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1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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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113화
113화
광마방의 무사들은 힐끔거리며 눈짓을 교환하더니 잘되었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당주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군요.”
“진작 말씀하시지…….”
그 사이 오정각은 진마당의 조장들과 함께 관추양을 공격했다.
하지만 관추양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
관추양은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고 냉정하게 도를 휘둘렀는데, 부딪칠 때마다 손이 저리고 그 충격에 팔이 부서질 것처럼 느껴졌다.
단 세 번의 칼질을 견디지 못한 오정각은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진마당의 조장들과 무사들이 관추양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의 실력으로는 관추양의 빠르고 강한 도를 일초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쉬이익! 따당!
“크억!”
“이…… 켁!”
관추양의 도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여지없이 피가 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다섯 명이 쓰러지고 조장 중 하나마저 목을 움켜쥔 채 꼬꾸라졌다.
상황이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흐르자 오정각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씨벌, 사신도의 도가 이렇게 무섭다니. 완전히 똥 밟았군.’
그때 세 명의 조장 중 또 하나가 얼굴이 반쪽으로 쪼개진 채 오정각 쪽으로 쓰러졌다.
“끄으으…….”
‘헉!’
가슴이 서늘해진 오정각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모두 물러서라!”
진마당 무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관추양에게서 멀어졌다.
오정각은 입술을 씹으며 불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관추양을 노려보았다.
“우리 광마방은 절대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두고 봐라, 관추양! 거기, 네놈도 마찬가지야!”
네모난 얼굴이 육각이 되도록 악을 쓴 그는 풍천까지 싸잡아서 광마방의 원수로 규정하고 객잔을 빠져나갔다.
광마방 무사들이 빠져나가자 침묵이 객잔을 짓눌렀다. 잠깐 사이 벌어진 싸움이 어찌나 치열했는지 객잔의 한쪽은 완전히 폐허가 된 상태였다.
풍천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거참, 왜 나를 걸고 넘어져?”
그는 오정각이 나간 입구를 보며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돌려 관추양을 바라보았다.
관추양의 팔을 타고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런 표를 내지 않고 있지만 그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듯했다.
“팔을 많이 다친 것 같은데 거기 그냥 있을 거요?”
관추양은 한쪽에 떨어져 있는 죽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뻗은 손가락 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풍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병신 되고 싶지 않으면 따라오쇼. 팔보다 자존심이 더 중요하면 알아서 하시고.”
죽립을 집어 든 관추양은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풍천이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 때서야 고개를 돌리고 계단으로 갔다.
풍천은 그가 따라오는 것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오지랖이 넓어졌지? 저 사람이 팔 병신이 되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제길, 마음이 약해지면 세상 살아가기 힘든데…….’
상관경의와 함께 방으로 들어간 풍천은 관추양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관추양은 머뭇거리면서도 결국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 앉아서 옷을 벗어보쇼.”
풍천은 남 앞에서 옷 벗는 것을 차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쉽게 말했다.
관추양이 머뭇거리자 상관경의가 말했다.
“벗어보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니까.”
관추양의 눈이 상관경의를 향했다.
강호에서 사신도라는 별호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앞에 있는 자는 자신이 누군지 알면서도 눈빛 한 점 흔들리지 않고 담담히 반말로 묻는다.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 강한 자처럼 보이지 않아서 별 신경을 쓰지 않았거늘,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뭔가가 자꾸 가슴을 짓눌렀다.
“뉘시오?”
“이름을 알려줘도 알지 못할 거네. 그리고 지금은 그런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닌 것 같군.”
관추양은 잠시 상관경의를 바라보고는 웃옷을 천천히 벗었다.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마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웃옷을 벗자 상처 부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두 곳이었다. 옆구리와 어깨.
문제는 어깨였다. 핏물이 계속 흘러나오는 어깨의 상처는 매우 깊었다.
풍천은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떨리는 관추양의 손끝을 보고 힘줄을 다쳤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상처를 보니 자신의 짐작이 옳은 듯했다.
그는 자신의 보따리를 찢어서 손에 쥐고 관추양에게 다가갔다. 관추양은 움찔했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광마방의 졸개들에게 당한 것 같진 않고, 누구에게 당했수?”
풍천은 긴장을 풀어주겠다는 듯 혈을 눌러서 지혈하며 담담히 물었다. 관추양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름 하나를 뱉어냈다.
“궁호충.”
“아, 중원십삼도 중 하나라는 추월비도(追月飛刀) 궁호충 말이죠?”
풍천은 말을 하는 와중에도 관추양의 어깨 상처 깊숙이 천을 푹 쑤셔 넣었다가 뺐다.
“그렇…… 크읍!”
대답하던 관추양은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고였던 피가 천에 흡수되자 순간적으로 상처 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짐작대로군.’
풍천은 보따리 안에서 상관경의를 치료하고 남은 금창약을 꺼냈다. 원래는 통증을 완화시키는 것까지 두 가지였는데 자신이 다 써서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상관경의는 그 금창약과 관추양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후드득 떨렸다.
저 친구는 참을 수 있을까?
풍천은 웃는 얼굴로 금창약을 상처 부위에 골고루 뿌렸다.
순간 관추양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하지만 그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면서도 신음을 내지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나은 것 같은데요?”
풍천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상관경의는 그 ‘누구’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나도 신음은 지르지 않았네.”
그래도 풍천은 관추양의 참을성에 더 점수를 주었다. 상관경의는 뭍에 꺼내놓은 물고기처럼 퍼덕거리지 않았던가.
꼼꼼히 약을 뿌린 풍천은 관추양의 어깨를 천으로 몇 겹을 둘렀다.
“힘줄이 상했으니 적어도 사흘 정도는 움직일 때 최대한 조심하쇼.”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관추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풍천을 바라보았다.
“왜 나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건가?”
“솔직히 말해서 나도 모르겠수. 내가 원래 이렇게 오지랖 넓은 놈이 아닌데…….”
오히려 그 대답이 관추양을 더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상관경의의 입가에 웃음을 떠오르게 했다.
‘마음이 너도 모르는 사이 한 단계 성숙한 것이지. 정말 놀라운 친구야. 이러다 정말 뇌정천결을 단시간 내에 익히는 것 아닐까?’
단순한 기대가 가슴 뛸 정도로 커졌다.
그때 풍천이 어깨를 으쓱하며 관추양에게 말했다.
“정 부담되면 은자 열 냥만 주쇼.”
상관경의의 얼굴이 어색하게 구겨졌다.
‘저런 걸 보면 불가능할 것 같은데…….’
관추양이 겉옷을 다 걸쳤을 때 객잔 주인이 방으로 찾아왔다. 객잔주인은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광마방의 무사들이 오기 전에 나가달라고 사정했다.
풍천도 어차피 그 객잔에서 밤을 지낼 생각은 없었다.
“남은 음식 있으면 좀 싸주쇼. 먼 길을 가야 하니까 한 십 인분 정도면 될 거요.”
객잔주인은 점소이를 시켜서 음식을 한 보따리 싸왔다.
풍천은 공짜로 음식 보따리를 챙기고 객잔을 나섰다. 마침 비가 멈추고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흠, 하늘도 내가 객잔에서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군.”
3
“여긴 어디……?”
눈을 뜬 백초령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공손천우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예요?”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혹시나 공손천우가 엉뚱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점검해보았다. 다행히 별일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끼눈을 뜬 그녀는 공손천우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잠든 곳은 객잔의 허름한 방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화려하진 않지만 고풍스런 장식이 가득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공손천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태연히 말했다.
“하루 종일 굶었으니 배가 고프겠군. 곧 음식이 들어올 거야. 먹고 기운차려.”
갑자기 뱃속이 텅 빈 기분이 들며 힘이 빠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음식이 아니었다.
“여긴 어디죠?”
“우리 집.”
“예?”
눈을 크게 뜬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난 상황이 떠올랐다.
공손천우와 그녀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무한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차를 한 대 구해서 사흘 동안 북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일이 없었다. 엉큼한 짓을 일체 하지 않아서 그녀도 어느 정도 그를 믿었고.
그런데 남양에 도착한 후 공손천우가 지나가듯이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구해준 것을 은혜라 생각한다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사실은 내가 집을 몰래 나왔거든. 아마 어르신들은 내가 엉뚱한 말썽이나 피우고 다닌 줄 알 거야. 그러니 네가 집안의 어르신들께 그게 아니라는 걸 말해줘. 별로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가고 싶은 곳은 신검문이지 공손천우의 집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손천우의 표정을 보니 거부해도 순순히 풀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생각을 정리해서 공손천우에게 말했다.
“그 부탁만 들어주면 정말 집으로 보내줄 거죠?”
“물론이지.”
공손천우는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웃었다. 그녀는 먼저 자신의 요구 조건을 말했다.
“그럼 먼저 신검문에 제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줘요.”
“좋아, 그렇게 하지.”
결국 그렇게 합의를 본 그녀는 공손천우와 함께 또다시 하루를 이동했다.
그리고 어느 시골 마을의 작은 객잔에 도착한 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을 잤는데 깨어나 보니 엉뚱한 곳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씹으며 공손천우를 노려보았다.
하루 종일 굶었을 거라 했다.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 하루를 이동해서 집으로 데려왔다는 말.
공손천우가 수혈을 짚지 않았다면 이동하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꼭 이렇게 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래서 데려온 거야. 수혈을 제압한 것은 우리 집의 위치가 알려져선 안 되기 때문이고. 일단은 그 정도만 알아.”
약속? 했다. 은혜를 갚는 셈 치고.
하지만 수혈까지 짚어서 자신을 데려온 것에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 정말 어이가 없군요. 독선적이고 이기적이고, 당신은 결국 그런 사람에 불과했군요. 수혈을 짚지 않으면 내가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나요? 이보세요! 제가 비록 여자지만 입 밖으로 꺼낸 말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거든요? 한다고 했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는 사람이라구요! 그런데 왜 수혈을 짚고그래요?”
백초령은 빽빽 소리치며 공손천우를 다그쳤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나운지 공손천우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어쩔 수 없다고 했잖아.”
“어쩔 수 없다? 당신 집은 세상 사람들이 알면 안 되는 곳이라도 되나 보죠?”
“맞아.”
너무나 태연한 대답에 백초령은 말문이 막혔다.
그때 마침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시키신 음식 가져왔습니다.”
공손천우는 이때라는 듯 몸을 돌렸다.
“들어와.”
그러고는 백초령을 향해 말했다.
“일단 식사부터 해. 그리고 곧 조부님을 만나러 갈 테니까, 세수도 하고 머리도 좀 다듬어. 잠잘 때 입가에 침이 흘러서 너무 더럽게 보이…….”
백초령은 마침 손에 잡혀 있던 베개를 힘껏 내던졌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어디 여자한테 그딴 소리를 해요!”
백초령은 공손천우를 씹듯이 요리를 우걱우걱 입안에 구겨 넣었다.
안 먹고 버텨봐야 자신만 손해였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야지. 저런 인간과 오래 있어봐야 좋을 게 없어.’
대충 식사를 끝낸 그녀는 시비가 갖다 놓은 물로 세면을 하고 머리를 손봤다.
머리를 손봐주던 시비는 환골탈태하듯이 달라진 백초령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정말 아름다우세요.”
백초령은 그 말에 기분이 조금 풀려서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공손 공자는 혼자 사는가 봐요?”
“혼인을 하라고 그렇게 재촉해도 혼자 지내세요.”
‘흥, 그럼 그렇지. 여자에게 함부로 하는 남자를 누가 좋아해?’
그때 문 밖에서 공손천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됐으면 가자고.”
빨리 부탁한 일을 마치고 싶은 백초령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공손천우의 눈빛이 강풍을 만난 파도처럼 출렁였다.
‘이, 이 정도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