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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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0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88화
188화
잠시 후.
풍천 일행은 이곡을 부축하고 협곡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곳에는 목에서 가슴까지 갈라진 시신과, 머리와 손목이 잘린 시신, 그리고 팔다리가 이상하게 꼬인 채 악귀처럼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진 시신만 남아서 까마귀들을 끌어모았다.
까악! 까아악!
단천무령들은 까마귀 소리가 울릴 때마다 풍천을 힐끔거렸다.
‘후우, 얼마나 괴로웠으면 피를 토하고 온몸이 꼬였을까.’
‘육신의 고통보다 정신적으로 더 괴로웠겠어. 어떻게 사람을 말로 고문할 수가 있지?’
‘핏대가 터져서 죽은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3
백무천은 노화가 타오르는 눈으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구룡회의 주인과 간부들이 둘러앉은 대전은 억만 근 바위가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분위기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탁능한이었다.
“놈들도 피해가 커서 바로 반격을 하지는 못할 거요.”
백무천의 귀에는 그 말이 변명으로밖에 안 들렸다. 그래도 상대는 천붕성주 탁능한. 그가 죄를 물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자였다.
그는 격노한 마음을 억누르고 최대한 담담히 입을 열었다.
“왜 무모한 공격을 한 거요?”
“성공했으면 저들에게 치명타를 가했을 거외다. 우리의 움직임이 저들에게 알려졌을 거라 어찌 짐작이나 했겠소?”
“그토록 중요한 일을 어찌 다른 사람들과 상의도 하지 않았소?”
탁능한은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서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 했다.
“많은 사람이 알아봐야 좋을 게 없는 계획이었소이다. 셋만 아는 데도 적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소?”
언뜻 들으면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엄청난 피해를 봤으니 구룡회의 일원으로서 추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로 인해서 구양 각주가 돌아가시고 담 방주가 심한 부상을 입었소이다. 탁 성주께서는 당분간 자중해주셨으면 하오.”
탁능한의 굵은 눈썹이 발에 밟힌 송충이처럼 꿈틀거렸다.
하지만 좌중의 군웅들 대부분이 백무천을 옹호하는 상황이었다. 공격이 실패한 것도 사실이었고.
특히 검각의 무사들은 구양곤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를 원망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반발하지 못하고 고개를 반쯤 숙였다.
“걱정을 끼쳐 미안하외다. 본인은 지금도 그 공격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소. 적에게 상당한 피해도 입혔고 말이오. 하지만 여러분이 그리 말씀하시니 그 일에 대해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소이다. 그리고 이번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싸울 것이니 이 탁모의 진심을 알아주길 바라겠소.”
은근슬쩍 자신의 결정에 대한 정당성을 내비친 그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일부 몇몇은 노골적으로 그를 싫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흥, 그 표정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두고 보지.’
그때 검각주 구양곤의 자리에 앉아 있던 청삼 장한이 입을 열었다.
“성주께 물어볼 게 있습니다.”
탁능한은 장한을 바라보았다. 그 장한은 구양곤의 첫째 아들인 구양진이었다.
“말해보게.”
“천붕성과 적련방, 본각의 무사들이 일시에 쳐들어가기로 했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천붕성은 한 박자 늦게 정면을 공격했습니까?”
직접적인 추궁에 탁능한의 표정이 바위처럼 굳어졌다.
“정문을 치고 들어간 것은 늦지 않았네. 다만 안으로 들어갔을 때 수상한 느낌이 들어서 한 박자 늦춘 것뿐이지.”
“그로 인해서 본각과 적련방만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아버님은 빠져나오지도 못했고 말이지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만약 내가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면, 큰 손실 정도가 아니라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것이네. 적에게 타격을 입히지도 못했을 것이고. 내 말, 이해하겠나?”
구양진은 탁능한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크게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은데도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추궁할 수도 없는 일. 구양진은 그쯤에서 물러섰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이해한다니 다행이군.”
탁능한은 담담히 말하고 백무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난 일을 되새기며 반성하는 것은 이쯤하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 논의했으면 좋겠소이다. 언제까지 지난 일에 얽매일 수는 없지 않겠소?”
백무천도 더 이상 그 일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였다.
“그렇게 합시다. 어디 좋은 생각 있으신 분은 말씀해보시오.”
중소문파의 주인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문주, 천의맹이 회남에 도착했다 들었습니다. 언제쯤 이곳에 도착한다고 합니까?”
“내일 아침이면 도착할 거요. 천의맹의 정예인 청룡당과 현무당의 무사들로 이백 명 정도 된다니 많은 도움이 될 거라 기대하고 있소이다.”
또 다른 자가 물었다.
“천혈궁에 신마성의 무사들이 합류하고, 천혈궁의 동암 분타가 무너졌다던데, 그 일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게 있습니까?”
“천혈궁에 합류한 신마성 무사들에 대해선 지금 정보 수집 중이오. 그리고 동암 분타를 무너뜨린 사람들은…… 다름 아닌 내가 보낸 사람들이오.”
백무천이 사실을 밝히자 군웅들 모두가 경악과 감탄이 뒤섞인 눈빛으로 백무천을 바라보았다.
“아! 그게 정말입니까?”
“허어, 그런 일이……!”
“그렇소. 천혈궁이 하남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인데, 의외의 효과를 본 것 같소. 신마성의 무사들마저 합류했다면 그냥 놔두었을 경우 곧장 하남을 쳤을 텐데 말이오.”
군웅들은 앞을 다투어서 백무천을 치켜세웠다.
“정말 대단한 선견지명입니다, 문주!”
“과연 백 문주십니다!”
“이참에 구룡회의 총회주를 선출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결속력이 강해지면 중구난방으로 대하는 것보다 신마성에 더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럽시다!”
“옳소!”
“백 문주께서 총회주를 맡아주시오!”
끝내 총회주에 대한 이야기마저 나오자 탁능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상황이면 백무천이 무조건 총회주가 될 것이었다.
“본인 역시 총회주를 뽑아야 한다는 것에는 찬성하고 있소. 하지만 당장 누구를 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오. 총회주를 선출하다 자칫 분란이 올 수도 있으니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차분한 상황에서 정합시다.”
누가 들어도 백무천이 총회주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백무천 역시 당장 총회주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탁능한의 말대로 이 자리에서 총회주가 결정되면 천붕성과 적련방 간부들의 반발이 거셀 것이었다.
그것은 전체로 볼 때 득보다 실이 많았다.
“그 일은 담 방주의 부상이 완쾌된 후에 논의해도 될 일. 서두르지 맙시다.”
군웅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백무천과 탁능한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의 의미는 전혀 달랐다.
탁능한도 그걸 알고 있지만 일체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백무천. 그대는 내가 왜 이러는지 알게 되면 오늘 결정을 미룬 일에 대해서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후후후후.’
제6장. 분노(忿怒)는 혈풍(血風)을 부르고
1
풍천은 공손이향과 마동춘에게 이곡을 맡기고 서성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공손이향이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무위면 많은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도산검림에 그녀를 데려갈 순 없었다.
다행히 그녀도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대신 그윽한 눈으로 풍천을 바라보며 조심하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결국 풍천은 허무정과 남궁도영만 대동한 채 동암으로 향했다.
공손이향은 풍천이 산허리를 돌아가서 보이지 않을 즈음, 이곡을 업고 있는 마동춘에게 말했다.
“잠시만 두 분이서 계세요. 저 잠깐 저쪽 숲에 갔다 올 게요.”
마동춘과 이곡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나무가 빽빽한 숲 속으로 여자가 들어갈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급했나 보군.’
숲 속으로 들어간 공손이향은 마동춘과 이곡의 시선이 완전히 가려진 곳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작은 공터가 나오자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거기 계신지 알아요. 잠깐만 나와보세요.”
다섯을 셀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은양 아저씨, 시간 보내기 싫으니까 잠깐만 나와보세요.”
다시 셋을 셀 시간이 지났다. 그때 그녀의 십여 장 뒤쪽 나무 위에서 나무 그림자가 뭉치더니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공손량이 공손이향의 안위를 위해서 딸려 보낸 은양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은양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공손이향을 바라보았다.
대풍마저도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대풍의 능력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고 거리를 이십 장 이상 두긴 했지만.
공손이향은 피식 웃으며 담담히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누군가를 딸려 보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죠. 그런데 두 번이나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지 뭐예요.”
“내가 네 능력을 너무 얕봤나 보구나. 그래, 무슨 일로 불러낸 거냐?”
“아저씨가 령주님을 따라가 주세요.”
“그건 안 된다. 내 임무는 너를 보호하는 것이니까.”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령주님께 이를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은양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묘한 눈빛으로 공손이향을 주시했다.
“너…… 대풍을 좋아하는구나?”
공손이향은 쓴웃음을 지었다. 면사 때문에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 그럼에도 은양은 공손이향이 지금 어떤 마음인지 알고 가슴이 먹먹했다.
“이향아, 나중에 많이 힘들 텐데…… 꼭 그 길을 택해야만 하겠느냐?”
“저도 알아요, 제가 남자를 좋아할 수 없는 몸이라는 거. 한 달이 남았는지, 일 년이 남았는지 몰라도 음령지맥(陰靈之脈)의 운명을 비켜갈 수 없다는 것도요. 그래도 그때가 될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면서 살고 싶어요, 아저씨. 한 번쯤 누군가도 좋아해보고요.”
“하아, 이런, 이런…….”
“그가 나를 좋아해주길 바라진 않아요. 그냥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그런 추억을 간직하고 싶을 뿐이죠. 그러니 제 마음을 이해해주세요.”
은양은 더 이상 공손이향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음령지맥이 본격적으로 발동되면 여자로서의 모든 걸 상실하게 된다. 어쩌면 정신마저 싸늘하게 얼어붙을지도 모르고.
삶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랑을 해보겠다는데, 어찌 말릴 수 있단 말인가.
은양은 머리를 흔들고는 공손이향을 바라보았다.
“알았다. 쫓아가 보마. 단, 최악의 경우가 아니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고마워요, 아저씨.”
2
어둠이 깔린 술시 말.
풍천 일행은 겉모습을 바꾸고 철저히 상황을 살피며 동암으로 들어갔다.
남궁도영은 풍천과 그 일행을 남궁세가의 제운당에서 운영하는 주루로 안내했다.
골목 안에 있는 운월루는 좌석이 열 개도 되지 않는 작은 주루였다.
점소이는 남궁도영의 손짓을 보더니 풍천 일행을 주루의 이 층 구석진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잠시 후, 운월루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들어섰다.
중년인은 남궁도영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등잔불을 끄고 한쪽 창문을 열었다.
제운당이 운월루를 비밀거점으로 삼은 것은 이 층에서 천혈궁 동암 분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기 때문이었다.
백오십 장 정도 떨어진 거리.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화톳불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데 동암 분타를 바라보던 풍천이 눈을 부릅뜨고 욕설을 뱉었다.
“저 개새끼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