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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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4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07화
207화
처음서 끝까지 다 지켜본 풍천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백서령이 영호관에게 앙심을 품은 거야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형을 좋아했던 여자가 다른 사람을 위해 복수의 칼을 휘두르는 걸 보니 입맛이 씁쓸할 뿐.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영호관의 백서령에 대한 태도와 백무천의 영호관에 대한 지나친 편애였다.
그조차 영호관이 당할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은 터였다.
영호관은 왜 백서령의 공격을 허용한 걸까?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이었을까?
사매의 원망이 그렇게 마음에 걸렸나?
백무천은 왜 딸을 버릴 생각까지 하며 영호관을 위하는 걸까? 그가 말한 ‘너는 관아를 욕할 자격이 없다.’라든가, ‘처음부터 냉정하게 처리했으면…….’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알 수가 없군.’
그나마 마음에 든 것은 백무천이 공손천우에게 축객령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문주님도 저 자식이 마음에 안 드나 보군. 근데 저 자식은 왜 안 나가고 개기는 거야?’
그가 공손천우를 노려보는 동안, 호위무사들이 자신들의 옷자락을 찢어서 영호관의 가슴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상처 부위를 막았다.
풍천은 환신술을 써서 안으로 들어가 볼 것인지, 아니면 밖에서 상황을 엿볼 것인지 고민했다.
그때 호위무사들이 피를 닦아낸 영호관의 가슴이 보였다.
고민을 하던 풍천은 영호관의 가슴을 보고 고개를 모로 꼬았다.
‘어? 누구하고 똑같네?’
영호관의 가슴에 제법 큰 점이 두 개 있었다.
자신이 아는 누구처럼 손톱만 한 점이.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오른 풍천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
‘서, 설마……?’
정신없이 검향원을 나온 풍천은 조환이 말했던 뒷산으로 달려갔다.
뒷산에는 모두 이백여 개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그 무덤들 중에서 묘비명이 없는 무덤을 찾아냈다.
묘비명이 없는 무덤은 모두 세 개. 그중 하나만이 만든 지 일 년 정도 된 것이었고, 다른 두 개보다 훨씬 잘 만들어져 있었다.
무덤을 한참 바라보던 그는 이를 지그시 악물고 무덤을 향해 두 손을 휘둘렀다.
가공할 경력이 무덤의 윗면을 통째로 밀어냈다.
풍천은 그 후로도 관이 나올 때까지 흙을 치웠다.
두 손을 휘두를 때마다 양동이로 물을 퍼내는 것처럼 흙덩이가 파였다.
그렇게 한 자 정도 파내자 석관이 보였다.
석관 위의 흙을 정리한 그는 심호흡을 하고 관의 뚜껑을 열었다.
악취가 풍기는 석관 안에는 반쯤 썩은 시신이 색 바랜 천에 싸인 채 누워 있었다.
그는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시신의 발을 감싼 천을 뜯어냈다.
형은 어릴 때 수련을 하던 중 엄지발가락 뼈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그 일로 인해서 형의 오른쪽 엄지발가락 뼈는 유난히 안쪽으로 휘어져 버렸다.
어쩌면 형이 사부님 곁을 떠난 것도 당시의 그 일 때문일지 몰랐다. 사부님은 발가락 다친 것 가지고 엄살을 부린다며 형을 닦달했으니까. 하지만 형은 휘어진 발가락 뼈 때문에 천풍문의 신법을 익힐 수 없었다.
그런데…… 시신의 엄지발가락 뼈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3
검향원으로 달려온 금조상은 영호관의 상처에서 흐르는 독혈을 살펴보았다.
독에 중독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영호관이 진기를 일으켜서 확산을 억제한 상태였다. 거기다 백무천이 직접 손을 써서 독혈을 빼낸 덕에 독기는 넓게 퍼지지 않은 듯했다.
“천만다행입니다. 남은 독혈을 조금만 더 빼내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급히 가져온 상자를 연 그는 상자 안에서 두 알의 단환을 꺼내 영호관에게 먹였다.
백무천은 영호관의 명문혈에 손을 얹고 공력을 끌어올렸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돼! 네가 죽으면 내 어찌 하늘을 볼 수 있겠느냐!’
그는 금조상의 지시에 따라 상처 부위에 뭉쳐 있는 독기를 강제로 빼냈다.
시커먼 독혈이 상처에서 흘러나왔다.
한 사발 정도의 독혈을 더 빼내자 피의 색이 붉어졌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태상문주. 이제 지혈을 할 테니 해독약의 약효가 퍼질 때까지 내부의 독기가 확산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흘러나온 피를 받아내던 금조상은 상처 부위를 깨끗한 천으로 막았다. 그리고 침을 꺼내서 상처 주위에 열두 개를 꽂았다.
“독기를 열양진기로 태우면 어떻겠는가?”
“그럴 수 있다면 금상첨화지요.”
“그럼 해보겠네.”
백무천은 명문혈과 백회혈에 손을 얹었다.
그의 두 손에서 안개처럼 은은한 백무가 피어오르더니, 곧 그와 영호관의 몸이 백색 운무로 뒤덮였다.
그로부터 일 각.
“커억!”
영호관이 입을 쩍 벌리고 검붉은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지켜보고 있던 금조상은 재빨리 작은 항아리를 영호관의 입에 가져다 댔다.
백무천은 영호관이 두 번에 걸쳐서 핏덩이를 토해내고 조용해지자 천천히 공력을 거두었다.
과도하게 진기를 소모한 그의 얼굴은 내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창백했다. 하지만 영호관이 위기를 넘겼다는 생각 때문인지 표정만큼은 조금 전보다 평온해 보였다.
금조상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영호관의 입가를 깨끗이 닦아냈다.
“나머지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운기를 해서 진기를 다스리시지요.”
풍천이 무검각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금조상이 영호관의 몸을 침상 위에 반듯이 눕힌 직후였다.
공손천우는 백무천의 축객령에 의해 쫓겨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푸, 풍천?”
방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백초령은 허공에서 불쑥 나타난 풍천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문주님은 안에 계셔?”
딱딱한 말투. 일 년 만에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말투와 태도가 영 이상하다.
백초령은 반쯤 얼이 빠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 어.”
풍천은 더 이상 백초령을 쳐다보지 않고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방문 앞을 막고 있던 호위무사 둘이 그의 앞을 막았다.
“누구……?”
“비켜!”
풍천은 냉랭히 말하며 그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두 사람을 날려버렸다.
풍천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방문을 활짝 열었다.
백무천은 갑작스런 소란과 함께 방문이 활짝 열리자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소란을 일으킨 사람이 풍천인 걸 알고 경악과 반가움이 섞인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자넨…… 풍천이 아닌가? 살아 있었군! 살아 있었어!”
하지만 풍천은 그와 반가운 인사를 나눌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쾅!
문을 세차게 닫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간 그는 침상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영호관을 내려다보았다.
안색이 창백하긴 해도 푸르스름한 독기는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백무천이 진기를 많이 소모한 듯 보이는 걸로 봐서 공력을 주입해 독기를 강제로 다스린 듯했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풍천이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자 백무천이 짐짓 인상을 쓰며 다그쳤다.
풍천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된 겁니까?”
“관아 말인가? 후우, 서령이가 독이 묻은 단검으로…… 그래도 다행히 독기를 대부분 제거해서 심각한 상황은…….”
풍천은 홱 고개를 돌려서 백무천을 직시한 채 다시 질문했다.
“그걸 묻는 게 아닙니다. 조금 전, 형이 묻혀 있다는 무덤에 가서 직접 확인했습니다. 어, 떻, 게, 된, 겁, 니, 까?”
백무천의 표정이 석고를 바른 것처럼 굳어졌다.
풍천은 손을 뻗어 침상을 가리키고는 입이 달라붙은 백무천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기 누워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영호관입니까, 아니면…… 형입니까? 누구냐니까요! 말하지 않으면 제가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침상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던 영호관의 입술이 잘게 떨리면서 벌어졌다.
“천…… 이 멍청한 놈, 조용히 좀 해라.”
풍천은 침상 위의 영호관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어릴 적, 사부님 몰래 도망치려는 걸 말렸더니 형이 꿀밤을 주며 그렇게 다그쳤었다. 어른이 되어서 목소리가 굵어졌을 뿐 억양도 그대로였다.
‘형이야, 역시 형이었어!’
빌어먹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가슴이 먹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바보 같은 형. 형은 정말 바보야. 천하제일의 바보!’
뭔가 목적이 있어서 자신을 속인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정도 귀계를 꾸미지 않고서는 천외천의 사람인 용후정을 상대할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에게 속고, 결국 그 여인이 휘두른 독 묻은 검에 맞은 형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걸 보고 그동안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 여인에게서, 자신을 단순히 이용하기 위해서 사귀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여인이 독 묻은 검을 들고 달려드는 걸 보고 심장이 찢어지지는 않았는지…….
“지미…… 멍청한 건 형이야. 왜, 왜 그걸 안 피한 거야? 뭐가 아쉬워서 그대로 맞아? 사부님이 계셨으면 열 대도 더 맞았을걸?”
“너도 누군가를 좋아해보면 알 거다.”
“나도 좋아하는 여자 있어!”
“그래? 나도 언제 한번 보고 싶군.”
‘자주 봤을걸? 지금도 밖에 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지금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려는 것 같아. 제기랄!’
공연히 화가 난 풍천은 영호관에게 그 화를 풀었다.
“나는 좋아하는 여자가 나를 걷어차도 형처럼 멍청하게 당하진 않을 거야. 알았어? 오히려 더 예쁜 여자 얻어서 보란 듯이 잘 살 거라고!”
영호관, 아니 사마공유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럼 넌 아직 그 여자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야.”
진정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정말 그런 걸까?
풍천은 바로 답변을 못 하고 사마공유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짜증 내듯이 소리쳤다.
“좌우간!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사정을 확실히 알아야겠어.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 신검문을 확 뒤집어엎을 테니까.”
“천아…….”
“못 할 줄 알아? 아직 모르지? 내가 형보다 훨씬 강하다는 거!”
그때 백무천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진정하게. 사실대로 다 말해줄 테니까.”
그런데 또다시 방문이 세차게 열렸다.
이번에는 백초령이 문 밖에 서 있었다.
그녀는 벌벌 떨면서 침상 위의 영호관과 풍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백무천에게 고정시켰다.
“무,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 풍천의 형이라니요?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서, 설마…… 그럼 영호 오라버니가 바로…… 오오, 맙소사…….”
백무천은 더 이상 감출 수 없다 생각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듣고 싶으면 들어와서 문을 닫아라.”
죽은 사람은 사마공유가 아니라 영호관이었다.
당시 사마공유는 얼굴이 심하게 손상된 상태였고, 영호관은 내장이 썩어가는 상태였다.
백무천은 뛰어난 의원을 찾던 중 근처에 귀수괴의가 있다는 걸 알고 조환을 시켜 그를 비밀리에 데려왔다.
귀수괴의는 영호관의 죽음을 단정적으로 말하고는 괴이한 제안을 했다.
어차피 영호관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죽음을 눈앞에 둔 영호관의 얼굴을 사마공유에게 옮겨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성공 확률은 이 할 정도지만.
백무천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신검문을 통째로 삼키려는 천외천의 주구, 용후정의 뒤통수를 칠 계획이 떠올랐다.
마침 두 사람의 신체는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키도 비슷했고, 몸의 체형도 비슷했다. 얼굴만 바꾸면 누가 누군지 쉽게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았다.
“사실 임무를 핑계 삼아서 관아를 밖으로 자주 내몬 것은, 그 아이가 용후정과 가깝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공유는 용후정의 제안을 거절해서 서령이에게조차 외면 받는 상태였고.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