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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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85화
85화
봉태구는 안도의 숨을 쉬며 풍천을 바라보았다.
풍천은 미간을 찌푸렸다. 옆구리에 매달린 게 아니라 함께 배를 탔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위태곤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백초령은 다행이라 생각할 터, 상대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초령이가 걸어갔으면 속도가 늦어질 거야. 그리고 흔적도 더 남았을 것이고.’
생각을 정리한 풍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죠.”
그때 봉태구가 넌지시 물었다.
“만약 둘째 공자께서 물으시면 누구시라고 해야 합니까, 공자?”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라고나 할까?
풍천은 그렇게 장난처럼 말하려다 사실대로 말했다.
“내 정체는 당분간 비밀이오.”
위태곤이 알면 시끄러워지거든.
3
등왕각을 빠져나온 위태곤은 금마문(金魔門)으로 달려갔다.
금마문은 신마성에서 남창의 상권을 관할하기 위해 만든 문파로 이백여 명의 신마성 무사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금마문의 문주인 남광조를 만난 위태곤은 총단과 인근 삼백 리 이내의 신마성 휘하세력 열두 곳에 급보를 전한 후 무사들을 모조리 동원했다.
그는 금마문의 무사들이 정체불명의 고수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신검문 사람들의 행방과 백초령을 납치해간 자들을 쫓는 것이었다.
“특히 강을 건너는 배들을 철저히 조사해! 놈들을 발견하면 즉시 연락하고, 혹시라도 백초령을 보면 다치지 않도록 사로잡아!”
곧 금마문의 문이 열리고 수백 명의 무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위태곤이 총단으로 보낸 급보는 바로 사우에게 전해졌다.
보고를 받은 사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신검문의 무리가 나타난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백초령을 찾으러 왔을 뿐이니까. 문제는 유령총에서 살겁을 벌인 자들이 남창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남창에 나타난 이상 이제 성주의 뜻을 누구도 막을 수 없겠군. 하늘이 피를 바라는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그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사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주를 만나러 갔다.
혁련궁은 사우의 보고를 듣고 담담히 웃었다.
“후후후, 그거 잘됐군. 이 기회에 누가 강한지 한번 알아봐야겠어.”
“비원의 사람들을 그들과 붙여보실 생각이십니까?”
“재미있을 것 같지 않느냐? 동광후와 전우림을 죽인 놈들이다. 복수도 할 겸, 그들의 능력도 시험해봐야겠어.”
“비원의 존재를 알게 되면 강호의 눈이 남창으로 쏠릴 것입니다.”
“후후후, 그것도 괜찮겠지. 만천하에 본 신마성이 강호 제일 패라는 걸 보여줄 기회가 아니겠느냐?”
“힘을 너무 소모하면 나머지 사패가 쾌재를 부를 겁니다.”
“손해를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다. 걱정 마라. 하나를 잃으면 둘이 채워질 게야. 눈치만 보던 천하의 마도 고수들이 남창으로 몰려들 테니까.”
가능성이 충분한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너무 계산만 따진 셈이 되었군.’
사우는 스스로를 질책하며 고개를 숙였다.
“주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4
풍천과 해동산은 진삼이란 자의 도선을 타고 강을 건너서 납치범이 내렸다는 지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근처를 일 각가량 뒤진 끝에 십여 장 위쪽에서 놈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놈도 날이 어두울 때 강을 건너서 다행히 다른 사람의 발자국과 겹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놈의 발자국을 발견한 곳으로부터 삼십여 장을 지난 후로는 백초령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속도를 높이려고 백초령을 다시 옆구리에 끼고 도주하는 것 같았다.
‘보통 신중한 놈이 아니군.’
풍천은 눈을 부릅뜨고 납치범의 발자국을 뒤쫓았다.
그런데 납치범의 뒤를 쫓은 지 한 시진가량 지났을 즈음, 풍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늦추었다. 납치범이 빙 돌아서 다시 강 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추적자를 속이기 위해서 흔적을 남쪽으로 꺾어놓은 걸까?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었다. 등왕각에 있던 수많은 고수들 틈에서 백초령을 납치한 놈이 아닌가.
무공은 물론이고 머리를 쓰는 것도 보통이 아닌 놈인 만큼 이미 추적을 예상하고 있었을 터. 추적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방향을 틀었을 가능성이 컸다.
“왜 멈춘 건가?”
해동산은 잘 쫓아가던 풍천이 걸음을 멈추고 바닥만 뚫어지게 바라보자 왠지 고소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보이지도 않는 발자국만으로 납치범을 쫓다니. 그게 말이 되나?
물론 지금까지 쫓아온 걸 보면 뭔가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발자국은 아닌 것 같았다.
“이 빌어먹을 놈이 오 리 전부터 조금씩 방향을 틀어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군요. 앞에 별다른 장애물도 없는데 말이죠.”
‘오 리 전부터? 허풍이 갈수록 심해지는군.’
해동산은 풍천을 힐끔거리고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물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어디로 가든 잡기만 하면 될 거 아닌가?”
풍천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해동산을 보며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멀리서부터 방향을 틀었다는 것은 철저히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죠. 아마 머리가 안 돌아가는 추적자들은 그가 방향을 튼 것조차 모를 겁니다.”
머리 안 돌아가는 추적자.
그게 꼭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해동산은 기분이 상했지만 사실이 그러니 토를 달지 않았다.
풍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강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신마성이 대규모로 추적자들을 풀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되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군요. 신마성의 무사들과 붙어도 안 잡힐 자신이 있다 이건가?”
‘훗, 웃기고 있네. 납치범이 천하제일 고수라도 된단 말이냐?’
해동산은 입술을 비틀어 풍천을 비웃고는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자넨 어떻게 할 건가?”
“계속 쫓아가야죠, 뭐.”
계속 갈 거면서 왜 그렇게 심각한 투로 말해?
해동산은 풍천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풍천은 더욱 심각해진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머리가 좀 돌아가는 사람들은 멍청한 사람들과 달리 여기서 고민을 하죠. 왜 납치범은 남창에서 멀리 도망가려 하지 않고 방향을 틀까?”
‘그래, 너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고, 나는 머리가 안 돌아가는 멍청한 놈이다.’
속이 뒤틀린 해동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풍천이 남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허를 찔러서 적의 눈을 속이려고 하는 걸까? 그도 아니면 흔적을 여러 군데 남겨서 추적자를 분산시키려고 하는 걸까?”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해동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멍청한 놈이든, 아니면 천재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놈이든 상대하기가 쉽지 않은 놈입니다.”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있었다. 하지만 해동산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적의 포위망이 느슨해질 때까지 초령이를 가까운 데 숨겨놓고 돌아가는 상황을 구경할 생각인지도 몰라. 나 같으면 그렇게 할 텐데…….’
신마성과 정체불명의 고수들 간의 격돌이 어디 흔하게 구경할 수 있는 일인가?
하오문에 그 정보만 팔아도 상당한 은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5
백초령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짙은 감색 무복을 입고 등에는 검 한 자루가 매어져 있다. 나이는 이십 대 중후반쯤? 얼굴은 풍천보다 조금 못생긴 것 같은데, 선이 굵어서 남자답게 보였다.
그리고 눈빛은 풍천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조금 염세적으로 보여서 그렇지.
‘그 인간도 눈빛만 바꾸면 제법 멋지게 보일 텐데…….’
하지만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 생각하니 가슴만 아프다.
백초령은 아련한 눈빛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한 번 질끈 깨물고는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그 변태 놈의 손에서 구해줘 고맙긴 한데,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알려주는 게 예의 아니에요?”
청년이 고개를 돌리더니 의외라는 표정으로 백초령을 바라보았다. 위태곤의 정부쯤 되는 계집으로 알았는데 그것이 아닌 것 같다.
“이름이 뭐지?”
“그것도 모르고 구한 거예요?”
“난 널 구한 게 아니라 납치한 거다.”
“좋아요, 구한 게 아니라 납치했다고 치죠. 그런데 왜 납치한 거죠?”
“그들을 골탕먹이고 싶어서.”
생뚱맞은 대답에 백초령은 피식 웃었다.
“아는 사람들인가 보죠?”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 사람들, 어디서 온 사람들이에요?”
“하늘 밖에서. 더 알려고 하지 마라. 알아봐야 목숨만 단축시키니까. 그런데 아직 이름을 말하지 않았군.”
신비한 척하기는.
백초령은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면서 넌지시 신검문을 들먹였다.
“신검문의 백초령이에요. 당신은?”
청년은 백초령이 신검문 사람이라는 말에 멈칫했다. 그리고 이름을 묻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다는 듯 순순히 말해주었다.
“공손천우.”
“어쨌든 공자 덕분에 위태곤의 손에서 빠져나왔으니 저로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군요. 이제 어떻게 할 거죠?”
“글쎄, 고민이군. 신마성에 넘겨주면 대가를 두둑이 줄 것 같은데, 여자를 팔아서까지 돈을 챙기고 싶지는 않거든.”
속으로 뜨끔한 백초령은 다급히 공손천우를 설득했다.
“그럼 여기서 그만 헤어져요. 당신은 당신 가고 싶은 대로 가고, 저는 저 가고 싶은 대로 가고. 나중에 신검문으로 오시면 제가 충분한 대가를 드릴게요.”
“그럴 순 없지.”
“왜요?”
“나는 납치한 여자를 순순히 놓아줄 만큼 마음씨가 좋은 놈이 아니거든.”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지금쯤 수백 리 일대에 비상이 걸렸을걸? 어차피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으니까, 너를 당분간 어느 한곳에 가두어놓고 남창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경해야겠어. 풀어주는 건 그 후에 생각해보지.”
공손천우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백초령의 혈도를 짚었다. 백초령이 급히 입을 열어 제지하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아혈이 제압된 상태였다.
‘나쁜 새끼, 남자 새끼가 속은 겨자씨만큼이나 좁군. 풍천 같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던 그냥 놔두었을 텐데.’
풍천이 그곳에 도착한 것은 공손천우가 백초령을 둘러메고 떠난 지 한 시진 후였다.
풍천은 풀 위를 둘러보았다. 눈썰미가 조금만 있다면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확연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해동산조차 금방 알아볼 정도로.
“여기서 쉬었다 갔나 보군.”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쉬면서 결정한 것 같군요.”
“어디로 간 것 같은가?”
“역시 남창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데요?”
“남창으로 돌아가면 더 위험해질 텐데, 알 수가 없군.”
“등하불명이라 하잖아요? 더구나 놈은 위태곤과 정체불명의 청의인들이 싸우는 와중에 백초령을 납치한 놈이죠. 신마성도 놈을 쉽게 잡지는 못할걸요?”
“끄응, 빌어먹을. 남창에서 놈을 쫓다 보면 자칫 신마성과 부딪칠지도 모르는데, 걱정이군.”
“신마성은 우리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겁니다.”
정체불명의 고수들이 남창에 들어와 있다. 거기에 신검문 사람들마저 와 있다.
아마 신마성은 백초령이 납치당한 것보다 그들을 더 신경 쓰고 있을 것이었다. 위태곤은 어떨지 몰라도.
‘그 교활한 놈이 초령이를 숨기기 전에 찾아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진 풍천은 해동산을 재촉했다.
“그만 가죠. 이러다 놓치겠습니다.”
두 사람이 남쪽으로 십 리쯤 내려갔을 때였다.
강이 있는 쪽에서 고함 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금속성 굉음.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비명과 악다구니.
풍천과 해동산은 숲속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격전이 벌어진 곳으로 접근했다.
백초령을 납치한 놈이 싸우고 있는 걸까? 그도 아니면 신검문 사람들이나 정체불명의 고수들이 신마성 무사들과 싸우는 소리?
어쨌든 풍천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백여 장쯤 전진했을 때, 싸우는 소리가 급격히 줄어드는가 싶더니, 두어 마디 비명을 끝으로 더 이상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유령총에서도 저랬지.’
흠칫한 풍천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격전이 벌어진 곳으로 향했다. 바로 그때, 격전이 벌어진 쪽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은밀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