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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풍전설 77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22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천풍전설 77화

 

77화

 

 

 

 

 

 

뭐 이런 놈이 있어?

 

구기홍은 머릿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이 수백 조각으로 토막 쳐서 죽일 놈! 내가 죽이고 싶은 사람은 바로 너야, 너!’

 

물론 풍천도 모르지 않았다. 그냥 약 올리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일 뿐.

 

피식. 

 

풍천은 실없는 웃음을 짓고는 일단 구기홍의 바지를 올려주었다. 허리춤이 풀어진 상태에서 끌려오다 보니 바지가 반쯤 내려간 상태였다.

 

그냥 놔두어도 되지만, 한쪽으로 축 처진 그걸 빤히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왠지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았다.

 

“물건도 새끼손가락만 하네. 이걸 가지고 뭘 찌르고 말고야.”

 

‘씨발 놈! 너는 얼마나 커서!’

 

“에이, 냄새. 다 큰 어른이 오줌도 쌀 줄 모르나? 왜 옷에다 싸?”

 

‘네놈이 엉덩이를 차서 이렇게 되었잖아, 개자식아!’

 

풍천은 대충 덜렁거리는 물건을 가리고 담담히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말이야, 아혈이 풀렸다고 소리 지르면 내가 무지 기뻐할 거야.”

 

‘뭔 말을 하는 거야?’

 

화를 낸다고 해야 맞다. 그런데 기뻐하다니.

 

‘이거 미친놈 아냐?’

 

“팔다리 다 부러뜨린 뒤 물에 던져놓으면 헤엄쳐서 나올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가라앉을까? 어릴 때부터 무지 궁금했거든.”

 

‘헉! 정말 미친놈이었어!’

 

와락 겁이 났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종자 중 하나가 바로 미친놈들이다. 미친놈들은 제정신이 아닌 놈들답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때 풍천이 구기홍을 보며 씩 웃었다.

 

열기 하나 없는 웃음. 너무 차가워서 달빛조차 따뜻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구기홍은 분노의 눈빛을 간절한 애원의 눈빛으로 바꾸었다. 자존심보다는 목숨이 더 중요했다.

 

‘절대 소리 지르지 않을 테니, 살려만 줘!’

 

풍천은 구기홍의 눈빛이 바뀌었다는 걸 알고 턱을 쓰다듬었다.

 

“그 전에 힘줄부터 잘라놓을까? 묻는 말에 대답을 잘 안 할지도 모르니, 미리 겁을 줘놓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구기홍의 얼굴이 어둠보다 더 검게 변했다.

 

‘뭐든 물어봐! 다 대답해줄 테니까! 제바아알!’

 

 

 

풍천이 갈대숲에서 나온 것은, 구기홍을 끌고 들어간 지 이 각가량이 지난 후였다.

 

밖으로 나온 그는 태연한 걸음걸이로 선착장을 가로질렀다.

 

‘위태곤이 오긴 왔단 말이지?’

 

구기홍은 묻는 말에 친절하게 대답했다. 흑서귀보다 아는 것도 훨씬 많았다.

 

덕분에 팔다리가 부러지지도 않았고, 부러진 팔다리로 헤엄치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풍천은 그의 팔다리를 살짝 비틀어놓았다. 그리고 비밀스럽게 일하는 사람들이 자주하는 ‘우리는 만난 적이 없는 거요’라는 말을 남기고, 턱을 한 대 후려차서 한동안 기절시켰다.

 

좀 심하게 차서 언제 깨어날지, 아니 깨어날 수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약속은 지킨 셈이었다.

 

‘뛰어난 해결사는 자신의 말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지.’

 

아무리 귀찮더라도.

 

사실 백초령을 구하려는 것도 그런 해결사의 의무감이 없지 않았다.

 

 

 

“나만 믿어!”

 

 

 

그렇게 말해놓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 이유는 반 정도고, 나머지 반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초령이를 내 마누라로 삼지 않더라도, 위태곤 같은 변태 놈에게 맡길 순 없어!’

 

내가 못 먹는 떡, 남이 먹는 꼴을 못 보는 성격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질투라 해도 좋고.

 

다만 분명한 것은, 백초령을 위태곤이 끌어안는 걸 상상하면 자신도 모르게 열불이 솟구친다는 것이다.

 

‘개자식! 가만 안 두겠어!’

 

그저 그걸 생각한 것만으로도 이런 마음이 드는데, 만약 직접 두 눈으로 보면…….

 

풍천은 분노의 감정을 겨우 추스르고 저 멀리 보이는 동천장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3

 

 

 

휘익!

 

풍천은 동천장의 뒤로 돌아간 다음 한 마리 야조처럼 담장을 넘었다. 후원은 간간이 경비 무사들이 오가고 있을 뿐 전체적인 분위기가 산사의 절간처럼 고요했다.

 

‘마도 놈들이 지내기에는 과분한 곳이군.’

 

풍천은 좌우를 둘러본 후, 구기홍의 말을 떠올리면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뒤쪽 담장을 넘어가서 삼 층 전각을 보며 반듯이 가다보면 정원이 나오고, 그 다음에 고위 간부들의 거처가 나온다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붕을 타고 전각 두 개를 지나자 제법 정성들여서 꾸며진 정원이 보였다.

 

정원을 지난 그는 다시 전각 하나를 넘어갔다.

 

그때였다. 전각의 지붕을 넘어가서 전면을 바라보던 풍천의 눈빛이 길거리에 떨어진 황금을 본 것처럼 반짝거렸다.

 

전각 뒤쪽에 제법 넓은 공터가 있었는데, 한 사람이 칼을 들고 달빛을 받으며 석상처럼 공터에 서 있었던 것이다.

 

풍천은 전각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달빛 아래 서 있는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벽라동에서 지낸 후 밤눈이 더 좋아진 상태. 거리가 이십 장이나 되는데도 얼굴의 잔주름까지 보였다.

 

‘괜찮은 인상이군.’

 

나이는 마흔 중반쯤. 각이 진 얼굴에는 강인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는 연무장으로 보이는 공터의 중앙에 서서 두 손을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오른손에는 유엽도를 들고 있었다. 혼자서 도법을 수련하는 중인 듯했다.

 

‘저자로 할까?’

 

멀리서 보는데도 상당히 강한 기의 파동이 느껴진다.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만이 흘려낼 수 있는 기파(氣波).

 

동마부 안에서 저 정도의 고수가 몇이나 될까? 한 다섯 명 정도?

 

그렇다면 자신이 원하는 적당한 상대다. 오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

 

잠시 바라보던 풍천은 중년인이 도법을 펼치기 시작하자, 전각의 그림자 속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뒷짐을 진 채 태연히 중년인을 향해 다가갔다.

 

서너 걸음에 중년인과의 거리가 오륙 장으로 줄어들었다.

 

‘거 참, 칼질 한번 시원하게 하는군. 대답도 칼질처럼 시원하게 했으면 좋겠는데.’

 

그때였다.

 

중년인이 칼을 휘두르던 그대로 홱 몸을 돌리더니 풍천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마도(魔刀) 엽사문이 누군가의 접근을 눈치챈 것은 절혼도(絶魂刀)의 세 번째 초식인 단혼절(斷魂絶)을 펼칠 때였다. 허공을 가른 도를 옆으로 흘리며 몸을 띄웠는데, 불과 오 장 거리에 서 있는 사람이 보인 것이다.

 

‘어떤 놈이 허락도 없이……!’

 

그는 단혼절을 펼치다 말고 몸을 틀며 풍천을 향해 날아갔다.

 

풍천은 날아오는 엽사문을 향해 빙긋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적절한 인사였다.

 

“안녕하쇼!”

 

엽사문은 생각지도 못한 풍천의 행동에 움찔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그대로 풍천의 머리 위를 향해 떨어져 내리며 도를 내리그었다.

 

쉬이익!

 

감히 자신의 수련을 구경한 놈이다. 죽어도 싼 놈!

 

미친놈 같지만, 그렇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유엽도의 시퍼런 검기는 찰나 간에 풍천의 몸을 긋고 지나갔다.

 

하지만 엽사문은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우측으로 일 장가량 미끄러진 다음, 번개처럼 돌아서며 주위를 쓸어보았다.

 

분명 자신의 도가 긋고 지나갔는데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그때 풍천이 본래의 자리에서 고개를 모로 꼬고 말을 건넸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웃는 얼굴에 침 뱉으면 좀 그렇죠.”

 

홱 고개를 돌린 엽사문은 눈빛을 파르르 떨었다.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분명 잘라냈거늘…….’

 

숨을 천천히 들이쉰 그는 나직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누구냐고 물었다.”

 

“거참, 딱딱하기는.”

 

찰나였다. 풍천의 몸이 흐릿해졌다.

 

엽사문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대경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십 년 동안 강호를 횡행한 그였다. 신법에 뛰어난 자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눈을 완벽히 속일 수 있는 자는 두어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앞에 있는 놈은 그들 중 하나도 아니었고 나이도 훨씬 젊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사술인가, 아니면 정말 귀신인가.

 

이를 악문 엽사문은 뒤로 빠르게 물러서며 도를 휘둘렀다.

 

쉬쉬쉬쉭!

 

그러나 지금은 밤이었다. 천풍의 세상.

 

풍천은 진짜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엽사문을 따라가며 손을 저었다. 보이지도 않고, 기도 느껴지지 않는 신법. 천풍무영류가 펼쳐진 것이다.

 

엽사문은 느닷없이 코앞에 나타난 손을 보고 기겁했다.

 

“헛!”

 

그는 재빨리 몸을 뒤로 눕히며 허공을 다섯 번 그었다.

 

초식이고 뭐고 없었다. 본능에 따른 임기응변의 칼질일 뿐!

 

그래도 절정의 고수답게 그의 도에서는 시퍼런 도기가 넘실거리며 흘러나와서 허공을 난자했다.

 

풍천은 엽사문이 펼친 도초의 빈틈을 파고들며 손을 뻗었다.

 

퍽!

 

“큭!”

 

뒤로 몸을 반쯤 눕히고 있던 엽사문은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완전히 뒤로 넘어갔다.

 

그 와중에도 좌측으로 몸을 굴린 그는 세 바퀴를 구른 후 벌떡 일어나서 풍천을 찾았다.

 

순간, 바로 코앞에 풍천의 얼굴이 보였다.

 

퍼벅.

 

피할 새도 없이 혈도가 찍힌 엽사문은 허탈한 표정으로 풍천을 바라보았다.

 

너무 황당한 패배에 분노도 일지 않았다.

 

신마성 동마부의 절혼단주인 자신이 이토록 허무하게 당하다니.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몇 가지만 물어볼 거요. 어렵지 않은 질문이니까 빨리 끝냅시다.”

 

엽사문을 옆구리에 낀 풍천은 인기척이 없는 은밀한 곳을 찾아보았다.

 

 

 

풍천은 근처의 전각 중 사람이 없는 방으로 들어갔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의 방인지 제법 고급스럽게 꾸며진 방이었다.

 

미간을 좁힌 풍천은 방을 둘러보며 망설였다.

 

‘언제 올지 모르는데, 다른 곳으로 갈까?’

 

방주인이 지위가 높은 자라면 부딪쳤을 경우 일이 복잡해질 수 있었다. 도망이야 갈 수 있을 테지만, 목적한 일이 헛수고로 돌아갈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엽사문까지 데리고 장소를 옮기기가 귀찮아진 풍천은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했다.

 

설마 바로 오지는 않겠지?

 

‘오면 재빨리 입을 막아서 한쪽에 구겨놓지 뭐. 잘하면 그자에게도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

 

자신의 결정에 만족한 풍천은 엽사문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아혈을 풀어줄 테니 소리 지르지 마쇼. 몇 가지만 물어보고 갈 거니까. 내 말을 이해했으면 눈을 깜박이쇼.”

 

엽사문은 눈을 깜박였다.

 

‘정말 눈을 깜박인다고 혈도를 풀어줄까?’ 의문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에겐 선택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풍천은 정말로 엽사문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엽사문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풍천을 쳐다보았다.

 

풍천은 세상에서 제일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의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나는 약속을 칼처럼 지키는 사람이오. 묻는 말에 대답만 제대로 해준다면 마혈도 풀어주겠소.”

 

“살려주겠단 말이냐?”

 

“사실 신마성하고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약속을 했으니 반드시 지킬 거요.”

 

안 좋은 정도가 아니다. 신마성 때문에 유령총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백초령마저 위태곤에게 넘겨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형에 대한 복수도 해야 했다.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복수의 시간을 늦추기로 마음먹었지만.

 

“안 좋은 관계라. 하긴, 그러니 몰래 숨어들어왔겠지.”

 

“누가 올지 모르니 거두절미하고 묻겠소.”

 

풍천이 나름 문자까지 써가며 서두르는데 엽사문이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이 시간에는 올 사람이 없다.”

 

“글쎄, 그거야 당신 생각이고…….”

 

“나는 수련 중 방해받는 걸 아주 싫어하지. 그래서 이 시간에는 내 방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

 

풍천은 엽사문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여기가 당신 방이라고?”

 

엽사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엽사문의 말에 여유를 되찾은 풍천은 좌우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럼 뭐 서두르지 않아도 되겠군.”

 

그러고는 일단 탁자 위에 있는 찻주전자에서 차를 한 잔 따라 마셨다.

 

“당신도 마실 거요?”

 

풍천은 혼자만 마시는 게 조금 미안해서 엽사문에게도 권했다.

 

엽사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제길, 차라리 말하지 말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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