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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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99화
99화
장로들이 기거하는 장로원의 뒤쪽에는 은은한 솔향이 흐르는 백년 생 소나무숲이 있었다.
숲 안에는 산책로가 나있고 중앙에 작은 정자가 세워져 있었는데, 장로들은 그 숲을 백송림(白松林)이라 부르며 즐겨 찾았다.
연못을 벗어난 소지환은 풍천을 그곳으로 데려갔다.
노인들이 아무리 밤잠이 없다 해도 자정이 다 되어가는 야심한 시각에 백송림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순찰 무사는 반 시진에 한 번 정도 지나다니는데, 일 각 전에 지나갔으니 한동안 오지 않을 것이었다.
소지환은 정자를 지나 더욱 외진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담장이 반원을 그리며 휘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풍천을 기다렸다.
‘이놈, 두렵지 않으면 얼굴을 보여라.’
그때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여기서 이야기할까요?”
‘헉!’
간이 덜컥 떨어질 정도로 놀란 소지환은 홱 몸을 돌리면서 정신없이 뒤로 일 장가량 미끄러졌다.
겨우 걸음을 멈추고 풍천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서 있던 곳에서 다섯 자 거리에 풍천이 서 있었다.
그런데 표정이 묘했다. 어째 자신보다 더 놀란 표정이 아닌가?
“그렇게 갑자기 몸을 돌리면 어떡합니까? 깜짝 놀랐잖습니까?”
풍천의 말에 소지환은 어이가 없었다. 아직도 뛰고 있는 가슴이 자신의 놀람이 어느 정도였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뭐라고?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하지만 풍천은 한술 더 떠서 소지환을 다그쳤다.
“얼굴이라도 잘 생겼으면 또 몰라. 그런 얼굴을 갑자기 내밀면 안 놀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뭐, 뭐야?”
솔직히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아니 조금 사납게 생긴 얼굴이긴 했다. 신마성에 파견된 이유 중 반 정도는 얼굴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앞에 놓고 어디서 그딴 소리를 한단 말인가? 그것도 한참 어린놈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소지환은 두 눈을 칼날처럼 번뜩이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느릿하니 구부러지는 아홉 손가락이 잘게 떨렸다.
‘그러잖아도 천주님의 말씀이 가슴에 맺혔거늘, 이런 잡놈의 새끼가 어디서……!’
그때 풍천이 손을 척, 들어올렸다.
소지환은 흠칫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경비 무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니까 제가 참기는 합니다만, 앞으로는 그러지 마쇼.”
‘오냐, 이놈!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네놈을 두 번 다시 볼 일도 없으니까!’
소지환은 말대꾸도 하기 싫었다. 말대꾸대신 심장에 구멍을 내줄 생각이었다.
‘이 근처 어디에다 깊숙이 파묻어버리면 아무도 모르겠지.’
그런데 풍천이 소지환의 손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손가락이 하나 없으시네? 구지마검이라는 사람도 손가락이 아홉 개라던데, 똑같네요?”
소지환은 허탈한 마음에 가슴이 싸해지고, 힘을 준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 여태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떠들었다는 건가?
“오냐, 내가 소지환이다, 이놈.”
이름이나 알고 죽어라.
소지환은 그런 마음으로 으르렁거리듯 자신을 알려주었다.
물론 풍천은 눈곱만큼도 감명 받지 않았다.
“애들처럼 이름 자랑하시긴…… 떠들면 경비 무사들 올지 모르니 조용히 하쇼 좀.”
분기가 머리꼭지까지 치민 소지환은 자신의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한 걸음에 일 장을 내딛은 그는 구부린 손가락을 쫙 폈다.
쉬이익!
바람을 가르는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서늘한 기운이 칼날처럼 밀려갔다.
그의 손가락에서 뻗친 기운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것이 바로 그가 검을 지니지도 않았는데 구지마검이란 별호가 붙은 이유였다.
칼날 같은 기운은 어둠 속에 서 있는 풍천의 몸을 단숨에 십여 조각으로 갈라버렸다.
순간, 얼굴이 굳어진 소지환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자신의 손가락이 허공을 갈랐다는 걸 느끼고 당황한 것이다.
‘헛, 놈이 어디로?’
“정말 그럴 거요? 사람들 다 불러놓고 한판 붙자는 겁니까?”
유령처럼 소지환의 뒤로 돌아간 풍천이 짜증내듯이 투덜거렸다.
소지환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돌아서지 않고 감각을 극대화시켰다.
자신의 눈으로 잡지 못할 만큼 빠른 놈이었다. 그런 놈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감각으로 느끼고 대하는 게 더 나았다.
그런데…… 뒤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를 악문 그의 몸 전체가 얼음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혹시 사람이 아닌 것 아닐까?’
그럴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떤 유령이나 귀신이 저놈처럼 말한단 말인가?
그때 풍천이 나직하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딱 세 가지만 물어볼 거니까, 알고 있으면 대답해주쇼. 그럼 조용히 갈 테니까.”
아무리 봐도 유령이나 귀신은 아닌 듯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만약 유령이나 귀신이 저놈 같다면 진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두려울 것은 없는데, 울화가 치밀어서 죽을지 몰랐다.
‘후우욱, 후우욱.’
숨을 두어 번 들이쉰 소지환은 가까스로 가슴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돌아섰다.
유령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는 놈이 일곱 자 앞에 서 있었다.
“뭐, 뭘 묻겠다는 거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풍천은 숙달된 도둑놈처럼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고는, 진기로 대충 주위를 감싼 후 나직이 속삭였다.
“혹시 다섯 달 전, 유령총에서 벌어진 싸움에 대해 아는 것 있수?”
풍천과 최대한 빨리 헤어지고 싶은 소지환은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알고 있지. 아마 나뿐만 아니라 모든 장로들이 다 알고 있을 거다. 그걸 알려면 다른 사람에게…….”
“거기서 신검문의 사마공유라는 사람이 죽었다던데, 그 일에 대해서도 알고 있수?”
“사마공유? 글쎄……. 그 일은 잘…….”
“독마의 독에 죽었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누구는 꼭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게 맞는 말인지 몰라서 말이죠.”
“나는 그 일에 대해선 잘…….”
풍천은 소지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제길, 사람을 잘못 골랐군. 좀 더 똑똑한 사람을 골랐어야 하는데·····.”
‘이 자식이!’
어린놈이 말을 똑똑 끊어먹는 것만 해도 슬슬 화가 나는데, 은근히 자신을 멍청한 사람 취급한다.
소지환의 싸늘하게 식은 가슴에 불이 당겨졌다. 그러나 그는 전과 달리 무작정 손을 쓰지 않았다.
“세 가지 질문이 다 끝난 것 같군. 그럼 나는 이만…….”
“응? 무슨 소립니까? 이제 하나 끝났죠.”
“분명 딱 세 가지 질문만 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질문을 세 가지 하겠다고 했지, 세 번 한다고는 안했죠. 그 차이를 모를 분은 아니실 것 같은데요?”
아니라고 하면 영락없이 멍청한 사람이 되어야 할 판이다.
소지환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말도 틀린 것이 아니어서 분기를 억눌렀다.
“조, 좋다. 그럼 나머지 두 가지 질문도 어서 해봐라.”
“저기, 이건 두 가지 질문과 상관없는 것인데,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사람이 올지 모르니 두 가지 질문이나 해.”
“급할 것은 없죠 뭐. 어차피 나가봐야 잠잘 것 빼고는 따로 할 일도 없는데.”
소지환의 발이 땅으로 반 치 정도 파고들었다.
‘조금 전만 해도 경비 무사가 올지 모른다고 다그치던 놈이…….’
으드득.
이를 간 그는 풍천을 쏘아보았다.
주먹으로 한 대 패주면 몇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갈 것 같았다. 그럴 수 없어서 한이지.
“쉰하나다. 됐느냐?”
“그럼 상관 노형보다 많이 드셨군요.”
“상관 노형?”
“이름이 상관경의인데……. 몰라요?”
소지환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쉿, 조용히 하라니까요? 경비 무사들에게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하여간…….”
소지환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 되었다.
하지만 워낙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꾹 참고 풍천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나의 인내심이 이 정도일 줄은 나 자신도 처음으로 알았군. 빌어먹을!’
다행히 풍천은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상관 노형과 약속한 것이 있어서 자세한 것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아무 말도 안 해주면 서운하실 것 같으니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너 같은 놈과의 인연은 만금을 준다 해도 싫다, 이놈아.’
“제가 그분을 도와준 적이 있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그분이 저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하지 뭡니까?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에 온 거죠.”
부탁을 한 것이 있긴 있다. 진호량과 단천무령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으면 알아봐 달라고 했으니까. 본래 그가 신마성에 들어온 것과는 전혀 상관없었지만. 조금 전, 소지환과 양조문의 이야기를 엿듣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러나 소지환은 그 말만으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냐?”
“제가 거짓말 할 사람처럼 보이쇼? 거, 사람 볼 줄 모르시는군요.”
‘너 같은 놈을 어떻게 믿어?’
그래도 겉으로는 믿는 것처럼 말했다.
“좋다, 네 말을 믿지. 그런데 사마공유에 대한 것은 왜 물은 것이냐?”
“그거야 제 개인사죠. 개인적으로도 알아볼 것이 있는데, 남이 부탁한 일만 알아보고 나가는 멍청한 놈이 어디 있습니까?”
소지환은 입을 꾹 닫았다. 슬쩍 흘겨보는 것이 마치 ‘나는 당신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좌우간 이제 두 가지 질문을 하죠. 첫째, 뇌옥이 어디 있죠?”
“뇌옥은 왜……?”
“그거야 당신들이 죽이기 전에 진호량, 그 멍청한 양반을 구할 수 있나 알아보려는 거죠.”
진호량의 이름마저 안다. 상관경의를 도와줬다더니 사실인 것 같다.
소지환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뇌옥 중에서도 제일 깊은 금귀옥(禁鬼獄)에 갇혔다. 금귀옥은 뇌옥의 지하 이층에 있어서 구할 수 없어.”
“당신들이 도와준다 해도 말입니까?”
“금귀옥은 어지간한 간부들도 허락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한다. 특별한 죄인만 가두는 곳이니까. 그리고 그는 이미 저승을 목전에 둔 상황이다. 그곳에서 빼내기도 어렵지만, 데리고 나온다 해도 곧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이 아무리 무겁다 해도, 살아 있는 이상 입이 열릴 가능성은 언제든 있으니까.
“안 되면 별수 없는 거고……. 좌우간 위치와 뇌옥 구조에 대해서 알려주쇼.”
“위치와 구조를?”
풍천은 소지환의 떨떠름한 반문을 들으며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쓱쓱 선을 그어서 대충 신마성의 내부도를 그렸다.
“여기가 정문이고 이쯤이 신마전, 그리고 여기가 장로원, 여기는 혈무전과 전마전…….”
아는 대로 내부도를 그린 풍천은 나뭇가지를 소지환에게 넘겼다.
“맞죠? 그럼 이제 금귀옥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보쇼.”
일반인이라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겠지만 절정고수인 소지환 정도라면 바닥에 그어진 선을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소지환은 풍천이 그린 그림을 보지도 않고 나뭇가지를 한쪽에 던졌다.
그러더니 풍천이 눈을 치켜뜨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손을 들어 뒤를 가리켰다. 조롱하듯이 입술을 슬쩍 비틀고.
“여기 담장 뒤에 있는 이층 건물이 뇌옥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지미, 그럼 진작 말하지.’
풍천은 소지환을 한 번 째려보고는 바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뇌옥의 구조나 자세히 알려주쇼.”
소지환은 잠시 망설였지만, 풍천이 물러설 것 같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뇌옥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뇌옥은 지상 일 층과 지하 이 층으로 되어 있다. 지상 일층에는 일반죄인들이 수감 되어 있고, 지하 일층에는 중죄인들이 수감되어 있지. 그리고 특수한 죄인들만 지하 이층으로 내려 보내는데…….”
그는 뇌옥의 구조를 설명하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말하지만, 지하 이층의 금귀옥은 철문으로 들어가는 길 외에는 통로가 없다. 물론 신마성 무사라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장로나 대주, 단주 등 고위 간부 이상 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토록 경비가 철저하다면 환신술을 쓴다 해도 들어가기 쉽지 않을 것 같다.
풍천은 씁쓸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해보는 데까지 해보고, 정 안 되면 별수 없죠 뭐.”
진호량의 죽음이 아쉽긴 하지만 그를 구하겠다고 목숨까지 걸 이유가 없었다.
풍천은 그쯤해서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일도천살 유광을 비롯해서,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던 자들이 있던데, 그들에 대해서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