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6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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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8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65화
165화
헉!
‘왜 그놈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거지?’
악진표는 홱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바로 위에 그놈이 있었다. 풍천을 닮은 놈이.
그는 몸을 틀며 풍천을 향해 검을 뻗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공격을 펼치기도 전에 가슴이 콱 막혔다. 그리고 뒷덜미가 바짝 당겨지면서 몸이 거꾸로 뒤집어졌다.
풍천은 천라신수로 악진표를 제압해서 땅에 내리꽂았다.
악진표는 급히 중심을 잡으려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철퍼덕!
“크억!”
땅에 처박힌 악진표는 두어 바퀴 굴러간 다음에야 부들부들 몸을 떨며 상체를 일으켰다.
순간 바로 코앞에 발바닥이 보였다.
퍽!
악진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다시 세 바퀴를 굴렀다.
“정말 그렇게 죽고 싶어? 말하면 살려준다니까?”
악진표는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눈을 쳐들었다. 눈꺼풀이 거세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주군은…… 주군은 죽어가던 나를 구해주셨다. 내 목숨은 주군의 것. 네가 아무리 다그쳐도 나는 절대 주군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비장한 목소리. 죽음을 개의치 않는 결연한 표정.
막 악진표를 후려 차려던 풍천은 그 모습을 보고 발을 내렸다.
‘꼴에 의리는 있군.’
남자의 자존심을 짓밟느니 그냥 죽이는 게 나을 것 같다.
“마음이 정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깨끗이 죽여주지.”
스릉.
검을 뽑은 풍천은 악진표의 눈앞에 새파랗게 빛나는 검첨을 내밀었다.
순간 번쩍 고개를 쳐든 악진표가 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중요한 비밀이 아니라면 말해줄 수도…….”
멈칫한 풍천은 검첨으로 목을 쿡 찔렀다.
“구차하게 굴지 말고 남자답게 깨끗이 죽으쇼.”
악진표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시간을 끌며 방법을 모색해보려고 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풍천이 곧바로 죽이려 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의리를 지키는 것도 좋지만 사는 것만 못한 것이다.
“오늘 여기서 죽었다 생각하고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공자의 말에 따르면 안 되겠습니까?”
잠깐이나마 속은 기분이 든 풍천은 악진표를 냅다 발로 차버렸다.
“에라이!”
퍽!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든 악진표는 풍천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이름이 뭐요?”
“악진표입니다.”
“시킨 사람은?”
“신무전의 용 전주님이십니다.”
“신무전주 용후정?”
악진표의 대답에 풍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공손이향이 끼어들었다.
“이봐요, 당신이 정말 용후정이란 분의 수하인가요?”
악진표는 공손이향을 힐끔 쳐다보고 힘없이 말했다.
“그렇소.”
풍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악진표와 공손이향을 번갈아 보았다.
“아는 사람인가요?”
“신검문의 용후정이란 분, 본천 용가의 사람일 거예요.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거든요.”
풍천은 어이가 없었다.
“용후정이 천외천 용가의 사람이라고요?”
“예, 령주. 그래서 말인데 이분을 그냥 보내주면 안 될까요?”
풍천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공손 소저의 마음을 모르진 않는데 나는 내 집에 쳐들어온 자를 순순히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수.”
“두 번 다시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으면 어때요?”
“이자를 어떻게 믿어요?”
“제가 책임질게요.”
“아, 그거 참…….”
“령주님의 집인 걸 알았으면 그분도 저 사람을 이곳에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풍천은 씁쓰름한 표정으로 악진표를 바라보았다. 그냥 죽여버리면 가장 깨끗했다. 하지만 공손이향이 처음으로 하는 부탁을 외면하기도 어정쩡했다.
악진표는 천외천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고통조차 잊은 채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이들의 정체가 뭔데 천외천을 들먹이는 거지?’
그때 풍천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두 번 다시 천풍장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쇼. 그럼 살려줄 테니까.”
궁금함을 참지 못한 악진표는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뗐다.
“대체 저 여인은 누구고 당신은 누구……?”
공손이향이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저는 공손이향이라고 해요. 제 이름을 말하면 당신의 주인도 당신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분께 다시는 이곳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악진표는 공손이향의 이름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이름을 알진 못했지만 공손이라는 성이 의미하는 바까지 모르진 않았다. 더구나 천외천을 자기 집처럼 들먹이는 여인이 아닌가.
“공손……? 천에서 나온 분이십니까?”
“맞아요. 그리고 이분은 천의 단천무령주세요.”
악진표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때 눈을 가늘게 뜬 풍천이 짜증 나는 투로 다그쳤다.
“맹세할 거요, 말 거요?”
고개를 처박은 악진표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매, 맹세하겠습니다, 령주.”
“만약 맹세를 어기고 한 번만 더 건들면 당신은 물론이고 용후정과 그 가족까지 모조리 죽여버릴 거요. 그러니 만약에라도 용후정이 또 천풍장을 지우라고 하면 여기로 오지 말고 자결하든 아니면 멀리 도망치든 하쇼.”
“명심하겠습니다.”
“백 문주를 죽이겠다는 생각도 다시는 하지 마쇼. 만약 그런 수작을 부렸다는 말이 들리면 내 손의 무정함을 원망하게 될 거요.”
“예, 령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십 냥은 받을 생각 마쇼.”
“예?”
“전에 준 금자 이십 냥 말이오.”
살짝 고개를 쳐든 악진표의 눈이 진짜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졌다. 그가 금자 이십 냥을 준 사람은 세상에서 딱 한 사람뿐이었다.
“그, 그, 그럼……?”
악진표는 손발은 물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오, 맙소사! 풍천을 닮은 놈이 아니라 진짜 풍천이었어!’
왜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정확한 이유를 알진 못했다. 하지만 앞에 있는 놈이 진짜 풍천이라면 그따위 이유는 눈곱만큼도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풍천이 말 한마디에 자신의 목을 칠 수 있는 신분이 되어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풍천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입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아부를 떨었다.
“천의 단천무령주가 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령주! 말씀하신 것은 아무 걱정 마십시오! 저도 천의 사람으로서 령주께선 저에게 하늘과 같으신데 어찌 명을 어기겠습니까?”
풍천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리고 갑자기 씩 웃더니 사악한(?) 눈빛으로 악진표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네.”
“예?”
“당신도 천외천의 사람이면 천외천의 법에 따라야겠죠?”
뜬금없는 말에 불안감을 느낀 악진표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럼 오늘부로 당신을 단천무령으로 임명하겠수.”
“예?”
“신검문으로 돌아갈 필요 없이 용후정에게는 그냥 편지나 한 장 써서 보내쇼. 갑자기 단천무령으로 임명되어서 임무를 마친 후에나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언제 돌아갈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순 없지만.
악진표는 물론이고 공손이향과 이곡마저 놀란 눈으로 풍천을 쳐다보았다.
풍천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계책을 생각해낸 사람처럼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멋진 생각이야, 크크크크.’
용후정은 백무천의 살해를 청부한 자다. 악진표는 그의 오른팔이고. 아마 악진표가 돌아가지 않으면 용후정은 행여나 자신의 계획이 들통 났나 싶어서 당분간 백무천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 악진표는 다른 사람과 달리 조금 심하게 굴려도 될 것 같고.
가히 ‘꿩 먹고 알 먹고’가 아닌가 말이다.
그는 반쯤 넋이 빠진 악진표에게 다른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속전속결로 상황을 매듭지었다.
“자, 장원을 치우죠. 초웅! 뭐해? 나와서 시신 좀 묻어!”
“알았어, 형!”
제7장. 천풍장을 찾아온 손님들
1
초웅은 아침이 되자 정문에 붙여놓았던 경고문을 떼어내고 곳곳에 설치된 덫도 해체시켰다.
초웅이 뒷산의 대나무를 잘라서 설치한 덫은 무려 서른 개나 되었다.
해체한 덫을 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초웅은 자신의 커다란 칼로 대나무를 잘근잘근 부쉈다. 나중에 땔감으로 쓸 생각인데 통대나무가 있으면 터질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초웅이 덫을 거의 다 부술 때쯤 삼십 대의 장한 하나가 반쯤 열린 정문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초웅은 칼을 내리치려다가 장한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누구쇼?”
장한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저게 사람이야? 불곰도 저놈 앞에선 형님이라고 하겠네.’
초웅도 금방 대소를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장한을 쳐다보았다.
‘진짜 얼굴 기네. 영락없이 말처럼 생겼어, 크크크크.’
장한은 초웅을 똑바로 쳐다보며 안으로 들어왔다.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나무에 묻어 있는 검붉은 액체. 바닥 여기저기 고여서 말라붙은 시커먼 흔적. 그것은 분명 피였다.
게다가 거대한 덩치가 부수는 대나무에도 진득한 핏물이 묻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는 나무 몇 그루만 덩그러니 자라고 있는 정원 같지도 않은 정원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뭔가를 파묻은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상황을 봐선 사람을 묻은 듯했다.
‘젠장, 괜히 찾아온 것 아닌지 모르겠군.’
두렵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들지 않았다. 신마성의 팔대신마도 우습게 여기는 자신을 이런 허름한 장원 따위가 위협할 수 없었다. 다만 지저분한 일에 말려드는 게 싫은 것뿐.
장한은 가시가 목에 걸린 기분으로 초웅에게 물었다.
“여기가 천풍장인가?”
“그런데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잠풍이라는 사람이 여기 산다고 들었네만.”
“잠풍은 우리 형인데…….”
“지금 있나?”
초웅은 고개를 돌리고 풍천이 기거하는 건물을 향해 소리쳤다.
“형! 손님 왔어!”
곧 풍천이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인피면구를 쓰지 않은 맨 얼굴이었다.
그는 장한을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얼굴이 말처럼 긴 장한. 그는 다름 아닌 풍천이 금귀옥에서 구해주었던 전광마검 허무정이었던 것이다.
“하, 하, 하. 정말로 오셨군요.”
허무정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툭 쏘아붙였다.
“내가 약속을 어길 거라 생각했나?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약속을 어기지 않는 사람이네.”
“몸은 좀 어떻습니까?”
“이제 다 나았네.”
“어째 마음에 안 드시는 표정인데요? 제가 정 마음에 안 드시면 그냥 가십쇼. 저도 뭘 바라고 구해준 것은 아니니까.”
허무정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아아아, 내 입으로 자네의 종이 되겠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어쩌겠나.”
풍천은 약속대로 종이 되기 위해서 찾아온 그를 보고 이채를 반짝였다.
“꼭 종이 될 필요는 없고 그냥 저를 좀 도와주는 걸로 하면 어떨까요? 억지로 주종관계를 맺는 것은 저도 부담되거든요.”
허무정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내심 반색했지만 겉으로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풍천을 떠보았다.
“이미 약속했는데…….”
하지만 풍천은 이미 그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있었다.
“좋으면 그냥 좋다고 하쇼. 빼지 말고.”
솔직히 두 손을 붙잡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을 만큼 기뻤다. 도와주는 걸로 끝날 수 있다면 종이 되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 그게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오죽했으면 무표정의 대명사 허무정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을까.
“정말…… 그래도 되나?”
“종이 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좋고요.”
무슨 소리!
허무정은 급히 손사래를 치며 풍천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아, 아니네. 그냥 도와주는 걸로 하지.”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데 괜찮죠?”
종이 되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아니 뒤처리까지 해야 할지 모른다.
“당연하지. 어차피 강호인이 된 이상 칼날 위에서 살아가는 인생 아닌가?”
“비밀 엄수는 기본인데 지키겠다는 약속하실 수 있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여기 온 사람이 바로 나네. 그건 걱정 말게.”
풍천은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고는 다른 건물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을 불렀다.
“다 나와보쇼. 여기 단천무령에 새롭게 합류한 분과 인사나 나누쇼.”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문 밖에서 노인 하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보게, 아직 이야기 안 끝났나?”
풍천은 그 노인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둥근 얼굴에 적당히 자라서 턱을 덮은 하얀 수염. 옆 동네 훈장처럼 사람 좋게 생긴 인상을 지닌 노인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때 허무정이 깜박 잊었다는 듯 풍천을 보며 말했다.
“황 노인도 같이 왔는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갈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해서 말이야.”
황 노인?
풍천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