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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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3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26화
126화
제1장. 알면 다칠지 모르는데
1
풍천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서 싸우는 곳으로 날아갔다.
천의맹 무사들이 쫓던 자는 반 토막 난 검을 든 채 사력을 다해서 저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던 그자가 고개를 쳐든 순간 풍천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해 형?”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다섯 사람이 공격하고 있는 사람, 천의맹을 건들 만큼 간 큰 사람은 다름 아닌 해동산이었다.
해동산이 왜 천의맹 사람들에게 쫓겼던 걸까?
풍천은 그 이유를 생각할 새도 없이 몸을 날렸다.
해동산을 향해 다가가는 눈이 쫙 찢어진 도사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렸다.
다리를 못 쓰게 만든다는 말이.
풍천은 격전장을 향해 날아가며 다급히 소리쳤다.
“검 치워!”
홱 고개를 돌린 송구는 날아드는 풍천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풍천은 검을 빼 들고 곧장 그들의 포위망 안으로 뛰어들었다.
“무슨 짓이오!”
명진을 필두로 대주와 강매설이 그를 막았다.
포위망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풍천은 빙글 몸을 돌리며 명진의 검을 쳐냈다.
따다당!
그리고 좌수로 천라신수를 펼쳐서 대주와 강매설의 공세를 막아낸 후 송구를 향해서 검을 뻗었다.
송구는 다급히 검으로 원을 그리며 풍천의 검을 막았다. 하지만 그가 막기에는 풍천의 검세가 너무 사나웠다.
쩌정!
송구의 검이 위로 튕겨 올라가며 빈틈이 보였다.
풍천은 한 발 앞으로 내딛으며 송구의 어깨에 검을 얹고 좌수로 가슴을 후려쳤다.
퍼벅!
“크억!”
송구는 억눌린 신음을 내지르며 일 장을 날아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풍천은 차가운 눈으로 송구를 내려다보면서 해동산의 앞을 막아섰다.
‘나쁜 자식, 사람을 어떻게 개 다루듯 해? 천의맹 무사만 아니면 두 다리 근맥을 확 잘라버리는 건데.’
손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굳이 그렇게까지 손을 쓸 필요가 없을 듯했다. 천외천만 해도 부담이 가는 판에 천의맹과 원수져봐야 좋을 게 없는 것이다.
‘오늘 좋은 사람 만난 줄 알아, 인상 더러운 도사야.’
한편 풍천의 검세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주르륵 물러섰던 명진과 대주, 강매설은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그대가 왜……?”
“이게 무슨 짓이죠?”
그들은 상대가 남소에서 만났던 사람이란 걸 알아보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상대의 강함을 본능적으로 느낀 그들은 잔뜩 긴장한 채 함부로 달려들지 않았다.
풍천은 그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해동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해 형, 이게 어찌 된 일이죠?”
해동산은 갑자기 나타나서 싸움을 멈추게 한 풍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 정도? 뺨에는 가느다란 칼자국이 나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보는 자였다.
‘목소리는 분명 잠풍인데…….’
풍천은 해동산의 의아해하는 표정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인피면구를 쓰고 있다는 걸 상기하고 전음을 보냈다.
[나요, 잠풍. 사정이 있어서 인피면구를 쓰고 있수. 혹시 모르니까 나를 부를 때 대풍이라 부르쇼.]
해동산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망나니의 칼에 목이 달아나기 직전 황제의 면책권이라도 받은 심정이었다.
“정말 자넨가?”
“어떻게 된 일이냐니까요?”
틀림없는 풍천의 말투다. 게다가 저 귀찮음이 가득한 눈빛을 누가 흉내 낼 수 있으랴.
해동산은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누명을 썼네. 아니라고 아무리 변명해도 천의맹 사람들이 믿지를 않아.”
그때였다. 몸을 일으킨 송구가 코웃음을 쳤다.
“흥! 이제 보니 저놈과 한패였군.”
황보안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찌 된 일이지? 정말 저자와 한패인가?”
그러자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강매설이 두 사람을 제지했다.
“잠깐만요. 일단 저 사람의 말을 먼저 들어봐요.”
“들어볼 필요가 있겠소, 강 소저?”
“뭔가 이상한 게 있어서 그래요.”
대주가 눈을 가늘게 좁히고 의아해하는 말투로 물었다.
“아미타불, 뭐가 이상하단 말이오?”
“저자는 자신이 호가장에 간 것은 인정하면서도 살해에 대해선 강하게 부인하고 있어요.”
송구가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범인의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이오? 도둑놈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밝히는 것 본 적 있소?”
“죽을 정도까지 몰리면 어떤 자든 악에 받쳐서라도 자신의 죄를 부정하지 않는 게 보통이에요. 어차피 부인한다 해도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요.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그 말을 하는 저 사람의 눈빛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강 소저의 의견을 무시하는 건 아니오만 범행 현장에 저자와 함께 있다가 두 분 장로의 공격을 받고 도주한 늙은이가 오래전에 사라진 살수계의 전설, 흑야살이라는 늙은이라 하지 않소? 그 외에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단 말이오?”
그래도 강매설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마인의 추적을 전담하는 추마당 제이향주인 그녀는 조그마한 의문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아는 것이다.
“호 대협의 방에 들어갔다는 것은 저자도 부인하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호 대협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살수의 검이 아닌 장력이었어요.”
“그거야 저들이 증거를 감추기 위해서…….”
“당금 강호에서 호 대협을 반항할 새도 없이 장력으로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흑야살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호 대협을 그렇게 죽일 수는 없어요. 저자는 더더욱 불가능하고요.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저는 처음부터 그 일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제야 송구도 인상을 쓰며 한 발 물러섰다.
“그건 그런데…….”
“잠깐!”
대화를 듣던 풍천이 버럭 소리쳤다.
두 사람은 물론 다른 세 사람도 풍천을 주시했다.
풍천은 강 소저라 불린 여인을 바라보았다. 기왕이면 눈이 쫙 찢어진 자보다 여자에게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의맹의 다섯 사람 중 그녀만이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호 대협이란 자가 누구요?”
강매설은 풍천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호은명 대협을 말하는 거예요.”
“노산대호 말이오?”
“그래요.”
“그러니까 여기 이 사람과 흑야살이라는 노인이 호은명 대협을 죽였다?”
“현재까진 그렇게 알려져 있어요.”
풍천은 해동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해 형, 정말 호 대협을 죽였소?”
“알고 보니 호 대협은 장 어르신의 고향 친구더군. 그런데 우리가 왜 죽인단 말인가? 절대 안 죽였네. 우리는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곳에 간 것뿐이야. 우리가 갔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고.”
“장 노인은 어디 가고 혼자 쫓기고 있는 거요?”
“그분은 천의맹의 장로들을 따돌리느라 나와 헤어졌네.”
풍천은 장 노인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도망만 치는 거라면 천의맹의 장로들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쫓아도 잡히지 않을 것이었다.
문제는 객기를 부리고 대항했을 때인데 호은명이 고향 친구라면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호가장에는 뭘 물어보려고 갔죠?”
“자네가 알아보라는 것을 물어보려고 갔지. 장 어르신 말로는 그가 그곳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고 했네.”
송구가 코웃음 치며 비웃었다.
“흥! 헛소리하지 마라! 그렇게 꾸며서 말하면 누가 믿을 줄 아느냐?”
풍천은 고개를 반쯤 돌리고 송구를 흘겨보았다.
“거참, 사람 말을 왜 못 믿는 거지?”
“살수 놈의 말을 어찌 믿느냐?”
“살수는 사람 아닌가?”
“사람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 놈을 어찌 사람이라 하겠느냐!”
“살수도 살수 나름이지. 돈 몇 푼에 사람을 죽이는 살수도 있고,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사람도 있거든?”
자신처럼. 황금 백 냥을 준다고 해도 백무천에 대한 청부를 거부할 생각이잖아?
“흥, 그건 궤변일 뿐이다! 악한 짓을 한 놈들의 변명일 뿐.”
“당신도 사람을 죽인 적 있지? 항상 옳은 일만 한 건 아닐 텐데? 내가 알기로는 종남도 오십여 년 전에 큰 실수를 한 적이 있다던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나 보군. 함부로 사람 다리를 못 쓰게 만들겠다고 하는 걸 보니.”
“뭐야? 네놈이 감히 종남을 모욕하다니! 이노오옴!”
송구는 눈을 부릅뜨고 풍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 공력이 실린 그의 검 끝에서 아지랑이 같은 검기가 피어났다.
풍천의 공격에 바닥을 뒹굴었던 그는 자존심이 상해 있던 터였다.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준 풍천의 피를 봐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한번 해보자 이거지?’
풍천은 그의 의도를 알고 마주 검을 내뻗었다.
먼저 덤비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쩌저정!
맑은 검명이 울리면서 송구의 검세가 철저히 막혔다.
풍천은 낙성천류검의 낙성비류(落星飛流)와 낙성관암(落星貫巖)을 펼쳐 송구의 검세를 흐트러뜨리고는 실낱같은 빈틈 사이로 불쑥 검을 밀어 넣었다.
기겁한 송구는 뒤로 몸을 빼며 풍천의 검이 미치는 범위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작정하고 펼친 풍천의 검을 벗어나기에는 턱없이 느린 속도였다.
“그만하시오!”
황보안이 다급히 소리치며 풍천을 향해 몸을 날렸다.
풍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한 걸음 더 나아가며 송구의 검을 완전히 한쪽으로 밀어내고, 번개처럼 좌수를 뻗어서 송구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었다.
부우웅!
송구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중심을 잡을 새도 없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철푸덕!
“크억!”
풍천은 송구를 땅에 처박고는 스르르 옆으로 일 장을 흐르며 황보안의 주먹을 피했다.
황보안은 눈앞에 있던 풍천이 갑자기 사라지자 흠칫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당신도 해볼 생각이오?”
풍천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하며 황보안을 쳐다보았다.
황보안을 비롯한 네 사람은 표정이 마른 황토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송구가 단 한 수에 밀리고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얼굴이 창백한 걸 보니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자신들만으로 이길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은 네 사람은 풍천을 공격하지 않고 포위만 했다.
그 사이 송구가 비틀대며 일어났다.
풍천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송구를 노려보았다.
“더 해보겠다면 말리진 않아. 하지만 이번엔 팔다리 하나쯤 잘릴 각오를 해야 할걸?”
송구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모욕적인 말에 분기가 치밀어서 손발이 후들거렸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싸울 의욕이 일지 않았다.
‘저놈은 누군데 이리도 강하단 말인가?’
그때 마침 황보안이 그에게 말했다.
“잠깐 물러서시오, 송구 도형.”
송구는 분하지만 황보안 때문에 참는다는 듯 한쪽으로 물러났다.
풍천은 그제야 다섯 사람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송구를 심하게 몰아붙인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된 듯했다.
‘이제야 이야기할 분위기가 된 것 같군.’
만족한 그는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내가 이쯤에서 끝내려는 것은 천의맹과 적이 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오. 무슨 말인지 모르진 않을 거고…….”
자존심이 상한 듯 다섯 사람의 눈에서 신광이 번뜩였다.
하지만 풍천은 그들의 눈빛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강매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강 소저라 했죠? 호 대협의 시신을 봤다면 그가 언제쯤 죽었는지 알아봤을 것 같은데 혹시 아는 바 없소?”
강매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섯 중 유일하게 추마당 사람인 그녀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좀 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두어 시진 정도 된 것 같았어요.”
“두어 시진? 그러니까 여기 해 형과 흑야살이 호 대협을 죽이고 그 자리에서 두어 시진 동안 놀고 있었단 말이군요.”
“그건…….”
풍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두 사람이 그렇게 놀고 있는 동안 그 집 식구들은 아무것도 몰랐나?”
해동산이 급히 나서서 말했다.
“우린 일 각도 안 있었다네. 그것도 장 어르신이 호 대협의 상흔을 살피느라 시간을 보낸 것이야.”
“그래요? 그럼 더 이상하군요. 장 노인과 해 형이 범인이면 왜 자꾸 들락거린 거지? 강 소저, 혹시 없어진 물건이라도 있수? 뭐 값비싼 보물 같은 거라도…….”
강매설은 풍천의 말뜻을 눈치채고 입술을 물어뜯으며 대답했다.
“없어요.”
사실 그녀도 그 점이 의문이었다. 다만 범인이 사건 현장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어서 큰 의문을 품지 않았을 뿐.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장로님들은 호 대협이 당할지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