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7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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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3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78화
78화
후회가 밀려들었다. 시간을 끌다가 상대의 경계심이 풀어지면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해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자신의 방인 줄 알면 안심하고 질문을 바로 할 줄 알았는데, 상대는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차도 마시고, 방 구경도 좀 하고…….
말하지 않았으면 서둘러서 질문했을 것이고, 이 어이없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났을 것이거늘.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얼굴이 일그러진 엽사문은 입술을 씹으며 풍천을 노려보았다.
그때 찻잔을 내려놓은 풍천이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근데 당신 이름은 뭐요?”
불안한 생각이 든 엽사문은 풍천이 일을 빨리 끝마치기만 바라고 묻는 대로 대답해주었다.
혹시 알아?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 생각이 바뀔지.
“엽사문.”
풍천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폈다.
“마도 엽사문? 당신이 복주의 도경방 일백 무사를 단신으로 쓸어버렸다는 그 사람?”
눈이 동그래진 풍천을 보며 엽사문은 쾌재를 불렀다.
‘그럼 그렇지!’
그는 득의에 찬 냉소를 지으며 턱을 쳐들었다.
“나를 아는군. 알았으면 빨리 혈도를 풀어라.”
하지만 풍천은 여전히 동그란 눈으로 계속 질문만 했다.
“그럼 아까 펼친 것이 절혼도요?”
이 자식이!
짜증이 난 엽사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지금 그걸 알아보려고 왔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인데, 뭐 그런 것 가지고 인상을 쓰쇼? 남자가 쩨쩨하게.”
‘뭐, 뭐야?’
“인상이 괜찮아 보여서 통이 클 줄 알았더니……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할 게 아니라니까.”
엽사문의 얼굴이 벌게졌다. 비웃듯이 째려보는 놈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뒤통수에서 열이 났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그때 문득, 십여 일 전에 찾아온 위태곤과 등청, 운조평과 시마충이 이구동성으로 씹어대던 ‘그 자식’이라는 자가 떠올랐다.
말 몇 마디로 사람 속을 쇠갈퀴로 긁듯이 긁는다고 했다. 거짓말을 어찌나 잘하는지 네 사람 다 몇 번이나 속아 넘어갔다고 했다. 다른 무공은 별론데 신법이 뛰어나서 날제비가 따로 없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눈앞에 있는 놈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자식’은 붕괴된 유령총에 완전히 갇혀서, 바위에 깔려 죽었든, 아니면 굶어 죽었든 이미 죽었을 거라고 했다.
‘이름이 풍천이라고 했던가?’
엽사문은 풍천에 대해서 말하며 이를 갈던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빨리 끝내야겠어.’
마음이 조급해진 그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싶군. 알고 싶은 게 뭔가?”
풍천도 더 여유를 부리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있는 것이 불편하신가 보군요.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묻죠. 얼마 전에 신마성의 둘째 공자인 위태곤이 장로들과 함께 찾아왔죠?”
“네가 그걸 어떻게……?”
“황산에서 올 때 혹시 여자 하나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황산에서 온 것까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멀거리며 뇌리를 긁어댄다.
엽사문은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그, 그걸 왜 묻는 거냐?”
“대답이나 해보쇼. 좋게 끝나야 나도 마음 편하게 떠나죠. 당신 팔다리 잘라서 나한테 좋을 게 뭐 있겠수?”
은근한 협박, 듣는 사람 기분 더럽게 만드는 협박이다.
동시에 더욱 강하게 밀려드는 불안감.
엽사문은 풍천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넌지시 물었다.
“혹시…… 네 이름이 풍천이냐?”
풍천의 눈이 엽사문을 향했다.
“풍천이 뭐하는 놈인지 몰라도, 내가 언제 그런 놈에 대해서 물었어요? 위태곤이 여자하고 함께 왔냐니까?”
‘하긴, 그 자식은 유령총에서 죽었다는 했는데…….’
마음이 조금 안정된 엽사문은 죽음과 맞바꿀 만한 비밀만 아니라면 대충 대답해주고 빨리 쫓아내기로 했다.
“이 공자께서 선머슴 같은 계집을 하나 데리고 오긴 했지.”
풍천은 한 시진 동안 줄기차게 질문을 퍼부어서 엽사문의 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을 때까지 몰아붙였다.
위태곤과 백초령에 대한 것만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열 중 여덟은 백초령과 전혀 상관없는 것을 질문했고, 정작 중요한 사항은 가끔 중간에 끼워서 툭 던지듯이 물었다. 풍천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나름 머리를 굴린 것이다.
‘진짜 거짓말 잘 하는 사람은 아홉 가지 진실에 한 가지 거짓을 섞는 법이지. 후후후후.’
하지만 엽사문은 풍천의 같잖은 수작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대답했다.
앞에 있는 놈의 얼굴을 오래 볼수록 미칠 것처럼 짜증이 나서, 중요한 비밀만 아니라면 적당히 대답해주고 이야기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죽일 놈의 자식, 내가 혼인을 안 하고 혼자 사는 것이 왜 궁금해?’
조금 전, 놈은 심각한 표정으로 신마성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묻다 말고 갑자기 왜 혼자 사냐고 물었다.
무지 궁금하다면서.
그뿐이 아니었다.
“혹시 예쁜 동생 없소?”
그런 질문도 했다. 그리고 뭔가 중요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경험이 많을 것 같아서 묻는데 말이오, 성질이 사나운 여자는 어떻게 해야 꽉 잡을 수 있소?”
그렇게 물었다.
도대체 왜 이곳에 와서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한단 말인가!
‘미친놈!’
엽사문은 이를 악물고, 짜증을 가득 실어서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패!”
그러다 핏대가 터질 뻔했다. 풍천이 입에서 침을 튀기며 삿대질을 하는 게 아닌가.
“뭐야? 당신 아주 나쁜 사람이구만! 여자에게 폭력이라니! 하긴 그러니 여태 장가도 못 갔지.”
졸지에 ‘나쁜 사람’ ‘여자에게 폭력을 휘둘러서 장가도 못 간 놈’이 된 엽사문은 더 이상 그런 질문에는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풍천이 ‘그 나이 되어서 아직 그런 것도 모르쇼?’하면서 불쌍한 눈으로 바라봐도 눈을 질끈 감고 꾹 참았다.
덕분에 진짜로 미치기 직전에 이야기를 마칠 수 있었다.
“쩝, 벌써 차가 다 떨어졌네.”
풍천은 찻잔에 반쯤 차 있는 차를 마저 비우고,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작별 인사를 던졌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지나가다 보면 아는 체라도 하쇼. 이것도 인연인데 혹시 압니까? 제가 술이라도 한잔 살지…….”
엽사문은 이를 하도 갈아서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오늘에서야 세상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역시 세상은 넓고, 제정신 아닌 놈들도 많았다.
‘둘째 공자와 장로들이 말한 그 자식도 이놈에 비하면 조족지혈일 거다. 하늘 아래에 이런 놈이 있다니!’
그는 풍천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아니 얼굴을 마주치기만 해도 뒤통수의 핏줄이 터져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런데 뭐라? 아는 척이라도 해? 인연?
‘네놈이 사주는 술을 마시면 내가 성을 간다!’
엽사문은 치미는 분기를 억지로 구겨 넣고 잇새로 말했다.
“마혈을 풀어주기로 약속했지 않느냐?”
풍천은 약속을 어길 생각이 없었다.
“걱정 마쇼. 나는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니까.”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는 두 군데의 혈도를 후려쳤다. 조금 세게.
퍼벅!
“컥!”
엽사문은 눈을 부릅뜨고 탁자에 고개를 처박았다. 마혈이 풀린 대신 수혈을 두들겨 맞은 것이다.
풍천은 고개를 처박은 엽사문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마혈도 풀어주고, 목숨도 살려주고, 이 정도면 약속 확실하게 지켰지 뭐.”
제2장. 남창(南昌)에 부는 바람
1
동천장을 빠져나온 풍천은 초웅이 있는 객잔으로 가면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엽사문의 말에 의하면 위태곤은 동천장에서 하루를 머문 다음 남창으로 떠났다고 했다. 백초령을 데리고.
지금쯤 남창의 신마성 총단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을 것이었다.
‘설마…… 함께 자는 건 아니겠지?’
으드득.
이를 갈던 풍천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에이, 초령이가 위태곤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더구나 초령이 성질이 어디 보통이야? 믿자, 믿어. 내가 초령이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어? 근데 왜 내가 화를 내는 거지? 위태곤과 백초령이 함께 살든 말든 나하고는 상관없잖아?’
빠드득.
이가 자동으로 갈렸다. 머리가 더욱 세차게 흔들렸다. 목뼈가 어긋날까 봐 걱정될 정도로.
‘구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구해주려는 것뿐이야. 아암, 정말 그 이유 때문에 백초령을 구하려는 거야. 절대! 질투 때문이 아니야! 절대……!’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눈에도 핏발이 섰다.
‘개자식! 초령이를 건드렸기만 해봐라! 똥물에 거꾸로 박아서 비참하게 죽여버리겠어!’
절대! 질투 때문이 아니었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그때 문득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만약 초령이가 말리면……?’
“후우…….”
갑자기 한숨이 나왔다.
여자는 남자와 하룻밤 정을 통하면 마음이 바뀌기 십상이라는데…….
‘그럼 어떡하지?’
풍천은 걱정이 태산처럼 쌓인 표정으로 초웅이 있는 방문을 열었다.
다음 날 아침. 객잔의 계산대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얼마?”
“은자 한 냥에 동전 칠십 문입니다, 공자.”
풍천은 점소이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지금 나를 바보로 알아? 그런 표정으로.
“무슨 말이야? 기껏해야 식사 한 끼하고 하룻밤 잤을 뿐인데,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나와?”
“한 끼도 한 끼 나름이죠. 방으로 들어간 식사만 해도 십인 분이 넘는뎁쇼.”
“뭔 소리야? 누가 방에서 음식 십 인분을 먹었다는 거야?”
“저기 저분이 먹었지, 누가 먹었겠습니까요? 그나마 나중에 들어간 일 인분은 아예 계산도 하지 않았는데, 멋진 공자님께서 그러시면 안 되죠.”
풍천은 점소이의 눈을 따라가 보았다. 초웅이 창밖을 보며 돌아서 있었다.
어제 분명 초웅에게 배고프면 음식을 방으로 시켜서 먹으라고 했다. 설마 두 번 먹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럼 한 번에 십 인분을 먹었다는 말이다. 아니 십일 인분을.
‘지미, 이거 돼지를 곰으로 잘못 보고 잡은 거 아냐?’
만약 하루 세끼 십 인분씩 먹는다면?
아무리 큰 모래주머니에 모래가 가득 찼다 해도 작은 구멍 하나면 텅 비는 것은 한순간이다.
자신의 돈주머니도 마찬가지다. 풍족하다고 마음대로 쓰다 보면 언젠가는 텅 빈 주머니를 보고 절망하게 될 것이다.
물론 주머니가 비는 걸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빠져나가는 것만큼 계속 채워 넣으면 된다. 능력 있는 수하를 두면 자신의 돈주머니가 더 무거워질 수도 있고.
‘최소한 자기 밥벌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나름 계산을 끝낸 풍천은 돈주머니에서 은자 한 냥과 동전 오십 문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로 끝내지.”
점소이는 옆으로 눈을 굴려 객잔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객잔 주인은 슬쩍 고개를 끄덕여서 그렇게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무인들과 다투어서 좋을 게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만 받아도 반은 남았다.
풍천은 점소이가 잽싸게 탁자 위의 은자를 낚아채자 초웅을 향해 걸어갔다.
“뭐해? 가자.”
초웅도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긁으며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 형. 그렇게 비싼 건 줄 몰랐어.”
“평소에도 그렇게 많이 먹어?”
“아니, 어제 저녁에는 삼 인분이나 더 먹었어. 아프고 나니까 배가 더 고프지 뭐야.”
삼 인분을 빼면 팔 인분이다. 한 끼에 팔 인분.
객잔을 나서는 풍천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혹시, 너무 많이 먹으니까 산채에서 쫓아낸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그런 것 같았다.
‘음, 객잔에서 음식을 시켜먹는 건 자제해야겠군. 아니면 양 많고 싼 걸로 먹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