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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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7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35화
135화
“어? 알고 계셨습니까?”
풍천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등가위가 상관경의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풍천의 마음을 읽은 듯 공손량이 씁쓸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내가 그걸 아는 게 이상하게 보이느냐?”
“아뇨, 그게 아니라 놈들이 비밀로 처리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네 생각처럼 그들은 비밀로 처리했다. 다만 내 눈과 귀가 남들 생각보다 밝아서 알게 된 거지. 어디 이제 경의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보거라.”
입은 웃고 있는데 눈에서는 웃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깊은 슬픔이 두 눈의 고요한 호수 저 밑바닥에 깔려 있다.
풍천은 자신도 모르게 침울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웃으면서 죽었죠.”
양곽연은 힐끔 풍천을 흘겨보았다.
‘이 자식이 감히 뉘 앞이라고 농담조로 말을 하는 거야?’
하지만 공손량의 입가에 웃음이 매달려 있는 걸 보고 꾹 참았다.
“편안했나 보군.”
“제가 편안하게 보내드렸죠.”
“음?”
“제가 숨을 끊어드렸거든요.”
말투는 가벼웠다. 식사를 하던 중에 한마디 던진 농담처럼.
하지만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천상궁의 내실이 백만 근 무게의 긴장으로 짓눌렸다.
“네놈이……!”
양곽연이 더 참지 못하고 잇새로 노성을 흘렸다.
그러나 공손량은 이채 띤 눈으로 풍천을 보며 조금 전과 별다름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럼 정말 편히 갔겠구나.”
“사실 저는 하기 싫었는데 그 양반이 자꾸 부탁하지 뭡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손을 썼죠.”
“아무래도 그게 낫다 생각했겠지.”
“뭐, 꼴 보기 싫은 사람들 손에 죽는 것보단 낫죠.”
공손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관경의를 공격한 자들에 대해서 물어볼 법한데도 그에 대해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일체의 분노도 내비치지 않았다.
풍천도 말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니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아이에게 낙성천류검과 비월신검을 배웠다고?”
“예.”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얻은 것이 없더냐?”
“무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물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공손량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뭐든 말해보거라.”
“무공은 제가 지녔던 것을 가르쳐 주신 거라 말씀드리기가 뭐하고요. 대신 이거…….”
뇌정천결은 벽라동에서 얻은 것이다. 천외천, 천상신문의 주인이라면 알지도 몰랐다.
풍천은 무공에 대한 것을 대충 얼버무리고 상관경의에게 받은 반지를 꺼내 내밀었다.
“이 반지를 저에게 줬죠.”
공손량의 눈빛이 조금 더 강하게 흔들렸다.
어떻게 보면 안도의 눈빛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슬픔이 깃든 눈빛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긴, 제자가 죽었으니 슬프지 않으면 그게 이상했다.
“녀석, 나를 많이 원망했겠군.”
공손량은 나직이 말하고는 한참 동안 반지를 바라보았다.
풍천은 그런 공손량을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벽라동을 나올 때만 해도 천상신문을 위선의 무리로 생각했다. 남창에서 상관경의 일행을 만난 후에도 천외천 역시 겉으로만 정의를 외칠 뿐 마도나 다름없다 여겼다.
그러다 상관경의와 지내면서 마음이 조금 바뀌었는데, 공손선우와 공손무백을 보고 결국 위선의 무리는 별수 없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공손량의 모습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상관 노형 이야기를 듣고 대충 짐작은 했지만, 여기도 정말 복잡하게 얽혀 있군.’
그때 공손량이 반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제 네 것이니 받아라.”
풍천은 그답지 않게 엄청난 양보심을 발휘했다. 반지를 보고 슬퍼하는 공손량의 모습을 보니 그냥 받으면 나쁜 놈처럼 보일 것 같았다.
“원하신다면 가지셔도 됩니다.”
“흘흘흘, 곧 죽을 늙은이에게 이런 반지가 무슨 소용이겠느냐?”
양보는 한 번이면 족했다. 풍천은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반지를 건네받았다.
“천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제가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 반지를 보니 경의가 너에게 령주의 자리를 물려준 게 확실하구나. 게다가 그 아이의 무공까지 익히고 있고 말이다.”
“그럼 저를 단천무령의 령주로 인정하시는 겁니까?”
“너는 단천무령의 령주가 어떤 지위인지 아느냐?”
“모르는데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눈을 말똥말똥 뜨고 고개를 젓는 풍천의 태도에 공손량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눈에서도 열기가 비쳤다.
“클클클클. 그 녀석, 정말 재미있군.”
‘쳇, 모르니까 모른다고 했을 뿐인데 뭐가 그리 재미있습니까?’
풍천은 속으로 꿍하면서도 누군가가 말을 해주기만 기다렸다. 그래 봐야 방 안에는 공손량과 양곽연밖에 없지만.
공손량이 꿍해 있는 풍천을 보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단천무령은 천주의 명을 받아서 천하의 안녕에 해가 되는 일을 막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느니라.”
‘으잉? 뭔 임무가 그리 거창해?’
해결사에게 천하의 안녕을 지키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더구나 단천무령은 황산에서 부상을 입은 자만 몇 남고 남창에 갔던 사람은 다 죽었지 않은가.
“으음, 저 혼자 하기에는 힘든 일 같은데요? 남은 단천무령도 대부분 부상자들이라던데…….”
“혼자서는 당연히 힘들지.”
“하, 하. 천주님도 그리 생각하시죠?”
풍천은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며 얼굴이 밝아졌다.
‘귀찮고 힘들게 그런 일을 내가 왜 해?’
하지만 공손량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혼자서는 힘들 테니 단천무령을 더 뽑도록 해라.”
“예?”
풍천의 눈이 커졌다.
이름뿐인 지위인 것 같아서, 백초령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상관경의의 청을 받아들였는데 일이 요상하게 꼬여간다.
“저기, 저는 여기에 아는 사람도 없고, 뽑는다 해도 제 말을 무조건 따르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단천무령의 인원이 꼭 많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건 걱정할 것 없다. 본천의 사람 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령주가 택하면 그 사람이 곧 단천무령이니라. 인원은 스물네 명까지 둘 수 있으니 너무 서두르지 말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뽑도록 해라.”
‘서두르지 말라고? 그럼 일 년에 한 명 뽑아도 되겠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점 하나는 마음에 든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풍천은 느긋하게 두어 가지 질문을 더 했다.
“저기, 천주님. 단천무령으로 어떤 사람을 택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지켜야 할 것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본천 내에선 원로와 스물여덟 명의 고위급간부, 그리고 일부 특별한 위치에 있는 몇몇을 제외하면 누구든 상관없다. 강호의 인물 중에선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지.”
풍천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개를 쓱 돌려서 양곽연을 바라보았다.
순간 양곽연이 제풀에 놀라서 다급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십팔 명의 간부 중 하나다. 그러니 나는 택할 수 없다.”
“누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저도 대주님처럼 인상 험한 분은 별롭니다.”
“그, 그래?”
그럼 다행이긴 한데 어째 입맛이 썼다.
양곽연은 풍천의 옆모습을 보며 속으로 씹었다.
‘네 인상은 좋은 줄 알아? 건방진 놈이 어디서 인상 가지고 시비야?’
공손량은 양곽연의 마음을 읽고 실실거리며 웃었다.
“흘흘흘흘.”
단 시간에 이토록 많이 소리 내어 웃어본 게 얼마 만인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웃다보니 제자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많이 덜어졌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공손량은 풍천을 손자 보듯 푸근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낙성천류검과 비월신검으로는 령주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경의가 익혔던 검을 너에게 전해줄 것이니 그걸 익히도록 해라. 낙성과 비월은 그 검을 위한 입문 검, 그걸 제대로 익혔다면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게야.”
주는 것은 일단 받아야 한다. 사양하다가 상대가 취소하면 자신만 손해인 법. 풍천은 환한 표정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천주님. 그러잖아도 뭔가 미진하다 싶었는데 말이죠.”
“다른 것을 원한다면 천무동에 들어가서 찾아보도록 해라. 본천의 정식 무사라면 누구든 들어갈 수 있으니까.”
천무동(天武洞)?
“저기, 혹시 천무동이라는 곳이 동굴 아닙니까?”
“천무동은 동굴을 개조해서 만든 지하 무고다. 그곳에는 본천의 조상들이 모아놓은 비급이 수백 종이나 있지. 운이 좋으면 아주 대단한 무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떠냐? 네 운을 한번 시험해보지 않겠느냐?”
대단한 무공이 아니라 엄청난 절대 무공이 있어도 풍천은 그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지하나 동굴이라면 이가 갈렸다.
어차피 누구든 들어갈 수 있는 곳에 뇌정천결이나 천라신수보다 뛰어난 무공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저는 동굴이나 지하가 싫습니다. 그러니 천무동에 들어가는 것은 사양하겠습니다요.”
풍천의 속을 모르는 양곽연은 어이가 없었다.
천무동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되는 곳이 아니었다. 따로 사부가 없던 자신은 그곳에서 얻은 무공으로 호천대주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간부들 중 몇 사람도 자신처럼 천무동의 무공으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 상태에서 능력만큼 얻을 수 있는 곳. 천무동은 그런 곳인 것이다.
“멍청하기는, 천무동이 어떤 곳인 줄 알고…… 은혜를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싫어?”
풍천은 양곽연을 가자미눈으로 보며 툭 쏘아붙였다.
“그렇게 좋으면 대주님이나 들어가쇼.”
“뭐야? 그렇게 말해도 못 알아듣다니, 정말 멍청한 놈이군.”
“어허! 놈, 놈, 하지 마쇼. 저도 단천무령의 령주란 말입니다. 가만? 천주님, 령주하고 대주하고 누가 높죠?”
움찔한 양곽연의 표정이 급변했다.
공손량은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고 말했다.
“각자의 임무가 다를 뿐 고하를 따질 수 없다.”
“킁, 그래요? 령주가 더 높으면 좋은데…….”
풍천은 아쉬움 가득한 어조로 말하고 양곽연을 바라보았다.
“할 수 없죠. 나이 어린 제가 참는 수밖에. 하지만 이제부터는 양 형도 함부로 놈, 놈, 하지 마쇼. 듣는 놈 기분 나쁘니까.”
양 형?
양곽연의 얼굴이 벌게졌다. 하지만 발작은 하지 못하고 풍천을 쏘아보기만 했다.
그때 공손량이 두 사람을 말렸다.
“들어가기 싫으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대신 언제든 들어가고 싶으면 말하도록 해라.”
풍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감사합니다, 천주님.”
“대신 내가 주는 검법을 빠른 시일 내에 익히지 못하면 강제로 집어넣을 것이니라.”
“걱정 마십쇼. 열심히 익혀서 양 형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겠습니다.”
순간 양곽연의 부리부리한 두 눈에서 불길이 쏟아졌다.
공손량은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즐겁기만 했다.
‘정말 비슷하군. 그 친구도 천무동에 들어가는 걸 무척 싫어했지.’
숨 막히는 답답함만 느껴진다고 했다. 어른들이 강제로 집어넣으면 아무도 보지 않는 두꺼운 책을 베개 삼아서 잠만 자다가 나왔다.
‘만무총론이라 했던가?’
기이한 것은 그러면서도 무공은 자신에게 뒤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남들은 아무도 모르지만, 겉으로 우둔해 보이는 그 친구는 천재였다.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천재.
어쩌면 그래서, 자신의 곁을 떠난 그 친구에게 더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하늘도 놀랄 자질을 지닌 사람이 자신의 옆이 아닌, 자신이 다스릴 수 없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 엄청난 두려움으로 다가온 것이다.
‘미안하네, 친구.’
공손량이 옛 친구를 떠올리고 있을 때 풍천이 넌지시 대답했다.
“그런데 저는 어디서 지내야 합니까?”
“경의의 거처를 너에게 줄 테니 그곳에서 지내도록 해라. 그리고 경의의 방에 있는 것은 이제부터 모두 네 것이다.”
풍천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밝아졌다. 공짜로 뭐가 생긴다는 것은 언제든 즐거운 일이었다.
3
불귀곡의 길이는 십여 리나 되었다.
좌우에는 높이를 짐작키 힘든 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하늘에는 흐릿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
아마 위에서 본다면 안개만이 보일 것이었다.
접근하기 힘든 미지의 계곡.
더구나 계곡이 있는 주위의 산촌 마을은 백하처럼 천외천과 연관된 곳이어서 외지인이 접근하면 곧장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불귀곡을 중심으로 수십 리 이내가 천외천의 감시망 하에 있는 것이다.
풍천은 그 이야기를 감능하에게 들으며 상관경의의 거처로 갔다.
상관경의의 거처인 무심헌(無心軒)은 천상궁에서 백여 장 떨어진 외곽에 있었다.
감능하는 무심헌의 앞마당에 들어서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가 상관 령주님의 거처인 무심헌입니다.”
풍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마당 옆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뒷마당에는 장정 다섯이 팔을 둘러야 겨우 손을 맞잡을 것 같은 거대한 고목이 서 있어서 제법 운치가 느껴졌다.
특히 그곳이 풍천의 마음에 든 것은 근처의 가장 가까운 전각이 이십 장이나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다만 식사를 하기 위해서 백 장이나 내려가야 한다는 점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식사를 배달해줄 수하부터 하나 만들까?’
풍천은 감능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