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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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2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40화
140화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들지 않았으면 떨어지지도 않았을 거 아니오?”
“누가 그렇게 약한 줄 알았수? 좌우간 걱정 마쇼.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풍천은 툭 쏘듯이 말하고 머리를 목이 있는 곳에 대고 눌렀다. 그러자 다섯 치가량의 가느다란 목이 부스러지고 몸통 위에 머리가 놓였다.
한마디로 목이 없는 석상이 돼버린 것이다.
두 중년인은 입을 딱 벌리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빌어먹을, 화 노야가 제일 싫어하는 모습이 되어버렸어.’
‘화 노야는 목이 짧고 굵어서 목도 없는 놈이라고 놀림당하는 걸 무척 싫어했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풍천은 자신이 만든 작품(?)에 매우 만족했다.
“머리가 삐딱한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보기 좋네 뭐. 이제 갑시다.”
키가 큰 중년인이 아연한 표정으로 사정하듯이 말했다.
“령주, 그 바위는 화 노야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바위요. 아마 바위가 이렇게 된 것을 알면 그분께서 대노하실 거요. 대체 어쩌자고 이러신 거요?”
“그렇다고 죽이기라도 하겠수? 걱정 마쇼. 정 뭐라고 그러면 제가 다 책임질 테니까.”
“정말이오?”
“하, 하. 이 대풍이 다른 것은 몰라도 약속 하나는 칼입니다. 해결사는 그게 생명…… 아니 사나이 대장부는 원래 그래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음, 하, 하, 하.”
어쩌랴, 이미 쌀은 익어서 밥이 다 되었는데.
‘나도 모르겠다. 이 인간이 책임지겠다고 하니 추궁하면 사실대로 말해야지.’
‘단천무령도 이제 갈 데까지 갔군, 후우우우.’
두 중년인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풍천을 안으로 안내했다.
“아룁니다. 단천무령의 신임 령주인 대풍 령주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키가 작은 중년인이 삼층 전각에 대고 공손한 어조로 보고를 올렸다.
곧 안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오라 해라.”
“예, 노야.”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키 작은 중년인이 힐끔 풍천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말씀, 잊지 마시오.”
사람 닮은 바위에 대한 약속을 말함이다.
풍천은 별걱정 다한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걱정 마시라니까.”
중년인은 힘없이 고개를 젓고는 전각의 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오, 령주.”
삼층 전각은 천상선원의 원로 열아홉 사람이 큰일이 있을 때 모여서 회의를 하는 곳이었다. 가끔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 위해서 모이기도 하고.
풍천이 들어갔을 때 안에는 일곱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풍천은 전각 안을 쓱 둘러보고 노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노인들이 앉아 있는 커다란 탁자 앞에 멈춰 선 그는 힘차게 포권을 취하며 씩 웃었다.
“단천무령의 신임 령주인 대풍이라 합니다.”
노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어째 소문과 조금 다른데?”
“그렇게 형편없는 정도는 아닌 것 같군.”
“당장 단천무령의 일을 처리하기에는 조금 약하겠지만 제대로 가르치기만 한다면야…….”
“하긴 천주께서 되도 않을 사람을 임명하시진 않았겠지.”
소문에 의하면 괴팍하고 행실이 가볍고, 버릇도 없고 완전히 제멋대로라고 했다. 그런데 인사하는 태도나 말하는 걸 보면 소문과 많이 달랐다.
노인들이 힐끔거리며 웅성대자 풍천은 담담히 웃으며 목소리에 무게를 담아서 말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음, 내가 생각해도 괜찮은 목소리란 말이야.’
그가 평소와 달리 행동하는 것에는 나름 계산이 깔려 있었다.
천상선원은 천외천의 원로들이 모인 곳. 좋게 보여서 나쁠 게 없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자신을 끌어올려 줄 동아줄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도 마음만 먹으면 대영웅처럼 굴 수 있는 놈이우.’
그때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백발의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다.”
“뭐든 물어보시지요.”
“상관경의와는 어떤 사이냐?”
“참 좋은 분이셨죠. 제가 상관 노형과 만난 것은…….”
풍천은 눈꺼풀을 잘게 떨며 아련한 표정을 지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관경의를 남창에서 만났고, 상처 입은 상관경의를 자신이 구해주었고, 신마성의 포위망이 풀리자마자 남창에서 도망쳐 나왔으며 상관경의가 죽기 전에 자신에게 령주의 지위를 넘겼다는 것까지.
물론 그 와중에도 그간에 벌어진 일을 실제보다 배는 처절하게, 듣는 이의 가슴이 찡할 정도로 포장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단, 상관경의가 누구에게 죽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들 중 누가 대공의 사람인지 모르는 상태. 천응단에 대해서 언급하는 순간 보이지 않는 칼들이 그의 등을 노릴 것이었다. 말한다 해도 증거가 없는 이상 믿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그러니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되어서 여기로 온 것입니다. 정말…… 목숨을 걸고 왔지요.”
말을 마칠 때쯤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실 풍천은 자신의 이야기에 취해서 눈 가장자리가 찡한 상태였다.
백발노인, 용진평이 침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가 상관경의를 죽였는지 아느냐?”
“정확히는 모릅니다. 저는 확실치도 않을 걸 입 밖에 내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그건 그 정도로 끝냈으면 합니다.”
“상관경의가 말해주지 않더냐?”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일곱 명의 노인들은 일제히 풍천을 주시한 채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풍천은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몇 마디 하시긴 했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긴 곤란합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여긴 천상선원이다. 천상선원에서는 어떤 말을 해도 상관없다. 우리가 책임질 테니까.”
“죄송합니다만 저는 저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한쪽에서 하얀 수염을 쓰다듬고 있던 노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냉랭히 다그쳤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너의 입을 강제로 열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느냐?”
풍천은 눈에 힘을 주고 결연한 말투로 말했다.
“저를 죽인다 해도 천외천에 해가 되는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상관 노형의 유훈을 어기는 일이 되니까요.”
노인들은 더 다그치지 못하고 풍천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소문과는 너무 달랐다.
그때였다. 용진평 반대쪽에 앉아 있던 빼빼한 노인이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곧장 풍천을 향해 날아가며 손을 뻗었다.
풍천은 얼음판을 미끄러지듯 일체의 움직임도 없이 뒤로 일 장을 물러났다. 그리고 화살처럼 날아드는 노인을 향해서 손을 엇갈려 휘둘렀다.
타다다다닥.
콩 볶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손이 허공에서 십여 회 부딪쳤다.
풍천이 예상했던 것보다 제법 강하게 대응하자 허공에 뜬 채 손을 휘두르던 노인의 눈썹이 역팔자로 꺾어졌다.
풍천은 천라신수로 노인의 공격을 모두 막아낸 후 짐짓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뒤로 세 걸음을 물러섰다.
바닥에 내려선 등소척은 이마를 찡그린 채 풍천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우세한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왠지 마음이 찜찜한 것이다.
“제법이구나, 용조십이수(龍爪十二手)를 모두 막아내다니.”
풍천은 나름 공손한 자세로 포권하며 겸양을 떨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노야.”
이제 원로들의 마음은 소문이 와전되었다는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예의 바르고, 무공도 쓸 만하고, 거기다 젊기까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단천무령의 령주로서 충분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상석에 앉아 있던 노인, 공손화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천주께서 너를 왜 인정했나 했더니 그럴 만도 하구나.”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풍천은 끝까지 겸양한 자세를 유지했다.
어차피 상대를 속이려 했으면 끝까지 속여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괘씸죄까지 더해져서 욕을 두 배로 먹게 될 것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콰당.
전각문이 거세게 열리고 머리와 수염이 사자 갈기처럼 뻗친 노인이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용진평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 노인에게 물었다.
“화 노제, 무슨 일인데 그리 화난 표정인가?”
화 노제라 불린 노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풍천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네놈이 대풍이란 놈이냐?”
‘이 늙은이가 화 노야군.’
풍천은 몸을 돌리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가 왜 노인의 화난 까닭을 모르랴.
“그렇습니다, 화 노야.”
“네놈이 저 앞에 있는 장부석(丈夫石)의 목을 떼어냈느냐?”
“소생이 떼어냈다기보다는 너무 약해서 절로 떨어진 것이지요.”
“그래? 네놈이 떼어내긴 떼어냈단 말이지?”
“제가 건들지 않았어도 목이 너무 가늘어서 언젠가는 떨어졌을 겁니다.”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그리고 어차피 말이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만, 솔직히 그렇게 계집처럼 목이 가는 것보다는 굵은 것이 사나이 대장부답지 않겠습니까?”
화문오는 풍천의 말에 무심코 대답했다.
“그거야…… 그렇지.”
풍천이 말한 모습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원로원 사람들은 그런 모습의 자신을 놀리기에만 바빴지 한 번도 칭찬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칭찬을 들으니 얼떨떨했다.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풍천은 화문오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하고 웃음을 지었다.
“하, 하, 하. 그거 보십시오. 그러니 화를 삭이시고 차분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화문오의 화를 완전히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더구나 웃으면서 능구렁이처럼 대충 넘어가려는 풍천을 보니 더 화가 났다.
“차분하게? 좋아 차분하게 생각해보지. 그런데 그 전에 네놈의 목부터 부러뜨려놓고 봐야겠다, 이놈!”
화문오는 버럭 소리치며 풍천의 멱살을 잡아갔다.
풍천은 비영산화보를 펼쳐서 뻗어오는 손을 피하고 순식간에 화문오의 뒤로 돌아갔다.
“이 미꾸라지 같은 놈이!”
더 화가 난 화문오는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돌리며 쌍장을 휘둘렀다.
순간 그의 쌍장에서 붉은빛이 떠올랐다.
그걸 본 원로들이 대경하며 소리쳤다.
“화운장(火雲掌)!”
“멈추게!”
풍천은 붉은빛을 띤 장력이 밀려들자 맞받는 척하며 뒤로 몸을 날려서 전각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상대의 장력에 적잖은 충격을 입은 것처럼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풍천은 화문오뿐만이 아니라 모든 원로를 싸잡아서 원망하듯 말했다.
“저는 원로들께 최대한 예의를 지켰다 생각했는데 구경만 하시는 걸 보니 원로분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군요.”
원로들은 화문오로 인해서 자신들까지 원망의 말을 듣게 되자 혀를 차며 화문오를 다그쳤다.
“화 형, 단천무령의 령주에게 이게 무슨 짓이오?”
“자네 정말 왜 이러나?”
“허어, 저렇게 올바른 청년을 바위 하나 때문에 괴롭히다니, 쯔쯔쯔…….”
“문오! 정녕 천상선원의 체면에 먹칠을 할 생각인가?”
아무리 화문오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해도 화운장까지 펼쳐서 대풍을 공격한 것은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갑자기 왜 이래?’
화문오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원로들이 대풍을 부른 것은 소문을 듣고 대풍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여차하면 천주의 잘못된 인사방침에 경고도 줄 겸.
그래서 바위의 머리를 떼어낸 죄를 확실하게 물을 생각이었거늘, 어찌 된 것이 전부 대풍의 편을 들고 있지 않은가?
“이봐, 저놈은 내 장력에 별 충격을 받지…….”
그때 풍천이 굳은 표정으로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한낱 바위만도 못한 단천무령의 령주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르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