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9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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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4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98화
98화
치료는 반 시진가량이 지나서야 끝났다.
상관경의는 평생의 그 어떤 때보다 긴 시간을 보내고 탈진한 채 축 처졌다.
어쨌든 어깨와 왼손이 전보다는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치료를 엉터리로 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때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밀실을 가득 채운 요리의 향기 때문인지 유난히 배가 더 고픈 것처럼 느껴졌다.
상관경의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풍천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치료를 끝낸 풍천이 음식 그릇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약효를 제대로 보려면 하루 정도 굶어야 한다는군요. 그러니 배가 고파도 하루만 더 참으쇼.”
상관경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풍천을 노려보았다.
‘이 나쁜 놈, 그럴 거면 왜 들고 들어와서 냄새를 풍겨…….’
2
상관경의는 하루의 반을 운공조식하며 보냈다. 덕분에 사흘이 지나자 상처가 눈에 띄게 아물고, 막혔던 혈도도 두 곳만 빼고는 모두 뚫렸다.
풍천은 상관경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궁금한 거야 입이 벌어지면 쉴 새 없이 한 시진 동안 질문할 수 있을 만큼 많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때를 위해 참고 기다렸다.
대신 그는 상관경의가 나을 때까지 다른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신마성 놈들의 수색도 시들해진 것 같은데, 신마성에 들어가 볼까?’
상관경의가 나으면 백초령을 찾기 위해 천외로 가야 한다. 형의 일과 사문의 일을 처리하려면 그 전에 해야 했다.
마침 수색을 위해서 신마성 무사의 사 할 정도가 성을 나온 상태가 아닌가.
‘뛰어난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삼는 법이지.’
결심을 굳힌 풍천은 상관경의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잠깐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만 했다.
“함부로 나다니다가 개고생하지 말고 집에 꾹 처박혀 있으쇼. 더 다치면 나만 고생이니까.”
그러고는 상관경의가 이를 악무는 걸 보지도 않고 해동산의 집을 나서서 와우산으로 향했다.
3
자정이 다 되어가는 야심한 시각.
풍천은 고목 위에서 신마성의 끝없는 전각을 바라보았다,
와우산의 신마성 전체가 천만 근 무게의 긴장에 짓눌린 듯 보였다. 하지만 그 내면에서는 고요한 가운데 소리 없는 움직임이 꿈틀댔다.
‘빌어먹을, 듣던 것보다 더하군.’
남창을 떠나기 전 형에 대한 의문을 풀어야 했다. 위태곤이 말했으니 그에게 물어보는 게 제일 간단할지 몰랐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위태곤을 만날 수는 없는 만큼 그 일을 아는 다른 사람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 인간도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고 했어. 그럼 그 일을 아는 사람이 위태곤만은 아니라는 말 아니겠어?’
거기다 덤으로, 상관경의 일행과 싸웠던 자들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신마성은 왜 그런 고수들을 감추고 있었던 걸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저들이 꽁꽁 감추고 있던 전력을 밖으로 내보였다는 건 그만한 뜻이 있다는 말이었다.
‘이놈들이 뭔가 수상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흥! 네놈들 뜻대로 되게 놔둘 순 없지.’
짙은 구름에 황금빛 반달이 가려지고, 어둠의 이불이 신마성을 한쪽부터 덮어갔다. 순간 고목 위에 앉아 있던 풍천의 모습이 사라졌다.
잠시 후.
한 줄기 바람이 담장을 넘어 전각의 지붕 위로 흘러갔다.
순찰을 돌던 무사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로 흘러가는 바람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낄낄댔다.
“동가 놈이 지 장로에게 까불댔다가 그걸 못 쓰게 되었다고 하더군.”
“낄낄낄, 불쌍한 놈. 앞으로 마누라에게 매일 시달리겠는데?”
“지 장로를 몰라본 죄지.”
“내가 동가 놈의 마누라를 만나서 달래줄까?”
“크크크, 뒈지고 싶으면 한번 해봐.”
이 층 전각의 지붕 위에 내려선 풍천은 그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쯔쯔쯔, 나쁜 놈들. 동료의 고통을 즐기다니, 저래서 마도 놈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하지만 그는 그들의 잡담을 더 이상 듣지 않고 다시 신형을 날려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적어도 장로급은 되어야 유령총의 일에 대해서 알 거야.’
이십팔 장로 중 서너 명 이상은 관련되었다고 봐야 했다.
문제는 그들 중 유령총에 간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인데…….
그때 한 사람이 번뜩 떠올랐다.
‘맞아, 설추교라면 알지도 몰라!’
풍천은 쾌재를 불렀다.
어차피 이청사에 대해서 알려면 그를 만나야 했다. 그리고 유령총의 일은, 설령 그가 모른다 해도 누가 아는지 정도는 알 게 분명했다.
설추교를 만나기로 한 그는 장로원이 있다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장로원은 천 평가량의 작은 연못 서쪽에 있다고 했다.
전각 몇 개를 지나가자 검은 주단이 펼쳐진 것 같은 연못이 보였다. 그리고 연못 너머에 대여섯 채의 전각이 서 있었는데, 전각 사이사이에선 화톳불이 피어오르고 그 주위를 경비 무사들이 오갔다.
장로원이 분명해 보였다.
‘저 전각 중 어디에 설추교가 있는지만 알아보면 되는데…….’
풍천이 나무에 몸을 숨기고 머리를 굴릴 때였다. 한 사람이 전각에서 나오더니 연못 쪽으로 걸어갔다.
화톳불 가에 있던 경비 무사 중 하나가 그에게 다가가더니 고개를 숙였다.
“소 장로님, 밤이 깊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전각에서 나온 자는 이십팔 장로 중 한 사람인 구지마검 소지환이었다.
그는 경비 무사의 말에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별일 아니다. 잠깐 생각할 것이 있어서 바람 좀 쐬려고 나왔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라.”
“알겠습니다, 장로.”
경비 무사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화톳불가로 돌아가고, 소지환은 뒷짐을 진 채 연못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풍천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장로라고?’
소지환은 연못가의 길을 걸으며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풍천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연못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찰을 도는 무사들도 이미 지나갔고, 경비 무사들도 소지환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저자에게 물어볼까?’
물론 제정신이라면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결국 사로잡아야 한단 말인데, 장로라는 자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잡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연못을 가운데 두고 장로원과 반대편에 있는 전각 사이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자는 곧장 소지환에게 다가가며 반가워하는 말투로 말했다.
“어이쿠, 소 장로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생각할 것이 좀 있어서 나왔네. 그런데 양 단주야말로 웬일인가?”
신마귀천단의 단주 양조문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뒷간에 다녀오는데 장로님이 보여서 왔지요. 이거 사색하시는데 방해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별말을. 그러잖아도 청승인 것 같아서 돌아갈까 생각했는데 이야기 나눌 사람이라도 만났으니 오히려 잘되었지.”
“그러시다니 다행이군요.”
두 사람은 평범한 일상 대화를 화기애애하게 나누었다.
그러나 풍천은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난 것이 아니라는 걸 직감으로 눈치채고 눈을 반짝였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쉴 새 없이 눈알을 굴리면서 주위 상황에 신경 썼다. 게다가 얼굴도 바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어느 누구도 평범한 대화를 저런 식으로 나누지 않는다. 뭔가가 있다는 말.
‘왜 저러는지 몰라도 우연히 만난 것 같진 않군.’
바로 그때 소지환이 목소리를 낮춰 나직이 말했다.
“그가 잡혔다고?”
“어제 포양호의 어촌에서 잡혔는데, 오늘 저녁에서야 총단으로 이송했다고 합니다.”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양조문이 속삭이듯이 대답했다.
“지하 뇌옥에 갇혀 있습니다.”
‘누굴 말하는 거지?’
풍천의 의문에 답하듯 소지환이 다시 물었다.
[상태는?]
이번에는 전음이었다.
풍천은 갑자기 목소리가 잦아들자 청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서 소지환과 양조문의 대화에 집중했다.
순간 미약하나마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풍천의 상식을 초월한 감각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전음의 파장을 잡아낸 것이다.
물론 그들과 가까이 있었고, 한밤중이어서 방해되는 잡음이 없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두 사람도, 설마 누가 들으랴 하는 생각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약한 수준의 전음을 구사하고 있었다.
[극히 안 좋습니다. 이공자가 심문을 심하게 해서 겨우 목숨만 붙어 있습니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소지환은 그 말에 침음을 흘렸다.
[으음, 그래도 괜찮은 사람인데, 아쉽군.]
[별수 없지요. 자결조차 못 하게 금제를 해놓았으니 차라리 일찍 숨을 끊어주는 게 그에게도 더 나은 일일 겁니다.]
[하긴 그도 그걸 바라겠지. 단천무령주에 대한 것은 아직 소식이 없나?]
[없습니다. 아무래도 남창을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풍천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야기를 전후를 따져본 그는 두 사람이 누굴 말하는지 곧바로 알아챈 것이다.
‘혹시 잡혔다는 사람이 진호량?’
진호량이 그곳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도주한 것 같았다.
하기야 그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가 도주하기로 마음먹었다면 팔대신마라 해도 막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도주했던 그가 다시 잡히고 신마성의 뇌옥에 갇혔다니.
비록 그와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막상 그가 잡혔다는 말을 듣자 풍천도 걱정이 되었다.
‘멍청하기는. 도주했으면 잡히지 말아야지.’
풍천은 진호량의 멍청함을 탓하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진호량의 생존사실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또한 풍천에게 적잖은 놀라움을 주었다.
‘저 두 사람도 천외의 사람들인가?’
한 사람은 장로고, 한 사람은 단주라고 했다.
말하는 투를 들어보니 천외에서 심어놓은 첩자인 듯했다. 그래서 풍천은 천외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정말 무서운 놈들이군. 신마성의 최고 간부들이 그들의 첩자라니.’
그때 소지환이 담담한 말투로 작별을 고했다.
“그만 가봐야겠네.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최대한 조심해서 처리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서 쉬시지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하하하!”
양조문은 짐짓 큰소리로 웃으며 포권을 취하고 돌아섰다. 소지환도 몸을 돌려서 연못가의 길을 따라 걸어갔다.
풍천은 양쪽으로 갈라진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소지환을 따라 움직였다.
소지환은 연못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를 돌아가다 말고, 귀청을 파고드는 전음에 우뚝 멈춰 섰다.
[안녕하쇼, 소 장로. 소리 지르지 마시고, 태연하게 내 말을 들으쇼.]
‘어떤 놈이?’
[너무 경계하지 마쇼. 나쁜 놈 아니니까.]
나쁜 놈이 아니라고?
그 말을 들으니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소지환은 공력을 끌어올려 두 손에 집중하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삼 장 앞에 있는 나무 위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얀 이가 다 드러날 정도로 빙그레 웃으면서.
저놈은 누구지?
어쨌든 이토록 가까이 있었는데도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소름 돋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전음으로 말을 거는 걸로 봐서 신마성 사람도 아닌 듯했다.
문제는 자신이 양조문과 만난 걸 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신경이 곤두선 소지환이 전음으로 물었다.
[웬 놈이냐?]
[금산에 사는 사람인데, 두어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수.]
금산에 저 혼자만 사나? 누가 고향 물어봤어?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소지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 위에 앉아 있는 풍천을 노려보았다.
[내가 대답해줄 거라 생각하느냐? 흥, 감히 본성의 중지에 들어와서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죽지 못해 환장한 놈이구나.]
[쓸데없이 일을 크게 만들지 맙시다. 당신도 내가 떠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무슨 말이냐?]
[양 단주하고 만난 것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을 것 같은데. 안 그렇수?]
역시나 자신이 양조문과 만난 것을 보았다.
그래도 설마,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알지 못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소지환은 풍천의 귓구멍에 얼음이 얼까 걱정될 정도로 냉랭하게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라, 이놈. 양 단주와 내가 만나는 게 무슨 잘못이라고…….]
[거, 말을 못 알아들으시네. 뇌옥에 있는 사람을 죽이려고 공모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좋겠수?]
소지환의 안색이 급변했다.
‘어, 어떻게 저놈이 그걸……?’
[운이 좋아서 몇 마디 들었수. 그건 그렇고,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죠.]
풍천을 당장 잡아 죽일 듯이 쳐다보던 소지환은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그것까지 알고 있다면 일이 커져봐야 자신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어디 구석으로 데려가서 입을 막아야겠군.’
마음을 다잡고 숨을 고른 소지환은 자연스런 태도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풍천에게 말했다.
[좋다, 네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들어보기로 하지. 따라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