냄새가 나는지 원…….”
“장로님께서요?”
“왜, 나는 가면 안 되냐?”
풍천은 상대가 화문오인 걸 알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하, 하, 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젊은 사람의 이야기도 좋지만, 나이 드신 분의 경륜 있는 이야기도 아주 좋죠.”
“흠, 신검문의 젊은 놈 중에 언제 너 같은 놈이 있었지? 제법 싹수가 있어 보이는군.”
“가시죠, 어르신.”
풍천은 화문오와 공손승을 이끌고 정문으로 갔다.
방향이 정문인 것을 안 공손승이 이마를 찌푸리고 풍천을 바라보았다.
“어딜 가려는 거요?”
“기왕이면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 하죠. 저 앞쪽 마을에 대화하기 좋은 조용한 주루가 있는데. 왜요, 술 싫어하세요?”
“허락을 받지 못해서…….”
공손승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도 나가고는 싶은데, 허락을 받지 않고서 밖으로 나가는 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반면 화문오는 풍천의 의견에 대찬성이었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다. 보면 볼수록 괜찮은 놈이로구나. 이놈아, 내가 있는데 무슨 허락이 또 필요하단 말이냐?”
그건 그렇다. 화문오가 있는 이상 허락을 받은 거와 마찬가지다.
“알겠습니다, 장로님.”
풍천은 밝은 웃음을 지으며 정문으로 갔다.
정문을 지키던 두 명의 위사는 다가오는 세 사람을 보고는 서로의 눈치를 봤다.
상대는 신검문의 누구도 함부로 못 하는 천외천의 사람들이었다. 막았다가 일이 커지면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랐다.
풍천은 앞장서서 그들에게 다가가며 손을 흔들었다.
“두 분을 모시고 잠깐 나갔다 올 테니, 수고들 하쇼.”
두 위사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바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천외천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저기, 누구신지……?”
“임무 때문에 조금 오래 나갔다 왔더니, 내 얼굴을 벌써 잊었수? 나요, 나. 비검당 사조장.”
풍천은 씩 웃고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해져 있는 정문위사들 사이를 걸어갔다.
두 위사는 풍천이 화문오, 공손승과 함께 밖으로 나간 후에야 나직이 말했다.
“맞아, 비검당의 그 말썽꾸러기 조장이 분명해.”
“이봐, 풍 조장은 일 년 전에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서, 설마…… 귀신은 아니겠지?”
밖에 있던 두 위사도 잠시 후 그들과 비슷한 말을 하며 풍천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공손승은 위사들의 목소리를 듣고는 조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찝찝한 불안감이었다.
3
공손승이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은 것은 신검문에서 백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앞서 가는 풍천의 뒷모습이 언젠가 본 것처럼 느껴졌다. 불안감의 원천은 바로 거기서 출발한 것이었다.
“풍 조장, 혹시 언제 나하고 마주친 적 없소?”
풍천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느껴집니까?”
화문오도 주름이 가득한 이마를 잔뜩 찡그리고 풍천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너를 어디서 본 것 같구나.”
두 사람은 천외천에서 나온 지 일곱 달이 되었다. 신검문까지 오면서 많은 사람과 마주쳤고, 신검문에 도착해서도 적지 않은 사람과 만났다. 그러니 그리 느껴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랴.
하지만 풍천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것과는 또 달랐다.
풍천은 화문오와 공손승을 번갈아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얼굴도 다르고, 머리도 다르고, 몸도 조금 다른 것 같죠?”
사실이 그랬다. 그리고 그 말이 풍천의 입에서 나오자 자연스럽게 몸이 긴장되었다.
공손승이 먼저 물었다.
“당신은 누구지?”
“우리를 이곳까지 데려왔을 때는 뭔가 목적이 있을 것 같은데, 어디 주둥이를 놀려봐라.”
“저런, 저런. 아직도 생각이 안 나시나 보군요. 하긴, 얼굴이 확 달라지고 몸도 조금 달라졌으니 그럴 만도 하죠. 그래도 패한 것을 잊으며 안 되죠.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패한 것?”
“내가 네놈에게 패했다고? 이런 건방진 놈이!”
화문오는 풍천이 자신을 모욕했다 생각하는지 대뜸 노성을 내지르며 손을 뻗었다.
풍천은 몸을 두어 번 움직이는 것으로 가볍게 화문오의 공격을 피하고는 오히려 똥 뀐 놈이 성낸다는 듯 되받아쳤다.
“그럼 제가 거짓말이라도 했단 말입니까? 이거 약속을 어길 심본가 본데, 그러지 마쇼. 약속 어겨서 잘되는 사람,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봤수.”
화문오는 자신의 공격을 너무나 쉽게 피하는 풍천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이제 보니 보통 놈이 아니로구나. 좋다, 네놈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나를 설득시켜봐라.”
“거 그때나 지금이나 고집은 여전하시군요. 구정물통에서 나왔으면 고집도 좀 꺾을 줄 알아야 할 거 아뇨.”
“뭐라? 구정물통? 네놈이 진정…….”
화문오는 당장 풍천을 때려죽일 것처럼 소리치다 말고 멈칫했다.
그때 풍천이 말했다.
“전에 해결사한테 진 적 있어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