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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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93화
93화
상관경의는 또 한번 말문이 막혔다.
단천무령에게 중상을 입히고 진호량을 죽이려 했던 놈이 자신들을 도와주겠다니.
수하가 다친 걸 생각하면 제의를 거절하고 목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현 상황이 그로 하여금 인내를 강요했다.
그런데 왜 이놈은 신마성과 적이 되면서까지 백초령에게 집착하는 걸까?
그는 문득 풍천과 백초령이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졌다.
“백초령과 무슨 관계인데 신마성과 적이 되는 걸 마다하지 않는 것이지?”
사실대로 대답할 수는 없는 일. 풍천은 대충 둘러댔다.
“신검문의 부탁을 받은 일인데, 복잡한 사연이 있어서 더 말할 수 없으니 이해하시고…… 내가 질문한 것이나 대답해보쇼.”
상관경의는 풍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더 이상 미적거릴 여유가 없었다.
상대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손을 잡든지, 아니면 서로의 심장에 검을 겨누든지, 신마성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숨을 길게 들이켠 그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풍천의 질문에 어정쩡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는 내 조카다. 조카가 남창을 떠났다면 아마 우리가 사는 곳으로 갔을 거다.”
지금 장난하나?
풍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물었다.
“당신이 누군데요? 사는 곳이 어딘데요?”
“내 이름은 상관경의다. 그리고 하늘 밖에서 살지.”
하늘 밖에서 살아?
그 말을 듣는 순간, 풍천의 가늘어진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유령총에서부터 품고 있던 의문이 또다시 고개를 내민 것이다.
‘호, 혹시 이들이…… 천상신문의 사람?’
흑의인들은 유령총에 대해서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유령총에 들어갈까 봐 철저히 막았다.
그럴 이유가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부류밖에 없다.
사람들이 유령총의 비밀에 대해서 알기를 원치 않는 자들. 천상신문의 사람들 말이다.
‘이자들이 진짜 천상신문의 사람들이라면 계획을 바꾸어야 해.’
한 놈의 가슴을 뭉개준 것 정도로는 이자의 반도 안 되지만, 나머지 이자는 나중에 받아도 되었다.
피에 대한 이자를 받는 것보다 아극사와의 약속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자신이 금제에서 풀려나기 위해서라도.
풍천은 번개처럼 한 가지 계책을 떠올리고 느긋한 태도로 질문했다.
“그래요? 흠, 당신의 이름이 상관경의고, 그가 하늘 밖으로 갔단 말이죠?”
“그렇다.”
“하늘 밖이라는 곳이 진짜 저 시퍼런 하늘 위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어디에 있습니까? 하남에 있습니까? 아니면 안휘?”
“그에 대한 답은 네가 찾아봐라. 나는 네가 원하는 대답을 다 해줬으니까. 그가 누군지, 어디에 사는지.”
“이름과 사는 곳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줘야죠?”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싫으면 없던 것으로 하자.”
상관경의는 단호하게 말하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풍천은 그런 상관경의를 째려보며 신경을 건드렸다.
“멀리서 볼 땐 제법 남자처럼 보여서 말이 통할 줄 알았는데, 직접 대해보니 꽤 쪼잔한 성품이군요. 확실하게 알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성 이름이라도 말해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내가 겁나요?”
‘쪼, 잔? 겁이 나?’
자신도 모르게 울컥한 상관경의의 눈매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나 풍천은 꿈쩍도 하지 않고 답을 재촉했다.
“저는 머리 굴리는 것을 싫어해서 그렇게 말하면 못 알아듣거든요? 그러니 쓸데없이 돌려서 말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말해보쇼.”
‘자신이 멍청하고 게으르다는 걸 어렵게 말하는군.’
상관경의는 냉소를 지으며 좀 더 최소한의 정보를 던져주었다.
“하남을 다 뒤지면 어디엔가 있을 거다. 그 이상은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니 묻지 마라.”
단호한 말투. 죽는 한이 있어도 더는 말할 수 없다는 눈빛.
풍천은 상관경의의 눈빛을 보고 더 묻지 않았다.
고집 센 사람의 입은 다그칠수록 더 무거워지고, 살살 달래면 저절로 가벼워지는 법이다. 백초령을 생각하면 마음이 다급하지만 서두른다고 열릴 입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름 신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요? 그럼 낙양이나 숭산 근천가? 아니지, 정주나 개봉 부근일 수도 있겠군. 아니면 안휘나 산동과 가깝든가.”
그러면서 상관경의의 변화를 찰나의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몇 곳을 예상지로 말했는데도 상관경의는 눈썹 한 올 끄떡하지 않았다.
‘흠, 그럼 그곳은 아닌가 보군.’
조금 아쉽긴 해도 실망하진 않았다. 그만큼 예상 지역이 줄어들었으니까.
문제는 남은 지역을 조사해야 한다는 건데, 그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아주 효과적인 방안이 하나 떠올랐다.
‘맞아, 장 노인을 시켜야겠군. 노인들도 너무 놀고먹기만 하면 오래 못 산다잖아?’
장 노인이 언젠가, 강호가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큰소리친 적이 있었다. 일거리를 맡아 출행할 때마다 제법 그럴듯한 정보를 건네주는 걸로 봐서 아주 헛소리는 아닌 듯했다.
‘젊을 때 안 가본 곳이 없다 했으니 하남을 뒤지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풍천은 상관경의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자극해봐야 경계심만 키울 뿐.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 그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어깨를 으쓱 추켜올린 풍천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친 분들은 대충 치료됐습니까? 다 됐으면 그만 여길 떠나죠? 제가 도와준다고 해도 신마성 놈들이 떼로 몰려오면 큰일이거든요.”
상관경의 일행은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풍천을 쏘아보았다.
풍천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풍천으로 인해서 한 사람이 더 부상을 입었고, 다른 사람들도 잔뜩 긴장한 바람에 회복은커녕 더 악화되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상황이 그러하거늘, 실실 웃는 모습이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도움이고 뭐고 당장 이 자리에서 작별을 고하고 싶었다.
다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어서 문제지.
빌어먹을! 단천무령이 저딴 놈의 도움을 받아야 하다니!
그들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가까스로 참고 있는데 풍천이 혼잣말처럼 한마디 더 했다.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는 무사들이 엄살은…….”
‘저 개자식이!’
진호량이 발끈해서 튀어 나가려 했다. 아마 상관경의가 전음으로 말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참게. 어쨌든 적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때 풍천이 알면서도 모른 척 진호량의 성질을 건드렸다.
“별로 다친 것 같지도 않은데, 아픈 척 그만하고 갑시다. 덩치 큰 양반이 엄살은 더하군.”
얼굴이 벌게진 진호량은 더 참지 못하고 풍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형님, 죄송합니다! 말리지 마십시오!”
기다렸다는 듯 턱을 쳐든 풍천은 진호량의 불붙은 성질에 부채질을 했다.
“어? 지금 해보자는 거요? 나이깨나 든 양반이 왜 이리 성질이 급하쇼? 어디서 메뚜기라도 잡아드셨나…….”
당분간 함께 움직여야 할 사이. 초장에 기를 꺾어놔야 편한 법이었다.
진호량은 활활 타올랐다. 풍천이 바라는 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이놈!”
“그만 멈추게! 호량, 뒤로 물러나라!”
결국 상관경의가 나서고서야 풍천과 진호량의 다툼이 멈췄다.
하지만 그 잠깐 사이, 진호량은 풍천의 천라신수를 두어 대 스치듯 얻어맞고 안색이 해쓱하게 변했다.
풍천은 진호량의 기를 꺾은 것으로 만족하고 멀찌감치 물러났다. 그러고는 자신을 노려보는 상관경의에게 태연히 말했다.
“내 잘못이 아니니까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쇼.”
상관경의는 차마 풍천을 다그칠 수 없었다. 진호량이 먼저 달려든 것만큼은 분명했으니까. 풍천이 긁어대서 그런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큰 부상을 입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만약 풍천이 작심하고 살수를 썼다면, 진호량은 중한 내상을 입었든지, 아니면 죽었을 것이었다.
‘처음에 봤던 것보다 더 강한 것 같군.’
상관경의는 이를 지그시 악물고 몸을 돌렸다.
“여기서 다투고 있을 시간이 없네. 그만 가지. 치료는 일단 장소를 옮겨서 하도록 하세.”
2
정오 무렵부터 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미시가 되자 비가 내릴 것처럼 하늘이 잔뜩 어두워졌다.
풍천이 호숫가의 초막(草幕)을 발견한 것은 북동쪽으로 이십 리가량 이동했을 때였다. 신마성 무사들이 근처에 있는지 살펴보겠다며 나무 꼭대기에 올라갔는데, 갈대숲에 감춰진 초막이 보인 것이다.
풍천은 부상자를 생각해서 그 사실을 상관경의에게 알려주었다.
“저 갈대숲 안에 초막이 있는데, 저기서 쉬어가는 게 어떻겠수? 곧 비도 올 것 같은데요.”
“초막?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삼백이십 장 정도 될 것 같은데요?”
“그래? 잘됐군.”
상관경의는 반색했다.
꼭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풍천의 말 때문에 오기로 내색을 하지 않아 그렇지, 한 시진 가까이 이동하면서 중상자들이 기진맥진해 있는 상태였다. 더 이상 치료를 미룰 수 없는 상태.
“가보세. 자네가 앞장서게.”
풍천은 앞장서서 갈대숲으로 들어가며 상관경의 일행에게 주의를 주었다.
“신마성이 대대적인 수색을 할 거요. 그러니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도록 조심하쇼. 갈대를 함부로 꺾지도 말고, 특히 발자국은 최대한 남기지 않도록 주의하쇼. 눈이 좋은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수백 리를 추적할 수가 있거든요.”
꼴 보기 싫은 놈이지만 말은 옳았다.
부상자들은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든 상황인데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상관경의와 진호량은 그들을 도와서 갈대숲을 통과했다.
초막은 주위 갈대숲과 절묘하게 어우러져서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풍천이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않았다면 발견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괜찮군. 이곳에서 치료를 하고 움직여야겠어.’
상관경의는 만족해하며 초막 안을 살펴보았다.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았는지 초막 안은 인근 짐승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손보면 비바람을 피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상관경의와 진호량은 갈대를 잘라와 바닥에 깔았다.
풍천은 그들이 그곳에서 부상을 치료하는 동안 잠시 남창 성내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두어 가지 일만 처리하고 바로 돌아오죠.”
그러자 진호량이 의심의 눈초리로 풍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흥, 우리를 신마성에 팔아먹지는 않겠지?”
풍천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받아쳤다.
“죽여서 데려가면 더 큰돈을 줄지 모르는데, 내가 미쳤다고 손해볼 일을 하겠수?”
진호량은 안면근육을 씰룩이며 입을 닫았다. 무공뿐만이 아니라 말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3
남창 성내로 들어간 풍천은 일단 작은 장원으로 갔다.
주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텅 빈 장원에는 강아지만 낑낑대며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풍천은 강아지를 끌어안고 장원을 나와서 동포동의 주루로 향했다.
길거리에 간혹 신마성의 무사들이 보이긴 했지만, 강아지를 품에 안고 가는 풍천을 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붙잡지는 않았다.
설마 신마성의 적이 한가하게 강아지나 끌어안고 돌아다니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인 듯했다.
풍천은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역시 마음을 선하게 써야 한다니까.’
동포동의 주루는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조용했다.
그런데 신마성의 동태를 살피고 있을 줄 알았던 해동산이 벌써 주루에 와 있었다.
방에서 이를 쑤시고 있던 해동산은 풍천이 들어오자 재빨리 이쑤시개를 감췄다. 그러다 풍천의 품속에 있는 강아지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웬 강아지인가?”
“주인이 없는 강아지인 것 같아서 데려왔죠. 이곳에서 나오는 찌꺼기만 먹여도 강아지 한 마리는 키울 수 있지 않겠수?”
동포동은 강아지를 환영했다.
진짜로 강아지를 좋아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키워서 잡아먹을 생각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강아지 한 마리 키울 정도는 되지. 이리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