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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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0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25화
125화
날듯이 달려온 천의맹 사람들은 포위하듯이 풍천을 반원형으로 감쌌다.
“무슨 일이죠?”
눈살을 찌푸린 풍천이 그들에게 물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아무래도 천의맹 사람들과 마주 서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를 불러 세운 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소생은 천의맹 비룡당의 향주인 황보안이라 하오. 귀공의 사문을 알려주실 수 있소?”
말끔하게 묶은 머리, 한 벌에 은자 두어 냥은 나갈 법한 비단무복, 나이는 이십 대 중후반 정도?
황보라는 성을 쓰는 걸로 봐서 황보세가의 사람인 듯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본인의 사문은 엄명이 있어서 말할 수 없소.”
그때 서른가량의 빼빼 마른 도인이 쫙 찢어진 눈으로 풍천을 살펴보며 말했다.
“대단한 문파의 제자인 모양이군.”
“대단한 문파의 제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남의 제자가 우습게 여겨도 될 곳은 아니죠.”
종남의 제자인 송구 도인은 찢어진 눈을 치켜뜨고 풍천을 노려보았다.
풍천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가보겠소. 제가 좀 바빠서 말이죠.”
황보안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혹시 이쪽으로 달려온 사람이 없었소?”
풍천은 고개를 저었다.
“없었소.”
“부상을 입어서 옷이 피로 물들어 있고 반으로 부러진 검을 들고 있는 자요.”
“보지 못했소.”
풍천이 계속 부인하자 또 다른 도인이 이마를 좁히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황보 공자, 아무래도 갈림길에서 다른 곳으로 빠진 것 같소. 그곳으로 돌아가서 다른 길로 가봅시다.”
여인도 그 말에 긍정의 뜻을 표했다.
“그게 나을 것 같아요.”
나이는 이십 대 중반쯤, 키가 크고 눈매가 날카롭게 보여서 남자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기세를 지닌 여자였다.
황보안은 잠시 생각하더니 풍천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실례했소이다. 대답해줘서 고마웠소.”
풍천은 그들이 다가올 때만큼이나 급박하게 자리를 떠나자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간이 크군. 천의맹을 건들다니.’
3
“헉헉헉…….”
해동산은 주위를 둘러보며 정신없이 달렸다.
추적자들을 따돌리긴 했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씨벌, 내가 왜 천의맹에 쫓겨야 하는 거야?’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인 걸까?
호가장을 빠져나오자마자 천의맹의 추적이 시작되었다.
장 노인은 자신을 먼저 보내고 추적자들을 한쪽으로 유인했다.
그때 죽어라고 도망쳤으면 지금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장 노인이 걱정되어서 걸음을 늦춘 게 실수였다. 사실은 걱정되었다기보다 흑야살과 천의맹 장로들의 승부가 궁금해서 그런 것이었지만. 혼자 도망치면 나중에 혼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고.
마침 마을을 발견한 그는 객잔에서 아침 식사를 하며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기로 했다.
천의맹 무사들이 나타난 것은 그가 식사를 거의 마쳤을 때였다.
그는 태연히 식사를 마치고 차까지 마셨다. ‘어두웠으니 내 모습을 보지 못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데 천의맹 무사들이 그의 발에 묻은 피를 보더니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며 포위하는 형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때라도 태연하게 행동했으면 그냥 지나쳤을지 모르거늘, 제풀에 놀란 그는 상대가 자신을 알아본 줄 지레짐작하고는 찻잔을 던지며 창문으로 객잔을 빠져나왔다.
본격적인 도주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도망치던 와중에 또 다른 천의맹 무사를 만나 싸우고, 부상을 당한 채 또 도주하고…….
반나절 동안 그렇게 도망쳤더니 이제는 입에서 단내가 났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 같았다.
‘빌어먹을, 그 자식을 만난 게 불행이었어.’
부탁을 들어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힘들어도 남창에 남아 있었어야 했는데.
‘내가 왜 천풍장에 가서! 왜 천의맹에 쫓겨야 하냐고!’
울분이 솟구쳤다. 속이 울컥하면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씨발, 우리가 안 죽였다는데 왜 안 믿는 거야?”
그때였다. 뒤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놈이 저쪽으로 가고 있소!”
해동산은 그 목소리만 듣고도 얼굴이 저절로 떠올랐다. 종남의 제자라는 빼빼 마른 도인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눈도 쫙 찢어진 놈이 정말 재수 없게 구네.’
그는 몸을 바짝 웅크리고 담장을 따라서 달렸다.
욱신거리는 몸으로 순식간에 건물 두 채를 지난 그는 담장을 따라서 골목을 돌아갔다.
순간,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좆 됐다!’
마을이 끝나고 황량한 들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저 앞에 있는 숲까지의 거리는 칠팔십 장 정도. 중간에 드문드문 풀이 길게 자라 있지만 몸을 완전히 숨길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숲까지만 간다면 어떻게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쥐새끼 같은 놈이 이 근처에 숨었소. 샅샅이 뒤져봅시다.”
뒤에서 또 눈 찢어진 도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숨을 곳도 마땅치 않은 상황.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저들에게 들킬 수밖에 없다.
‘제길, 이판사판이다.’
해동산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숲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숨을 고른 후 전력을 다해서 골목을 뛰어나갔다.
그가 들판에 모습을 드러내자 여기저기서 추적자들이 외쳤다.
“저기다!”
“놈이 숲 속으로 도망치려는 것 같소! 놓치지 마시오!”
“흥! 거기 서라! 더는 도망가지 못한다!”
“아미타불, 그만 걸음을 멈추고 순순히 조사를 받으시오!”
풍천은 소리가 들리는 마을 외곽 쪽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좀 전에 만났던 천의맹 무사들이 쫓던 자를 찾은 듯했다.
‘그러게 왜 천의맹을 건드리나? 정파 애들은 정의감에 불타서 목숨 걸고 덤벼드는 사냥개들이라 한번 물면 쉽게 안 놓는데.’
그것이 정파의 무서운 점이었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마도의 무사들이 단순했다. 그들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다 싶으면 금방 죽일 것처럼 달려들다가도 웃으면서 돌아서니까. 가끔은 대들어서 미안하다는 말까지 하는 자도 있고.
물론 그런 놈들이 잠깐 빈틈만 보이면 뒤통수를 갈기지만, 풍천은 그들의 행동을 이해했다.
사마도가 공연히 사마도인가? 사악한 짓을 서슴없이 하니까 마도 놈들이지.
‘근데 무슨 죄를 지어서 쫓기는 거지? 쫓는 자들을 보니까 한가락 하는 자들이던데. 귀한 보물이라도 훔쳤나? 아니면 누구를 팼나? 그도 아니면 천의맹 간부의 사돈의 팔촌을 죽이기라도?’
호기심이 일었다.
가볼까? 혹시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알아?
그러나 왼발을 내딛으며 고개를 저었고 오른발을 떼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에이, 내 일도 바쁜데 귀찮은 일에 말려들어 봐야 좋을 것 없지 뭐.’
‘개자식들, 비겁하게 떼로 몰려오네.’
해동산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두 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남은 거리는 오십여 장. 조금만 더 가면 숲으로 뛰어들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동안 빠른 다리 덕분에 그들의 추적을 피했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결국 숲을 십여 장 남겨놓았을 때 누군가가 그를 앞질러 가며 앞을 막았다.
해동산은 상대가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부러진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상대도 검을 뻗어서 그의 검을 쳐냈다.
쩌정!
강력한 검격에 손목이 욱신거렸다. 몸도 한쪽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해동산은 포기하지 않고 밀려나는 힘을 이용해서 또 달렸다.
“정말 끈질긴 자군!”
굵은 목소리와 함께 웅혼한 장세가 해동산을 덮쳤다.
해동산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몸을 옆으로 날려서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서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우리가 갔을 때는 죽어 있었다니까!”
송구가 코웃음 치며 냉랭히 말했다.
“흥! 그 말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소림의 대주는 해동산의 퇴로를 막으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그럼 검을 던지고 순순히 조사를 받으시오.”
“죄도 없는데 왜 조사를 받아!”
해동산은 악을 쓰며 게걸음으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일단 눕히고 봅시다. 잡아서 혹독하게 다그치면 놈도 자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일행 중 유일한 여자인 강매설이 해동산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죽이진 마세요. 저자들이 왜 호 대협을 죽였는지 알아봐야 하니까요.”
해동산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개새끼들! 죽이지 않았다는데 왜 사람 말을 못 믿는 거야!”
한바탕 욕설을 퍼부은 그는 제일 만만해 보이는 송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송구의 눈빛이 싸늘하게 반짝였다.
“팔다리 부러뜨리는 것은 상관없겠지.”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해동산의 검을 비켜 쳐내고 검첨을 틀었다.
찌이익!
검첨이 해동산의 옷자락을 찢으며 어깨의 살까지 갈랐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이었던 듯 해동산은 황급히 몸을 틀면서 강매설을 공격했다.
강매설은 검을 뽑지도 않았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날아드는 검을 피한 그녀는 두 손을 휘둘러서 해동산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해동산은 몸을 꺾어서 겨우 강매설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그를 포위한 사람은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가 강매설의 장력을 피하기 위해 서너 걸음 옆으로 이동하자 기다렸다는 듯 황보안의 쌍권이 덮쳤다.
해동산은 검을 휘두르고 팔을 들어서 황보안의 공격을 겨우 막아냈다.
떠덩!
하지만 황보안의 권에 실린 힘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팔로 막았음에도 그 여력이 내장을 뒤흔들어버린 것이다.
“크으윽.”
해동산은 와락 일그러진 얼굴로 허리를 굽힌 채 주르륵 물러났다.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입술을 타고 핏물이 흘러내렸다.
‘아예 개를 잡는군, 쯔쯔쯔…….’
마을을 빠져나온 풍천의 눈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돌아갔다.
해결사의 본능, ‘정보는 다 돈이다!’라는 투철한 사명의식의 발로였다.
거리는 대충 백여 장 정도. 들판의 풀 때문에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천의맹 무사들이 쫓던 놈을 포위하고서 개 잡듯 때려잡는 듯했다.
‘깨갱거리게 놔두는 걸 보니 천의맹 애들도 이런 일은 초보인가 보군.’
그런데 뭔가가 자꾸 신경 쓰였다.
풍천은 그게 뭔지 다섯 걸음을 옮기는 사이 떠올렸다.
‘훗, 그러고 보니 쫓기는 놈이 강서 남창사투리를 쓰는군. 목소리도 꼭……?’
걸음을 멈춘 풍천의 고개가 모로 꼬였다.
“이제 끝이다, 이놈!”
송구는 득의의 냉소를 지으며 해동산에게 다가갔다.
해동산은 불길이 이는 눈으로 송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놈은 내가 지옥으로 데려가마!’
그는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송구를 향해 달려들면서 검을 휘둘렀다.
“지독한 놈!”
해동산의 속셈을 눈치챈 송구는 검으로 원을 그리면서 휘둘러오는 검을 쳐냈다.
쩌저정!
그리고 바짝 다가가면서 해동산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내질렀다.
해동산은 전력을 다해서 몸을 뒤로 날렸다.
덕분에 송구의 장력에 실린 힘이 많이 해소되긴 했지만 그래도 숨이 턱 막혔다.
“크으으으.”
신음을 흘리며 날아간 그는 다시 땅바닥을 굴렀다.
그런데 그가 굴러간 곳에는 대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주는 자신의 앞으로 굴러오는 해동산을 향해 손을 뻗어서 재빨리 마혈을 짚었다.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해동산은 하늘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는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이렇게 죽는 건가? 씨발, 인생 정말 더럽네.’
그때 송구가 해동산에게 다가가며 냉랭히 말했다.
“나중에라도 도망칠지 모르니 다리를 못 쓰게 만들어버려야겠소.”
대주의 이마에 주름이 그어졌다.
“그럴 필요까지 있겠소?”
“호 대협을 죽인 자입니다. 자비를 베풀 가치가 없는 자이지요.”
송구는 고집을 피우며 검을 뻗었다.
지나친 면이 없진 않았지만 그 동안 한 고생 때문인지 누구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송구는 해동산을 비웃으면서 장난처럼 발목을 쿡 찔렀다.
“훗,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말해, 말하면 다리 병신을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흠칫한 해동산은 목소리를 쥐어짜서 말했다.
“우린 정말로…… 안 죽였다고 했잖아.”
송구는 해동산의 말을 일 푼도 믿지 않았다.
“누가 죽이라고 했지? 왜 죽인 거지? 말하면 풀어줄지도 모르는데, 솔직히 말해봐.”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는다.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할까?
잠풍 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니 그 핑계를 대면?
아니, 차라리 잠풍이 죽였다고 할까?
‘그래, 나를 이렇게 고생시켰으니 그 자식도 나만큼 개고생을 해봐야 돼!’
복수심에 불탄 해동산은 눈을 들어 송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송구의 쫙 찢어진 눈과 마주친 순간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시고 욕설만 튀어나왔다.
“씨벌 놈아! 우린 정말로 죽이지 않, 았, 다, 니, 까!”
송구는 찢어진 눈매를 씰룩이며 검에 힘을 주었다.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겠군. 정 병신이 되고 싶다면 할 수…….”
그때였다. 송구가 검을 멈추고 고개를 홱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