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44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9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44화
144화
눈을 동그랗게 뜬 풍천은 그녀를 보고 석상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인형이 따로 없었다. 긴 속눈썹에 커다란 눈, 오뚝한 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기다란 머리카락. 거기다 유난히 하얀 얼굴에는 티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눈으로 빚은 듯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그녀의 신비함에 조금도 손상을 주지 못했다.
“저……요?”
풍천은 겨우 한마디 대답하기 위해서 목에 잔뜩 힘을 주어야만 했다.
“왜 거기 올라가 있었나요? 미끄러져서 떨어지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여인은 정말 놀란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옥구슬이 옥쟁반 위를 구르는 목소리로 물었다.
풍천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날씨도 좋고 심심해서…….”
“처음 보는 분 같은데, 누구세요?”
“이름은 대풍이고 단천무령의 신임 령주죠.”
“어머?”
여인은 대풍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듯 흠칫했다.
그러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듯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다급히 변명했다.
“죄송해요. 소문이 다 믿을 것은 못 되는데 그만 결례를 했군요.”
“괜찮습니다. 다들 그렇게 보고 있는데요 뭐. 그런데 소저는 성함이……?”
“공손이향이에요.”
차분하고 예의도 바르고, 초령이하고는 완전 딴판이군.
풍천은 공손이향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이 저절로 두근거렸다.
“처음 보는 분 같은데, 어디에 계시죠?”
용기를 낸 그는 공손이향에게 소속을 물었다.
공손이향은 머뭇거리더니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천상궁에 있어요.”
천상궁은 천주인 공손량이 머무는 곳.
공손량과는 어떤 관계일까?
천외천 내에 공손이라는 성을 쓰는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는 만큼 직접적인 관계는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천상궁에 있다면 아주 먼 사이도 아닐 듯싶었다.
‘음, 천상궁에 갈 이유가 뭐 없나?’
풍천은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공손이향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 하, 그러시군요.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로……?”
“볼일이 있어서 은천원에 다녀오던 길이에요.”
은천원은 천외천의 사단 중 은천단원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이거 제가 바쁘신 분을 붙잡고 있는 건 아닐지 모르겠군요.”
그제야 공손이향이 풍천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천주님께서 기다리실지 모르니 이만 가볼게요.”
서운하지만 어쩌랴. 가겠다는 여인 붙잡을 수도 없고.
“아, 예. 가시거든 천주님께 제가 안부 묻더라고 전해주십시오.”
“그럴게요.”
담담히 대답한 공손이향은 몸을 돌리더니 물 흐르듯 자연스런 걸음걸이로 빠르게 사라졌다.
풍천은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보이지 않자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우우,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정말 신비한 매력을 지닌 여인이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몸을 돌렸다.
‘공손이향이라고 했지? 신예한테 물어봐야지.’
더 이상 돌아다닐 마음이 없어진 풍천은 들뜬 마음을 간직한 채 자신의 거처로 올라갔다.
멀리서 백초령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킁킁거리며 듣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재밌냐, 백초령? 킁, 쳇. 여기가 그렇게 좋으면 여기서 살아! 단! 신검문에 다녀와서!’
그래야 자신이 선가장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니까!
2
“깔깔깔깔,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네. 왜 석상의 목을 잡아뜯어?”
백초령은 홍련의 이야기에 목젖이 다 보일 정도로 웃음을 터트렸다.
홍련은 오랜만에 백초령이 웃음을 짓자 절로 흥이 났다.
“그 바람에 화 노야께서 애지중지하시던 장부석의 목이 없어지고 몸통에 머리가 얹어진 모양으로 변했다지 뭐예요.”
“목이 없는 장부가 되었네? 호호호, 원로원이 시끄러워졌겠는데?”
“물론이죠. 원로원으로 돌아온 화 노야께서 그걸 보시고는 대노하셔서 단천무령주께 손을 썼대요.”
“어머, 그래서? 대풍이라는 사람이 다쳤어?”
“화 노야께서 화운장이라는 절기를 쓰는 바람에 밀리기는 했는데 다행히 많이 다치지는 않았나 봐요.”
“성격이 괴팍하고 제멋대로긴 해도 실력은 괜찮은 모양이네? 나이도 아직 서른이 안 되었다면서?”
“그건 그래요. 솔직히 화 노야의 공격을 몇 번이나 막아내고도 다치지 않은 것은 저희도 의외예요. 그런데 원로들께서는 단천무령주님을 좋게 보셨나 봐요. 오히려 화 노야를 말린 걸 보면요.”
“그래?”
“몇 분은 단천무령주님을 아주 괜찮은 젊은이라고 말했다는 소문도 있어요.”
“뭐?”
“아부하는 말재주가 괜찮은가 봐요. 그렇지 않고서야 산전수전 다 겪은 원로들께서 그렇게 생각하실 리가 없잖아요.”
“호호호호. 한 분도 아니고 여러분이 있었다던데, 그분들이 모두 그 사람의 말에 넘어갔다면 정말 보통 말재주가 아닌데?”
“천상선원을 나설 때도 령주께서 원로들에게 원망하듯이 말했는데 원로들이 령주께 미안했는지 이구동성으로 화 노야를 뭐라고 했다지 뭐예요.”
“그래? 호호호호…….”
그런데 대풍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풍천이 떠올랐다.
‘풍천과 비슷한 사람인가 보네. 신마성의 고수들은 그 사람 말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었지만…….’
풍천은 화를 솟구치게 했고, 대풍은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다르긴 했다.
하지만 성격이 괴팍하다거나 제멋대로고, 은근히 사람의 속을 뒤집어놓는다는 것은 풍천과 정말 비슷했다.
백초령은 단천무령주 대풍과 풍천을 비교하면서 지난날이 떠오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홍련도 백초령의 표정이 어두워진 걸 보고 말을 멈춘 채 눈치만 봤다.
“아가씨, 꿀물이라도 타올까요?”
“그래 주겠어?”
백초령은 홍련이 나가는 걸 보고 창문가로 고개를 돌렸다.
저 위쪽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거리가 멀어서 얼굴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사람이 단천무령주 대풍이라는 걸 알아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저 사람이 풍천이면 얼마나 좋아?’
3
신예는 공손이향을 알고 있었다. 풍천이 그녀에 대해서 묻자 신예가 수상한 눈초리로 풍천을 흘겨보았다.
“령주님이 이향 아가씨를 어떻게 아세요?”
“어, 아까 저 밑에서 만났거든.”
“이상한 짓 한 것 아니죠?”
이 꼬마 계집애가 사람을 어떻게 보고!
풍천은 눈에 힘을 주고 강력히 부인했다.
“이 령주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신예야.”
신예는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풍천을 살펴보았다.
풍천이 기분이 상해서 몸을 홱 돌렸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그제야 신예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향 아가씨는 불쌍한 분이에요.”
불쌍하다고?
“왜?”
신예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분인데…… 하늘이 아가씨의 아름다움을 시기하나 봐요.”
풍천은 그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어떤 가정이 떠오르자 갑자기 물어보는 게 두려워졌다.
‘설마…… 그런 것은 아니겠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하얀 살결은 벽라족을 봤기에 크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지만, 분명 정상은 아닌 듯 보였다.
풍천은 백초령의 일에 이어 공손이향의 일이 겹치자 하늘이 얄밉게 느껴졌다.
‘제길,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렇게 고운 소저를 왜 괴롭히는 거야?’
4
그날 밤. 마음이 싱숭생숭한 풍천은 잠이 오지 앉자 책을 읽기 위해서 서가를 뒤져보았다.
그동안 별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렇지 상관경의의 방에는 책이 제법 많았다.
이 책 저 책 살펴보던 그는 구석에 꽂혀 있는 두꺼운 책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책은 얼마나 두꺼운지 반 뼘도 넘게 보였다.
“무슨 놈의 책이 이렇게 두꺼워? 베개로 쓰면 딱 좋겠네.”
그런데 정말로 누가 베개로 썼는지 머리 크기로 둥그런 자국이 나 있었다.
풍천은 서가에서 그 책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탁자에 그 책만 올려놓자 꽂혀 있을 때보다 더 두껍게 느껴졌다.
[만무총론(萬武總論)]
만 가지 무예에 대한 이론을 집대성했다는 뜻.
가히 광오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풍천은 호기심을 가지고 표지를 넘겨보았다.
무예란 어떤 것이고, 어떻게 발전해왔으며 어떤 식으로 변화하면서 갈라졌는지 등등 일반적인 무공의 개념이 몇 장에 걸쳐서 기술되어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보편적 사실만 기술되어 있어서 몇 장을 넘기자 지루해졌다.
아마 백초령과 공손이향의 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삼십 장을 넘기지 못하고 졸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풍천은 두 여인의 일을 잊기 위해서 억지로 책을 읽었다.
‘초령이는 즐겁게 놀고, 공손 소저는 하늘이 외면하고…… 나는 멍청하게 두껍고 지루한 책이나 읽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신이 왜 이곳에서 이런 책을 읽어야 하는지 회의감마저 들었다.
해야 할 일이 하나둘이 아니거늘…….
“제길, 나도 모르겠다. 일단 눈앞에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처리해야지.”
풍천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고민이란 것은 하면 할수록 줄어들기는커녕 쌓여만 가는 괴물 같은 존재였다. 맞서 싸워봐야 이길 수 없는 상대.
그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기겠다고 억지를 부릴 마음이 없었다.
‘그래도 이 책이 고민보다는 낫네. 어쨌든 줄어들기라도 하잖아.’
조금 지루해서 그렇지.
풍천이 책에서 눈을 뗐을 때는 창밖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날을 샌 것이다.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 풍천은 화들짝 놀라서 창문을 열고 정말 날이 샌 것인지 확인해보았다.
창문을 열자 뿌연 안개가 먼저 그를 반겼다. 그리고 새벽안개를 헤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날을 새다니. 사부님이 살아 계셨으면 내 말을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다시 탁자로 돌아온 풍천은 책을 바라보았다. 이제 삼십여 장만이 남아 있었다.
앞부분은 그래도 제법 손때가 탔었는데 반을 넘기면서부터 손때가 거의 묻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오십여 장은 아예 보지도 않은 듯했다.
‘하긴 누가 이걸 읽겠어?’
뒷부분은 무공에 대한 총론이 아니었다.
글을 쓸 때 마음의 흔들림이 있었는지 아니면 갑자기 도를 깨우치기라도 했는지 몰라도 선문답을 하는 것처럼 뜻을 알기 힘든 글이 많았다.
글에 대해서 좀 아는 사람들조차 그 글을 본다면 고개를 저으며 책을 덮기 십상일 것 같았다.
자신처럼 멋모르고 무작정 읽는다면 몰라도.
‘음, 졸린데 마저 읽을까, 아니면 나중에 읽을까?’
사실 결론은 이미 난 상태였다. 불가항력의 상황이 아닌 이상 그는 중도에서 멈춘 적이 없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풍천의 손은 이미 다음 장을 넘기고 있었다.
‘남자가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말이야.’
그런데 열 장쯤 남았을 때였다. 지금까지와 조금 다른 글이 눈에 들어왔다.
제삼십삼 장(第 三十三 章).
본인은 그러한 깨달음을 얻은 후 삼십 년 동안 세상을 돌아다니며 각 방면에서 세상을 위진시키는 일백무공을 직간접적으로 섭렵해보았다. 그리고 그중 서른세 가지 무공을 천고의 절기로 인정했다.
본천의 십대무공 중에선 천상귀원공(天上歸元功)과 용화신공(龍華神功), 혼천무령기(混天武靈氣)가 그중 상위에 속했으며 광양검결(洸揚劍訣)을 비롯한 나머지도 능히 천하의 절기들에 손색이 없었으니…….
강호의 정파에서는 소림의 반야대금강력, 무당의 태극혜검, 화산의 자하신공, 남궁세가의 제왕검…… 일검회의 무원검, 검성의 대천검력…….
마도사파에서는 혈천마공, 마마지존공, 패황마력, 천귀사혼공, 혈왕기…….
하지만 이것이 결코 천하무공의 모든 것은 아닐지니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거나 절전된 절세의 공부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랜 옛날, 선조들께서 칭송해 마지않았던 벽력의 주인께서 지닌 능력이 바로 그중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분의 위대한 능력을 뉘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검에 땅을 가르고, 일검에 하늘을 부수니 그분의 능력은 당시 하늘에 이르렀다 했다. 오죽하면 본천의 조사께서도 그분을 형으로서 대했겠는가.
하여 삼십 년 만에 천으로 돌아온 본인은 그분의 하늘에 닿았던 능력을 파악하는 일을 삶의 마지막 과제로 삼고 연구해보았다. 그리고 그분은 일반 사람과 전혀 다른 진기운용을 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음과 양이 극한의 힘으로 충돌하는 충격을 어찌 버틸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진기가 강할수록 충격 역시 커질 것인즉 인간의 몸으로 그 충격을 견딘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런 결론을 내린 본인은 그분의 진기운용 방법에 대해서 연구해보았는데…….
풍천은 그 부분에 이르러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침을 꿀꺽 삼켰다.
‘진기운용의 방법은……?’
다음 글은 장을 넘겨야 했다.
종이를 잡은 풍천의 손끝이 달달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