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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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21화
121화
풍천이 펼치는 신법의 괴이함을 잘 아는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음에도 허공을 향해서 미친 듯이 검을 뻗었다.
직경 이 장이 시퍼런 검광으로 뒤덮였다. 소나무 가지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사방과 하늘마저 막힌 상태, 검기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상황이다. 전력을 다해서 유령처럼 허공을 유영한 풍천은 두어 군데 찰과상을 입은 상태로 겨우 그들의 합공을 빠져나왔다.
[관 형! 어서 빠져나가쇼!]
풍천은 포위망을 빠져나오자마자 관추양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마침 조양경 등은 풍천을 상대하느라 관추양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나 등가위 쪽의 무사들이 합세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었다.
관추양의 눈빛이 흔들렸다. 혼자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가 머뭇거리자 풍천이 다시 소리쳤다.
[뭐해? 빨리 가라니까!]
하긴 자신이 있어봐야 별 도움도 안 되는 상황. 관추양은 이를 악물고 적이 없는 곳으로 달렸다.
비참했다. 자존심도 상하고 스스로에게 회의가 일었다.
이따위 실력으로 목에 힘을 주고 강호를 누볐다니!
지난 일이 모두 우습기만 했다.
‘빌어먹을!’
한편 등가위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조양경이 갑자기 악을 쓸 때만 해도 왜 그러는가 했다. 하지만 조양경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순간에 세 명의 수하 중 한 명이 죽고 두 명은 중상을 입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분노가 끓어오른 등가위는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놈을 죽여라!”
그의 좌우에 늘어서 있던 자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풍천은 조양경 등이 주춤한 사이 상관경의를 재빨리 옆구리에 끼었다. 그리고 관추양이 달려간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잡아라!”
등가위가 눈에 불을 켜고 소리쳤다.
천응단원들은 일제히 풍천을 쫓아서 신형을 날렸다.
푸드드득.
소나무 위에서 털을 고르고 있던 독수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3
전력을 다해서 백여 장을 달린 풍천은 훌쩍 이 장 높이의 커다란 바위를 뛰어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독수리가 하늘에서 맴돌고 있었다.
“저 망할 놈의 독수리.”
지상을 달리는 한 독수리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디로 숨자니 천응단 무사들이 바짝 뒤따라오고 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거리를 벌리는 것뿐인데 그조차도 업고 있는 상관경의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하늘에 떠 있는 독수리가 등가위의 눈이라는 걸 잘 아는 상관경의는 억지로 힘을 짜내서 입을 열었다.
“나를 내려놓고 빠져나가게.”
점점이 붉은 선혈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 돼서 문제요. 힘 빠지니까 자꾸 말 걸지 마쇼.”
상관경의는 툴툴거리며 웃었다. 웃을 때마다 핏방울이 튀었다.
“크크크, 그러고 보면 자네도 독한 사람은 못 되는 거 같아.”
“그런 소리 마쇼. 우리 집 장 노인이 알면 방방 뜰 거요.”
“그러고 보니 궁금하군. 잠풍이 진짜 자네 이름인가?”
풍천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상관경의는 말을 돌렸다.
“저 독수리는 등가위가 부리는 천응이네. 천 리를 도망가도 천응의 눈을 피할 순 없지. 고집 피우지 말고 나를 내려놓게.”
“목에 피 묻잖아요. 말 좀 그만하라니까요?”
풍천은 톡 쏘아붙이고 두 발에 더 힘을 주었다.
바람이 귓전을 스치며 지나갔다. 넝쿨의 날카로운 가시가 얼굴을 긁어대는 바람에 싸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상관경의는 풍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자네가 걱정할까 봐 말하지 않았는데, 심맥 두 군데가 끊어져서 어차피 한나절도 견디지 못할 거네. 정신이 들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많은 말을 하고 싶군.”
‘제기랄!’
“이공을 만나거든 먼저 가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게.”
“돈도 없으면서 자꾸 일만 시킬 거요?”
그때 상관경의가 손가락의 반지를 빼고 품속에 손을 넣어 작은 영패를 꺼내더니 풍천의 품속에 억지로 집어넣었다.
“단천무령주를 상징하는 영패네. 이제부터 자네가 주인이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풍천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군 줄 알고 하는 말이야?
“난 단천무령주가 되지 않을 거요. 될 수도 없고.”
“백초령을 구하기가 그만큼 쉬워질 텐데도?”
‘끄응…….’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다고 할까?’
상관경의는 풍천이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물론 영패만으로는 령주가 될 수 없지. 하지만 반지를 보여주면 천주께서도 자네를 인정할 거야.”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백초령을 구한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 넘기면 될 게 아닌가?
‘그럼 하지 뭐.’
“좋수. 단, 백초령만 구하면 때려칠 테니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쇼.”
“이공을 지킬 때까지만 하게. 이공을 지키기 위해선 필요할지 모르니까. 그 일이 다 끝난 후에는 자네 맘대로 하게나.”
그 정도라면 풍천도 불만이 없었다.
“그렇게 하죠.”
“그런데 천외천이 어떤 곳인지 아나?”
풍천은 대답을 하지 않고 달리는 일에만 집중했다.
등 뒤에서 상관경의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천외천이 생긴 것은 구백 년 전이지. 천외천은 하늘 밖에 존재하면서 강호의 균형이 깨질 만하면 세상으로 나가 흔들리는 강호의 균형을 바로잡아놓았네. 정도가 너무 강하면 정의가 변질되고, 악이 너무 강하면 정의가 무너지니까. 그런데 최근에 와서 조금씩 본의가 변질되기 시작했네.”
“욕심이 생긴 거겠죠. 그들도 사람이니까.”
“크크크, 맞네. 잘 아는군. 그 바람에 내 마음도 흔들렸지. 전에는 천의 뜻이 바로 정의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확신을 할 수 없군.”
상관경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목을 감싸고 있던 두 손이 자꾸만 아래로 처졌다.
“대공 공손무백은 이공을 절대 놔두지 않을 거네. 지금은 천주 때문에…… 천주께 이상이 생기면 그는 제일 먼저 이공을…… 부탁…….”
상관경의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말했다.
그 사이 십리림의 끝자락에 거의 다 도착한 풍천은 달리는 와중에 힐끔 뒤를 돌아다보았다.
등가위와 조양경이 이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서 줄기차게 쫓아오고, 다른 천응단 무사들은 그들과 십여 장 정도 차이가 났다.
풍천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망할 놈의 독수리는 여전히 자신의 머리 위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그때 상관경의의 몸이 잘게 떨렸다.
풍천은 충격이 가지 않도록 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상관경의가 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풍천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잠풍, 자네가 직접…… 나를 저승으로 보내주게.”
“말도 안 돼요. 절대 그럴 수…….”
“우형의 마지막 소원……이네.”
죽음이 목전이다.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이상 한나절은커녕 한 시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젠장! 어쩌다 이런 사람을 알아가지고!
풍천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나직이 말했다.
“아까 제 이름이 잠풍이냐고 물어봤죠?”
상관경의의 몸이 움찔거렸다.
풍천은 자신의 본명을 밝혔다.
“풍천이라는 이름 들어봤어요?”
“풍……천?”
“유령총에서 제 뒷모습을 봤을지도 모르는데.”
“유령총? 그, 그럼 자네가……?”
상관경의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뭔가를 짐작한 것이다.
풍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담담히 말했다.
“운이 좋아서 살아 나왔죠.”
“호, 혹시 그 안에도……?”
풍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서 천상신문, 천외천이 얼마나 더러운 짓을 했는지, 그들이 왜 그렇게 유령총을 두려워하는지 알게 되었죠.”
“마, 맙소사…….”
상관경의의 몸이 더욱 심하게 떨렸다. 풍천은 그의 몸이 떨어질까 봐 속도를 조금 더 줄였다.
“벽라족은 천상신문이 진정으로 사죄하기만 한다면 용서하겠다고 하더군요. 참 멍청한 사람들이죠. 그런데 상관 노형 같은 분이 있는 걸 보면 그들이 옳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말…… 천외천이 악을 행했나?”
풍천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죠. 그것도 아주 철저히. 짐승처럼 여자들을 간하고 아이들을 죽였다더군요. 유령탑의 조각은…… 당시에 실제로 일어난 상황을 그대로 표현한 거죠.”
상관경의도 그 조각을 봤다.
그저 지옥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했다. 유령총의 악인들이 세상에 나와서 저지른 짓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조각이 실제 상황을 표현한 거라니. 그것도 천외천의 전신인 천상신문이 저지른 짓이라니!
그 말을 진정 믿어야 한단 말인가?
그때였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른 상관경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감긴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수십 년간 절대적으로 믿었던 정의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자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야, 이제야 알겠군. 이공께서 왜 유령총에 대한 말만 나오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이시는지. 그분은…… 그분은 그걸 알고 있었던 거야. 허어…….”
그것도 모르고 천외천을 정의의 표상으로 떠받들고 이공께서 나서지 않는 걸 원망했으니…… 숨을 쉰다는 자체가 부끄럽기만 했다.
눈을 뜬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그들을 다시 보게 되거든 죽음으로써 용서를 빈다고 말해주게.”
“그러죠. 그 사람들도 상관 노형의 마음을 알아줄 겁니다.”
“고맙군.”
상관경의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백여 장을 더 가자 가슴이 시원할 정도로 푸른 초원이 나왔다.
풍천은 비스듬한 경사를 올라가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어오는 언덕 위에서 걸음을 멈췄다. 시야가 탁 트여서 북쪽으로 수십 리가 보였다.
풍천은 상관경의를 조심스럽게 초지에 눕혔다.
“이곳이 제일 멋진 곳 같군요.”
상관경의가 파르르 떨리는 눈을 뜨고 물었다.
“아우는…… 어떤 꿈이 있나?”
“고금제일의 해결사가 되어서 떡두꺼비 같은 자식을 더도 덜도 말고 다섯만 낳고, 예쁜 마누라와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게 꿈이죠.”
“쿨룩, 쿨룩. 정말 멋진…… 꿈이군. 나같이 메마른 사람은 꿈도 못 꿀…… 그런…… 꿈.”
“그렇죠?”
“내가 왜…… 아우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군. 아우는…… 천하제일의 무공도 싫다며…… 사랑을 찾아 낙양으로 도망친 사형을 많이 닮았어.”
“그분도 멋진 분이군요.”
“그랬지. 정말…… 멋진 분이었지. 기분이 너무 좋군. 죽기 전에…… 아우를 만나서…… 이제…… 손을…… 쓰게.”
풍천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잘 가쇼. 당신은 정말 내 형 같은 사람이었수. 조금만 더 오래 살았으면 내가 진짜 형이라고 불러주었을지 모르는데…….”
눈을 감은 상관경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순간 풍천의 내력이 상관경의의 남은 심맥을 모조리 절단했다.
풍천은 상관경의가 미소를 지은 채 숨을 멈추자 가슴이 먹먹했다.
제길,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거야?
“아, 씨발······.”
소매로 쓱쓱 눈을 문지른 그는 몸을 일으켰다.
등가위와 천응단원들이 반원을 그린 채 풍천의 주위로 밀려들고 있었다.
그가 일어나자 등가위가 이를 부서지도록 으드득 갈고는 코웃음을 쳤다.
“흥! 이놈,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더냐!”
분노가 치민 풍천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물기가 서린 눈을 부라렸다.
“개자식들! 앞으로 바람 부는 날에는 잠도 못 자게 해주마!”
찰나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짓말처럼 돌풍이 불면서 황사 바람이 휘몰아쳤다.
등가위와 천응단원들이 멈칫한 순간 풍천의 모습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