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2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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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202화
202화
풍천은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이 바로 그 칠대신기 중 하나인 묵전신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묘한 것은 두근거림이 검을 통해서도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흠, 손에 착 달라붙는 게, 처음부터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검 같군.’
그가 검을 잡고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백리진학이 말했다.
“그 검은 제 형의 사문이 남긴 마지막 신물이네. 제 형은 십 년간 강호를 누비면서 무영검이란 이름을 얻었지만 그 검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네. 듣기로는 자신조차 검의 기운을 이기지 못했다고 하더군.”
무영검(無影劍) 역시 칠절의 일 인이다.
제종완이 강호에서 가장 신비한 검수로 알려진 무영검이었다고?
풍천은 그 사실에 놀라워하면서도 막상 백리진학의 말에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는 묵전신검의 기운이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진 것이다.
‘두 양반은 묵전신검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손에 있는 검이 값비싼 보물 같다는 내색을 일체 하지 않았다.
‘진정한 해결사는 억만 금 가치의 보물을 보고도 눈빛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법이지.’
사실 그보다는 보물인 줄 알면 안 주려고 할지 모르니까 그런 것이지만.
그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옆구리에 매달았다. 그리고 도원선사와 백리진학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전에 쓰던 제 사문의 검만은 못하지만 괜찮은 검 같군요.”
2
풍천은 해가 지기 전에 종산을 내려왔다. 도원선사가 백운암에서 하루 자고 가라 했지만,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그런데 백리진학이 제종완의 복수를 하겠다며 풍천을 따라나섰다.
풍천은 동행을 거부하지 않았다. 백리진학 정도의 고수라면 신마성에 적잖은 타격을 줄 수 있을 터, 말리기는커녕 등을 떠밀어야 할 판이었다.
술시 무렵.
합비에 도착한 풍천은 일단 객잔으로 들어가서 백리진학과 식사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쇼. 누구 좀 만나고 올 테니까.”
그때 백리진학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계산을 미리 해놓게.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나?”
풍천은 미리 계산을 마치고 객잔을 나섰다.
‘쪼잔하긴. 제 대협의 술빚도 갚지 않은 걸 보니 전부터 그렇게 짠돌이처럼 굴었나 보군.’
합비까지 오면서 슬쩍 물어봤다. 돈도 없이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고, 백운암에서 눈치를 주지 않았냐고.
백리진학은 무심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답했다.
“나는 돈에 구애받는 삶이 싫어서 돈을 멀리한다네. 도를 닦다 보면 돈이 돌로 보이지.”
물론 돈이 필요 없는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쓸모없는 돌도 필요할 때가 있다면서.
‘그래도 옷이나 행색은 되게 깨끗하게 챙긴단 말이야.’
풍천은 구시렁거리며 하오문의 합비 분타를 찾아가기 위해 동쪽으로 향했다.
합비는 그가 해결사로서 처음 일을 맡았을 때 와본 곳이었다. 하오문의 합비 분타도 그때 가봤었다.
‘고 영감이 겁나게 반가워하겠군.’
풍천은 미소를 지으며 하오문의 합비 분타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합비는 남궁세가가 제왕처럼 군림하는 곳이어서 흑도의 무리들은 기를 펴지 못했다. 기껏해야 구석진 곳의 건달패 정도가 합비의 흑도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하물며 하오문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겉으로나마 정상적인 사업을 하는 것처럼 꾸미고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지냈다.
남궁세가도 하오문이 합비에서 영업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필요할 때 그들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 아니, 뺏을 수 있으니까.
“옛날과 달라진 것이 없군.”
풍천은 낡은 건물에 걸려 있는 전당포의 깃발을 보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첫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합비에 찾아왔을 때 얼마나 막막했던가.
그때 그에게 한 줄기 햇살을 제공해준 곳이 바로 하오문 합비 분타인 구중당(九重堂)이었다.
‘그때 이곳이 아니었다면 일을 해결하지 못했을 거야.’
그는 감회어린 표정을 지으며 구중당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희미한 등잔불빛이 그를 반겼다. 실내는 철판이 덧대진 석벽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그 안쪽은 굵은 쇠막대가 세 치 간격으로 꽂힌 가로 석 자, 세로 두 자의 구멍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다.
그가 철창에 얼굴을 들이대자, 철창 너머에 앉아 있던 중늙은이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
중늙은이는 질문을 하다 말고 검버섯이 피어난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풍천은 철창을 사이에 두고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수, 고 영감님.”
“자, 자네는…….”
“사 년 만이죠?”
“정확히, 사 년 일 개월 열이틀 만이군.”
“과연 고 영감님의 기억력은 알아줘야겠군요. 하, 하, 하.”
고 노인은 아련한 눈빛을 지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내가 어떻게 잊겠나? 그날의 일을.”
“저 보고 싶었죠?”
고 노인의 노안에 눈물이 맺혔다.
“보고 싶었냐고?”
아련한 기억을 떠올린 고 노인은 입술을 문풍지처럼 떨며 풍천을 바라보았다.
풍천은 씩 웃으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무척 보고 싶었는데, 바쁘다 보니 올 기회가 거의 없었죠.”
“그런데 어쩐 일로 여길……?”
“일단 문부터 열어봐요.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고 노인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미, 쳤, 냐?”
“에이, 고 영감님. 이야기 좀 하게 문 좀 열어보라니까요.”
“못 열어! 절대 안 열어! 나가! 꺼져!”
고 노인은 검지로 바깥문을 콕콕 찍어서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찌나 강하게 거부하는지, 앞니부터 어금니까지 모조리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때였다. 문 바깥쪽에서 덩치 큰 장한 두 명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무슨 일입니까, 어르신? 잡초를 제거할 일이라도…….”
화들짝 놀란 고 노인이 급히 손을 저었다.
“걱정 말고 돌아가게.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정말 괜찮겠습니까?”
“괜찮다니까? 어서 가!”
풍천은 뒤를 돌아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힘 좀 쓰게 생긴 분들인데요?”
두 잡초 제거기 중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는 장한이 풍천을 보며 눈을 껌벅였다. 그리고 곧 오래전의 어떤 기억을 떠올린 그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서 동료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그냥 가세.”
“왜 그래?”
“빨리 가자니까!”
칼자국 난 장한이 우격다짐으로 동료를 데리고 사라지자, 고 노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변명했다.
“잔챙이들이 가끔 와서 행패를 부리다 보니 걱정이 된 모양이군.”
“영업이 잘 된단 증거겠죠 뭐.”
“그러니 어서 가게. 난 두 번 다시 자네를 보고 싶지 않아.”
“정말 그러시깁니까? 그래도 보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인데.”
“나 아직 정신 말짱하네. 그때 자네를 손님으로 받았다가 입은 피해를 생각하면…….”
부들부들 떨던 고 노인은 격동을 억누르기 위해 이를 으드득 갈았지만, 끝내 더 버티지 못하고 악을 썼다.
“당장 패 죽이고 싶어, 이 자식아!”
“그게 어디 제 잘못인가요?”
“자네가 동마당 패거리에게 다 말했다며? 우리가 알려줬다고. 그 바람에 동마당 놈들이 남궁세가에 일러바쳐서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알아? 하마터면 우리 합비 분타가 문 닫을 뻔했단 말이야!”
“다른 말 안 했는데요? 그냥 여기에다 물건을 맡겼다고만 했지.”
“그게 그거잖아!”
당시 남궁세가의 간부 아들 하나가 여인을 간음한 사건이 벌어졌었다.
여인의 부친은 남궁세가 간부 아들의 범행에 대한 증거를 찾아달라고 했다.
풍천은 나름대로 증거 수집을 했지만,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결국 경비가 동난 그는 전당포에 들러서 검을 맡기고 돈을 빌렸다. 그리고 지나가듯이 그 일을 말했다.
고 노인은 검을 맡기는 무사가 불쌍하게 보였는지 정보를 사라고 했다.
그는 빌린 돈 중 은자 한 냥을 주고 정보를 샀다.
고 노인은 흑도무리인 동마당 패거리가 그 일과 관련되었으니 그들을 조사해보면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풍천은 그 말을 듣고 동마당을 뿌리 채 뒤흔들어서 뒤집어 놓았다. 그런 연후 철저히 다그쳐서 남궁세가 간부 아들과 관련된 증거를 찾아냈다.
문제는 그 후였다.
풍천이 동마당을 다그칠 때, 검을 맡길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며 배상을 받아냈는데, 그로 인해서 동마당은 정보를 하오문이 흘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하오문을 어쩔 수 없기에 남궁세가의 간부에게 그 일을 고자질했다.
남궁세가의 간부는 이를 갈면서 하오문의 제자들을 잡아들였다. 하오문 합비 분타를 아예 없애버리겠다며.
결국 고 노인은 그 일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그 간부의 아들을 관에서 빼내고, 은자 천 냥의 위로금을 줘야 했다.
그러니 어찌 이가 갈리지 않으랴!
하지만 풍천도 할 말이 많았다.
“그놈이 나쁜 놈이죠. 아무리 아들이라도 잘못을 저질렀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죠. 안 그래요? 좌우간 오늘은 그 일 때문에 온 거 아니니까, 문 좀 열어봐요.”
고 노인은 풍천이 얼마나 끈질긴지 잘 알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동마당 패거리가 이를 갈면서도, 그런 찰거머리는 처음 봤다며 질린 표정을 지었을까.
그리고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총단에서도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올 정도니까.
고 노인은 간절한 표정으로 사정했다.
“그냥 가게. 제발! 응? 이 늙은이 좀 살려줘!”
풍천은 돌아서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돌아서기는커녕 철창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 나직하게 말했다.
“강호 상황에 대해서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 제가 오랜만에 집을 나와서 모르는 게 많거든요.”
“그 정도야 객잔에 가서 점소이만 붙잡고 물어봐도 되지 않는가?”
“사소한 것이라도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얻고 싶은 거죠.”
풍천은 한 손으로 오리 알 굵기의 쇠막대를 잡고, 웃음 띤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끼이이익.
쇠막대가 비명을 지르면서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눈이 휘둥그레진 고 노인은 다급히 소리쳤다.
“잠깐!”
풍천은 철창에서 손을 떼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저는 정말로 고 영감님을 좋아하거든요? 그러니 제가 고 영감님께 죄를 짓지 않게 해주세요.”
‘빌어먹을 자식! 똥물에 열흘을 담갔다가 튀겨죽일 놈의 새끼!’
고 노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정말…… 강호 상황에 대한 것만 알면 되나?”
“그렇다니까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해요?”
“그럼 거기서 물어봐. 내 권한 한도 내에서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다 말해줄 테니까.”
하지만 고 노인은 그 말을 뱉은 지 열을 셀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자신의 결정을 처절하게 후회했다.
“시, 신마성과 천룡회의 내부 상황? 그건 내가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는데…….”
“그냥 일반적인 상황만 말해주면 되요.”
고 노인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정말 일반적인 것만 말해주면 되는 거지?”
“자세한 것은 제가 직접 알아볼 겁니다. 어차피 그놈들에게 받아야 할 빚이 제법 되니까요. 아, 그리고 하남의 상황도 알면 말해주시고…….”
“…….”
‘이 자식이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 고 노인은 두 번, 세 번 강조하고 입을 열었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하오문에 대한 말을 해선 안 되네. 알았지?”
“하, 하. 당연하죠.”
목이 탄 고 노인은 차를 단숨에 반주전자 비우고는, 강호의 상황을 간략하게 추려서 말했다.
그런데 아는 것이 워낙 많다 보니 추리고 추렸는데도 일 각 이상 걸렸다.
풍천은 이마를 찌푸린 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제길, 난리도 아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