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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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27화
127화
장로들은 누군가가 정보를 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정신없이 달려갔다.
하지만 자신들이 갔을 때 호은명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두 사람이 있었다. 사건이 알려지기도 전에 말이다.
‘범인이 사건 현장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보통 사건이 알려진 후의 일이다. 그런데 그자들은 알려지기 전에 나타났어. 왜?’
훔친 것도 없고 뒤적거린 흔적도 없었다. 다시 돌아올 이유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때 문든 어떤 생각이 든 강매설은 풍천을 직시했다.
“호 대협에게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 뭐죠?”
풍천은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강매설을 응시했다.
“알면 다칠지 모르는데 그래도 알고 싶소?”
“제가 그렇게 나약한 여자였다면 천의맹의 추마당에 몸담지도 않았을 거예요. 말해보세요. 만약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그 일에 대해서 제가 책임지고 다시 조사해보겠어요.”
‘추마당 사람이었나? 거 보기보다 대찬 여자군.’
풍천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추마당은 마인 추적 임무를 수행하는 부서로 천의맹과 척을 진 마도의 무사들에게는 지옥사신과 같았다. 하기에 남다른 각오가 없으면 추마당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한편으로는 강매설이 추마당 사람이라는 말에 사람을 제대로 짚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하늘 밖의 세력에 대해서 들은 적 있소?”
“하늘 밖이라고요?”
“모르는 모양이군. 그럼 말이 안 통하는데.”
자존심이 상한 듯 그러잖아도 날카롭던 강매설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자세하게 이야기해보세요.”
풍천은 둘러싸고 있는 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언제 죽일 것처럼 싸웠냐는 듯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에 힘을 준 풍천은 그들을 쓰윽 쳐다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당신들이 모르는 곳이 존재하죠. 신마성이 신마비원을 열고 구룡회를 집어삼키려 하듯이.”
풍천은 이야기의 극적인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 슬쩍 신마성에 대한 이야기를 흘렸다.
그 정보를 몇 번 우려먹었더니 이제는 분위기까지 제법 괜찮게 잡혔다.
아니나 다를까, 다섯 사람의 표정이 급변했다.
“예?”
“그게 무슨 말이오?”
“아미타불, 신마성이 구룡회를? 믿을 수 없는 말이구려.”
“흥, 또 헛소리를 하는구나.”
“송구 도우, 잠깐 저 친구의 말을 들어봅시다.”
풍천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쯤 신마성이 움직였을지도 모르는데 그것도 모르면서 천하 정의를 운운하다니, 천의맹도 문제가 많군.”
분노와 당혹감으로 다섯 사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풍천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남창에서 신마성과 정체불명의 고수들이 커다란 싸움을 벌인 것은 알고 있소?”
없다. 없으니 할 말도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자신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풍천은 크게 인심을 써서 돈도 받지 않고 몇 가지 사실을 말해주었다.
“신마성에서는 팔대신마 중 두 사람과 신마비원의 고수들이 나섰는데, 그 싸움에서 신마성의 정예 무사 백여 명이 죽었고 개중에는 일도천살 유광도 있었소. 그런데 그들을 죽인 사람들의 숫자가 몇 명인지 아시오?”
풍천은 말을 끊고 손가락을 하나 세운 후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껏해야 열 명도 되지 않았소.”
다섯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거야? 미친놈!
대부분은 그런 표정이었지만 강매설은 이상하게 풍천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들이 하늘 밖이라는 곳에서 온 사람들이란 말인가요?”
“그렇소. 그래서 나는 그곳을 조사하려고 여기 해 형과 살수계에서 은퇴한 흑야살 노인에게 천외라는 이름과 연관된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것이오.”
초령이를 구해야 하니까!
풍천은 유난히 ‘은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하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호 대협의 살해범으로 천의맹에 쫓기고 있다니. 이 어찌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있겠소?”
분노가 스민 듯 힘이 실린 음성.
다섯 사람은 입을 열지 못하고 풍천만 바라보았다.
풍천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표정과 목에 힘을 주려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도 말 몇 마디로 오해를 푸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생각에 답답함을 꾹 참고 다섯 사람을 설득했다.
“게다가 한 여자가 그들에게 납치되었소. 나는 반드시 그 여자를 구해낼 것이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이 천하를 뒤엎을 힘을 지녔다 해도!”
호은명의 죽음과 상관없는 말이었다. 말이 샛길로 샌 것 같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의 피가 끓어오를 말인 것만은 분명해서 강매설과 황보안의 표정이 살짝 달아올랐다.
‘역시 저 두 사람은 뭔가를 아는군. 저 땡중과 말코도사들은 감정도 없나?’
풍천은 땡중과 말코도사는 제쳐두고 강매설과 황보안을 향해 말했다.
“호 대협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여기 해 형과 흑야살 노인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오. 믿든 말든 그것은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오.”
“좋다. 정말 그들의 짓이 아니라면 우리와 함께 가자. 가서 장로님들께 해명해봐라!”
기세에 눌린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듯 송구가 소리쳤다.
물론 풍천은 그럴 마음이 벼룩의 간만큼도 없었다.
“내가 왜? 정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다면 장로들이 직접 나를 찾아와야지.”
“뭐야?”
송구가 버럭 소리쳤지만 풍천은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 쳐다보지도 않고 해동산에게 말했다.
“해 형, 갑시다.”
“잠깐만요!”
강매설이 급히 손을 들어 막았다. 풍천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내 앞을 막을 생각이오?”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무작정 보내줄 수도 없어요.”
정말 귀찮군. 다 죽일 수도 없고…….
풍천은 짜증을 내듯이 쏘아붙였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먼저, 당신은 누구죠?”
“내 이름은 대풍이오.”
고금제일의 해결사지.
“지금 어디를 가는 길이죠?”
천외천에.
‘가만? 천외천의 존재를 이들이 확실하게 아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왱 소리가 나도록 잔머리를 굴린 풍천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들도 어차피 하늘의 눈을 피하기에 늦었군.”
“무슨 말이죠?”
“조금 전 내가 사실을 알면 다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 이유가 뭔지 아시오?
강매설의 표정이 열흘 지난 전병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천외를 알게 된 이상 우리도 그들의 표적이 될지 모른다는 건 가요?”
‘얼굴은 그저 그런데 머리는 정말 똑똑한 여자군. 초령이와는 정반대야.’
풍천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고 있소. 오죽하면 수백 년이 지나도록 세상이 그들을 모르겠소?”
“수백 년 동안 세상눈을 속인다는 게 말이 된다고 보세요?”
“당연히 말이 안 되죠.”
“예?”
“그래서 그들이 무서운 자들이라는 거요. 말이 안 되는 일을 말이 되게끔 해온 자들이니까. 어쩌면…… 천의맹에도 그들의 사람이 깊숙이 들어앉아 있을지 모르죠.”
풍천을 노려보고 있던 송구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헛소리 말아라!”
화산의 명진도 눈을 치켜떴다.
“그대가 감히 본맹을 모욕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강매설만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풍천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풍천의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다. 너무 허황돼서 믿는다는 것 자체가 우습기만 했다.
그런데 풍천의 말을 듣는 동안 그녀가 추마당의 지하 서고에서 오래된 정보들을 보고 가졌던 의문점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천의맹이 창건된 이래 미해결사건으로 남은 것이 적지 않았다. 개중에는 충격적인 사건임에도 의아할 정도로 조용히 넘어간 것도 있었는데 한두 건이 아니었다.
‘내가 파악한 것만 해도 십여 건이나 되었지.’
그녀는 그걸 보고 ‘왜?’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워낙 오래전의 일이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지금은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 사건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건 기록들 중 몇 곳에 ‘정체불명의 세력으로 판단됨’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었다.
‘만약 그 일들이 저자가 말한 천외와 관련된 거라면?’
엉뚱한 상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이 깊어질수록 가슴 깊숙한 곳에서 기이한 열기가 일었다.
그녀는 풍천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믿기 힘든 말이에요. 우리에게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몰라도.”
“당장 여기서 증명할 수는 없소.”
“여기서는 못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역시 똑똑해! 말하기가 정말 편하군.
“물론이오. 당신들이 원한다면 그들의 존재를 직접 확인하게 해주겠소.”
강매설은 물론이고 나머지 네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인가요?”
“나는 말이오, 지금까지 한 번도 헛소리를 한 적이 없소. 믿고 안 믿고는 당신들 자유지만.”
해동산이 풍천을 힐끔거렸다.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과연 자신보다 한 수 아니, 몇 수 위였다.
반면 강매설은 이마를 찌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동료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대주 스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사해봐서 나쁠 것은 없어 보이는데요.”
대주는 먼저 불호를 외고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조목조목 듣고 보니 저 시주의 말이 모두 거짓은 아닌 것 같소. 정말 그런 자들이 있고 그들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다면 적지 않은 성과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오. 호 대협의 죽음에 대한 의문도 풀 수 있을지 모르고 말이오.”
명진도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일단 저자의 말대로 조사해봅시다.”
강매설은 황보안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제외한 비룡당 무사들은 그가 이끌고 있었다.
“황보 공자께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황보안은 자신의 뜻을 밝히기 전에 먼저 풍천에게 물었다.
“귀하는 호 대협을 살해한 자들이 천외라는 곳에서 나온 자들이라 보는 거요?”
“어떤 식으로든 그곳과 관련된 자가 죽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감이지. 고금제일 해결사의 탁월한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니까?
풍천은 그렇게 툭 쏘아붙이고 싶은 걸 꾹 참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나에게 묻지 말고 호 대협의 주위를 조사해보쇼. 그럼 분명히 최근 들어서 뭔가 이상한 움직임이 있었을 거요.”
그때 해동산이 넌지시 끼어들었다.
“상관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장 어르신 말씀으로는 호 대협이 하늘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 못마땅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네.”
“그래요? 흐음, 그럼 호 대협이 놈들에 대해서 뭔가 조치를 취하려고 하자 그걸 안 놈들이 먼저 손을 썼을 수도 있겠군요.”
제멋대로 예상해서 꾸민 말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말이었다.
황보안은 강매설을 보며 느릿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강매설은 황보안마저 동조하자 풍천과 해동산을 번갈아 본 후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당신이 그렇게 자신한다면 우리에게 그들에 대한 걸 확인시켜주세요.”
낚였군.
풍천은 흐뭇한 마음을 깊숙이 감추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다치더라도 날 원망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겠소?”
“걱정 말아요. 당신을 원망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저 도사님은 원망할 것 같은데…….”
저놈이!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욱하니 치민 송구는 눈을 부릅뜨고 버럭 소리쳤다.
“걱정 마라! 죽어도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풍천은 혀를 찰 것 같은 표정으로 송구를 흘겨보고는 몸을 돌렸다.
“거참, 도사가 되어서 성질이 왜 저래? 하긴 저 얼굴에 눈까지 찢어진 인상을 보니…….”
“뭐야?”
“송구 도우, 잠시 참으시게.”
“도장께서 참으십시오. 저자는 지금 도장께서 달려들길 바라고 있습니다.”
당장 뛰쳐나갈 것 같은 송구를 명진과 황보안이 붙잡았다.
한 번 더 덤비면 팔다리를 자른다 했다. 정말 그러고도 남을 자 같았다.
몸을 돌린 풍천은 발작하는 송구를 모른 척하고 해동산의 상처를 손봤다. 상처가 깊진 않았지만 팔다리와 등에 예닐곱 군데나 나 있었다.
그는 남양에서 산 금창약이 있었지만 먼저 강매설 등에게 금창약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마침 황보안이 황보세가의 아들답게 효과 좋은 금창약을 가지고 있었다.
약병을 받은 풍천은 금창약을 해동산의 상처에 골고루 뿌렸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반 이상 남은 것을 자신의 품속에 자연스럽게 집어넣었다.
“나중에 한 번 더 뿌려야 할 것 같으니 잠시 내가 보관하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