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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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8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79화
179화
혼자 죽어서 끝날 일이라면 이렇게 도망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자존심을 접고 도주를 택한 것은 남궁세가의 젊은이들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주할 길이 없다면 선택은 하나뿐.
“도하! 만약 앞에 오는 자들이 적이면 내가 중심을 뚫을 것이다. 너는 창천검대를 데리고 무조건 달려라!”
바로 뒤따라오던 장한이 비감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형님!”
“명령대로 해!”
그때였다.
“신마성의 잡졸들아, 뭐 처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온 거냐?”
풍천이 신마성 무사들을 잡졸 취급하며 소리쳤다.
남궁도영은 그 말을 듣고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아군이다!’
입술을 질끈 깨문 그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악을 쓰듯이 소리쳤다.
“여기서 끝장을 본다!”
좌우로 스쳐가던 남궁세가의 창천검대 대원 삼십여 명도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결연한 표정.
신마성의 무사 백여 명이 좌우로 퍼지며 남궁세가의 사람들을 에워쌌다.
“흐흐흐흐, 무덤으로 삼기에 적당한 장소를 택했군. 설마 저놈들이 너희들을 구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신마광령단의 단주, 여광이 앞으로 나서며 살소를 흘렸다.
남궁세가 사람들은 이제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 신세였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그 사이 풍천이 남궁세가 사람들 바로 뒤에 도착했다.
모두가 그쯤에서 멈춰 설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적을 앞에 두고 여유 부릴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인사는 일단 잡졸들을 치우고 나서 나누죠.”
남궁도영을 향해 씩 웃어준 그는 득의의 웃음을 흘리고 있는 여광을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따라오쇼!”
단천무령들은 제멋대로인 령주를 둔 죄로 숨 돌릴 틈이 없었다.
‘도와주는 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왜 자신이 먼저 나서서 설쳐? 신마성과 남궁세가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이러다 제 명에 못 죽지.’
‘마누라 살 빠지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을지도…….’
‘그날 입구 경비만 서지 않았어도…… 제길.’
‘그래도 종이 되는 것보다 낫긴 한데…….’
‘괜히 따라왔나?’
‘저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힘 조절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들은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 따른 고민을 하며 신마성 무사들을 향해 쇄도했다.
이제 다른 길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상황을 종료시키는 수밖에.
그때 풍천이 삼 장 높이의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여광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후우우웅!
하늘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가공할 힘이 담긴 검세! 낙성천류검 중 낙성단혼이었다.
숨이 콱 막힌 여광은 눈을 부릅뜨고 칼을 올려쳤다.
쾅!
“크으윽!”
격한 신음을 토해낸 여광은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다.
풍천은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가며 비월검의 세 번째 초식 비월광을 펼쳤다.
순간, 한 줄기 섬광이 일직선으로 쭉 뻗어갔다.
안색이 해쓱하게 질린 여광은 급히 몸을 틀었다. 심장을 노리고 뻗어가던 섬광은 여광이 몸을 트는 바람에 왼쪽 어깨를 꿰뚫고 지나갔다.
신마광령단의 무사들은 여광의 몸에서 피가 튀어 오른 후에야 달려들었다.
“단주!”
“이놈! 여기도 있다!”
풍천은 어깨가 뚫린 여광을 놔두고 신마광령단 무사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람을 따라 시퍼런 검광이 흘렀다. 피가 튀고 비명이 터져 나오면서 순식간에 초원이 혈해로 변해갔다.
한편, 단천무령들은 자신들의 손발을 바쁘게 만든 신마성 무사들을 원수라도 되는 듯 몰아붙였다.
무심한 표정으로 일말의 인정도 두지 않고 검을 펼치는 허무정, 꼬챙이검으로 상대의 목과 심장에 구멍을 뚫는 이곡,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화풀이하듯이 검을 펼치는 악진표, 몸서리쳐지는 빙백한천장을 사방에 뿌려대서 한여름을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처럼 만들어버린 공손이향. 거기다 감능하를 비롯한 천외천의 사람들과 마동춘까지. 모두가 신들린 듯이 신마성 무사들을 쓰러뜨렸다.
한숨 돌린 남궁세가의 사람들도 그들의 뒤를 쫓아 신마성 무사들을 공격했다.
그야말로 폭풍이 따로 없었다.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강풍에 후드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비명이 터지고, 피가 튀고, 그때마다 살아 있던 생명이 우수수 스러졌다.
단 아홉 명의 합세로 상황이 그리 변할 줄이야!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상황에 아연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더욱더 살기를 짙게 품고 검을 펼쳤다.
오면서 죽어간 형제가 이십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죽어라, 개자식들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초원에 한 편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악다구니!
사람들이 움직일 때마다 푸른 잡초 위에 시뻘건 피가 뿌려진다.
생명을 집어삼키고 우후죽순 피어나는 선홍빛 혈화!
흩뿌려진 핏덩이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흐른다.
정신의 극한 상태가 이런 것일까.
사람들은 무기를 휘두르면서도 오직 하나만 생각했다.
적이냐, 동료냐!
아니 대부분은 그것조차 생각지 않고 본능에 의존한 채 움직였다.
빈틈이 보이면 검을 내지르고, 상대의 팔다리를 자르고, 배를 가르고, 목을 치고, 쓰러지면 또 다른 먹이를 찾아서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돌렸다.
죽여라! 죽여! 죽어!
그때만큼은 머릿속에서 피를 갈구하는 명령만이 왱왱거리며 울렸다.
풍천은 일 검에 신마성 무사의 심장을 갈라버리고는 공격을 멈춘 채 상황을 살펴보았다.
백 명이 넘던 신마성 무사들은 사오십 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아직도 그들의 숫자가 많긴 하지만 염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적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은 거의 다 제거가 된 상태. 어깨가 뚫린 여광만이 일찌감치 뒤로 빠져서 도주할 기회만 엿보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끝나겠군.’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자신이 먼저 적을 치지 않고, 공손이향이 적을 상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했다.
이제는 초식 운용이 제법 능숙했다.
가공할 음공인 빙백한천장에 초식 운용마저 더해지자 그야말로 공포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녀의 장력에 맞은 자는 한겨울에 얼어 죽은 사람처럼 시퍼렇게 변한 채 쓰러졌다. 심지어 스쳐 맞은 자도 온몸을 덜덜 떨며 공포에 질려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정말 살벌한 장력이네.’
공손이향의 빙백한천장은 그조차 겁이 날 정도였다. 정통으로 당하면 혈맥이 얼어붙어서 죽든지, 산다 해도 평생 동안 고뿔에 걸린 사람처럼 콜록거려야 할지 몰랐다.
‘저런 것은 피하는 게 최고지.’
바로 그때 신마성의 무사 중 두 사람이 공손이향의 등을 향해서 달려드는 게 보였다.
‘저것들이!’
풍천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공손이향의 등 뒤에 나타났다.
오 장의 거리를 찰나 간에 좁힌 풍천은 한 사람의 목을 천라신수로 잡아 팽개치고, 한 사람은 냅다 발로 차서 삼 장 밖으로 튕겨냈다.
막 몸을 돌려서 빙백한천장을 펼치려던 공손이향은 급히 공력을 거두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하마터면 적 대신 자신이 빙백한천장의 공격을 받을 뻔한 상황. 가슴이 오싹해진 풍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공손 소저는 이제 뒤로 빠져 있으쇼.”
풍천은 공손이향을 물러서게 했다. 그 정도면 실전의 경험을 얻기에 충분했다.
신마성의 무사들 누구도 물러서는 공손이향을 쫓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그 틈을 타서 전장을 빠져나가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단천무령과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그들이 도주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적이 하나 줄어들면 동료가 살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다.
도주하던 삼십여 명의 신마성 무사 중 이십여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서 도주한 자는 십여 명에 불과했다.
피로 물든 초원에 즐비한 시신들.
사지가 잘리고, 목이 달아나고, 심장에 구멍이 뚫리고…….
바람이 피비린내를 한쪽으로 밀어내도 혈향은 여전히 코를 찌른다.
풍천은 인상을 쓰며 검을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그때 남궁도영이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그에게 다가오더니 포권을 취했다.
“나는 남궁세가의 남궁도영이라 하오. 도와주어서 고맙소.”
창백한 안색. 여기저기 찢어진 옷자락에 피가 배어 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그가 처했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겉모습을 떠나서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날 선 칼날처럼 날카롭던 기세도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고, 오만하게 느껴지던 눈빛도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날 유령총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그 안에서 많은 걸 깨달은 것 같아.’
화청백도 그렇고, 조환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만나 보지 못했지만 그들 역시 달라져 있을 듯했다.
그런데 자신이 풍천이란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풍천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마주 포권을 취했다.
“저는 대풍이라 합니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뭐. 하, 하.”
“구룡회 분이시오?”
“구룡회를 돕고 있으니 그렇게 봐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죠?”
“이십 리 떨어진 숲 속에서 습격을 받았소. 조금만 신중했어도 피할 수 있었는데, 설마 놈들이 이곳까지 왔을 줄 미처 몰랐소.”
“정원의 부가장으로 가던 길인가 보군요.”
“그렇소. 창천검대를 이끌고 선발대로 합류하던 길이었는데 그만…… 후우우.”
오래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을 알아볼지도 모르는 일. 풍천은 이쯤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저희는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되면 나중에 뵙죠.”
남궁도영은 이렇게 헤어지는 게 아쉬웠지만 임무가 있어 떠나려는 상대를 붙잡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늘의 은혜, 잊지 않겠소.”
당연히 잊으면 안 되지.
그래도 말은 별것 아닌 것처럼 호탕하게 했다.
“하, 하. 너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사해(四海)가 동도(同徒)라 하지 않습니까? 이런 정도 도움은 줄 수도 있는 거죠.”
“오랜만에 술 한잔 대작하며 깊은 이야기를 나눌 만한 분을 만난 것 같은데, 이리 헤어지니 정말 아쉽구려.”
풍천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칭찬에 흐뭇했다.
‘사람을 볼 줄 아는군. 확실히 전보다 훨씬 나아졌어.’
그때 남궁도영이 고개를 돌리더니 그의 아우이자 창천검대의 부대주인 남궁도하에게 말했다.
“이런 상태로 부가장에 갈 수는 없다. 세가로 돌아가서 전력을 정비한 후에 다시 가도록 하자.”
남궁도하는 남궁도영에 비해서 순한 인상을 지닌 자였다. 그런데 이번 일로 인해서 충격이 컸는지 의기소침한 기색이었다.
“제가 생각해도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만약 세가의 어른들이 형제들을 잃은 것에 대해서 책임 추궁을 한다면 내가 다 책임질 것이다. 그러니 너는 절대 나서지 마라.”
남궁도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남궁도영을 바라보았다. 세가에는 남궁도영을 싫어하는 사람이 몇 있었다. 그들은 이번 일을 핑계 삼아 남궁도영을 창천검대의 대주 자리에서 끌어내릴지 몰랐다.
“형님.”
“걱정할 것 없다. 저분들 도움을 받긴 했지만, 어쨌든 신마성을 물리쳤으니 그리 큰 벌을 내리시진 않겠지.”
담담한 표정으로 말한 남궁도영은 풍천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혹시 가시는 길이 합비 쪽이면 함께 가시지 않겠소? 한 끼 식사 정도는 대접할 수 있습니다만.”
“흠, 그럴까요?”
풍천은 마다하지 않았다. 합비까지 백오십 리 길. 그도 어차피 합비에서 밤을 보낼 생각이었으니까.
‘다섯 냥은 아낄 수 있겠군.’
2
합비에 도착한 것은 해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
거리로 보면 술시쯤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는데 부상자로 인해서 한 시진 정도 늦게 도착한 것이다.
남궁도영은 풍천 일행을 남궁세가에서 운영하는 객잔으로 데려갔다. 본래는 남궁세가로 데려가려 했는데 풍천이 거부해서 어쩔 수 없었다.
남궁도영은 풍천의 마음을 이해했다. 천의맹에 속한 남궁세가와 구룡회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신 그는 객잔의 총관을 불러서 풍천 일행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봐줄 것을 부탁하고 세가로 들어갔다.
잠시 후, 풍천은 탁자 가득 나온 진수성찬을 보고 입이 귀에 걸렸다.
요리는 열 가지가 나왔는데 듣도 보도 못한 요리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지 않는가.
풍천은 오랜만에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식사에 임했다.
‘떨어지면 또 시키지 뭐. 내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