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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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74화
74화
한편, 신검전에서 한 시진 가까이 앉아 있던 백무천은 신검전의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수련실로 내려갔다.
수련실에서는 영호관이 가부좌를 튼 채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다.
백무천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의자에 앉았다.
그로부터 일 각, 운기행공을 마치고 눈을 뜬 영호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오셨습니까, 사부님.”
“몸은 좀 어떠냐?”
“진기가 이제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부님께서 내려주신 영약의 약효가 좋아서 공력이 많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 잘됐군. 얼굴은 어떠하냐?”
“아직까지 큰 불편은 없습니다.”
“얼굴의 독상이 심해서 귀수괴의도 성공 할 수 있는 확률이 반밖에 안 된다 했거늘, 부작용이 없다니 천만다행이구나.”
“모두 사부님의 보살핌 덕분입니다.”
“나의 보살핌보다는 너의 의지가 강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하지만 안심하지 말고 계속 약을 복용하도록 해라. 덧나면 큰일이니까.”
“예, 사부님.”
“그리고 조금 전에 연락이 왔는데, 초령이가 살아서 신마성에 간 것 같다. 해서 청백이가 사람들을 이끌고 남창에 가기로 했느니라.”
“아, 정말 다행입니다.”
“해서 하는 말이다만, 며칠 더 지나도 얼굴에 이상이 없으면 네가 움직여줘야겠다.”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영호관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답하고 백무천을 바라보았다.
백무천은 의자에서 일어나 영호관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영호관의 어깨에 손을 얹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 자신을 숨김에 있어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저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자들, 한순간만 방심해도 역습을 당할지 모른다.”
“명심하겠습니다.”
백무천은 느릿하니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손을 내리고 말했다.
“미려에게는 아이를 낳을 때까지 친가에 가서 몸을 추스르라 했다. 그러니 그녀에 대해선 부담 갖지 않아도 될 게야.”
소미려. 그녀는 영호관의 부인으로 현재 임신 중이었다.
영호관은 내심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백무천은 할 말이 더 있었지만 억지로 삼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소용돌이가 맴돌고 있는 시기. 지금은 개인적인 일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영호관도 그걸 모르지 않기에 굳이 다른 것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받아라.”
백무천은 영호관에게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누렇게 색이 바랜 책은 장수가 십여 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책자의 겉장에 쓰인 제목을 본 영호관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무원검(無源劍).
그것은 백무천에게 신검무제라는 위대한 칭호를 선사한 절대의 검급이었던 것이다.
“사부님…….”
“그 검을 청백이에게 주지 않은 것은 청백이와 어울리지 않는 검이기 때문이다. 청백이도 그걸 알고 대신 일원검을 익힌 것이지.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명이 떨어질 때까지 무원검(無源劍)을 깨닫는 것에만 전념하도록 해라.”
영호관은 격동을 억누르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예, 사부님.”
3
춘풍이 열풍으로 변해가던 어느 날 오후.
허름한 낭인 차림의 청년이 강서성 경덕진(景德鎭) 동문을 향해 다가가며 짜증을 냈다.
“제길, 왜 이리 더워?”
청년은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태양을 원수처럼 노려보며 경덕진으로 들어섰다.
건들거리는 걸음걸이, 옆구리에서 흔들거리는 한 자루 장검, 그는 황산을 떠나온 풍천이었다.
‘유령곡이 완전히 무너졌던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유령곡은 날짐승만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곡 안에 있던 탑은 산더미 같은 바위에 깔려서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황산에서 내려온 그는 신검문으로 가야하나, 아니면 신마성으로 가야하나 망설였다.
하지만 망설임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먼저 백초령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봐야 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것이야 그 일을 알아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거니까.
그런데 위태곤이 백초령을 끌고 신마성으로 갔다면 어차피 신검문으로 간다 해도 다시 내려와야 했다.
그는 신검문까지 오가며 보낼 시간이 아까웠다.
그리고 그에게는 신마성에 가야할 확실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위태곤이 아니라도 형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을 거야. 설추교도 알지 모르고…….’
딱 열을 셀 동안에 결정을 내린 그는 경덕진으로 방향을 틀었다.
경덕진에는 신마성의 사대지부 중 하나로, 강서성 동부의 마도문파를 관장하고 있으며, 안휘성 남부의 일을 지휘하는 지휘부, 동마부(東魔府)가 있었다.
동마부라면 위태곤의 행적은 물론 유령총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중원 최대의 도자기 산지인 경덕진이다. 돈이 넘쳐나는 곳. 수소문해보면 하오문의 지부를 찾는 것이 어렵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풍천은 하오문을 찾아가지 않기로 했다.
하오문을 찾아가면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도 알려질 터, 자신이 살아있다는 게 알려지면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첫째, 위태곤과 신마성의 장로들이 이를 갈며 죽이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둘째, 자신에게 청부한 놈들이 선불로 준 돈을 돌려달라고 할지 모른다. 그동안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으니까.
미쳤어? 돌려주게? 자신이 뭐 연락하기 싫어서 안했나?
마지막으로, 정체불명의 흑의인들이 쫓아올 것이다. 풍천은 그것이 제일 껄끄러웠다.
해서 하오문을 찾아가지도 않고, 찢어진 옷을 갈아입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반쯤 가려서 모습을 바꾸었다.
‘높은 놈 하나 잡아서 족쳐봐야지. 그 전에 일단 뭐 좀 먹고…….’
풍천은 경덕진에 들어서자마자 객잔을 찾아서 두리번거렸다.
경덕진에서 만드는 도자기는 천하제일로 소문이 나 있는 만큼 길가에 도자기 파는 가게가 즐비했다.
또한 중원 곳곳에서 도자기를 사기 위해 오는 사람이 많다 보니 그만큼 객잔도 많았다.
풍천은 그 많은 객잔 중 자신의 마음에 드는 곳을 골랐다.
“저곳이 좋겠군.”
[선풍객잔(仙風客盞)]
“캬아, 신선의 바람이라, 정말 멋진 이름이군. 꼭 나를 위해서 지은 이름 같잖아?”
객잔에서 나오던 자가 같잖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든 말든 풍천은 활짝 웃으며 객잔의 주렴을 젖혔다.
순간 후끈한 바람이 밀려왔다. 왠지 이상한 냄새까지 섞여서. 신선의 바람과는 거리가 먼, 그런 바람이었다.
‘그래도 뭐 이름이 멋지니까…….’
풍천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딱 두 걸음 들어갔는데 우측에서 조금 전의 냄새가 다시 밀려들었다.
“꺼어어억, 비켜 임마!”
트림과 함께 쏟아지는 역겨운 냄새. 고막을 뒤흔드는 우렁우렁한 목소리.
고개를 돌린 풍천의 두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거짓말하나 안 보태고 덩치가 자신의 세 배쯤 되는 거구의 청년이 서 있었는데, 술에 취했는지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 입에서는 고약한 술 냄새가 났다.
“왕곰이군.”
풍천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흘러나왔다.
자신도 키가 큰 편이었다. 그런데도 거구 청년의 가슴정도밖에 닿지 않았다. 그리고 옆으로 퍼진 넓이는 자신의 두 배가 족히 넘어 보였다.
‘삼백 근은 나가겠는데?’
더구나 입은 어찌나 큰지 주먹을 뻗으면 그냥 쏙 들어갈 것 같았고, 부릅뜬 눈은 아이들 주먹만 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거구 청년이 불콰한 얼굴에 인상을 잔뜩 쓰며 다그쳤다.
그러든 말든, 풍천은 거구 청년의 허리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구 청년의 허리에는 칼이 한 자루 걸려 있었다. 그가 처음 보는 거대한 환도였는데, 칼날의 넓이는 한 뼘 정도, 길이가 다섯 자는 되었다. 칼날의 길이만 말이다.
“요즘은 곰도 칼을 쓰나보군.”
“이 너구리 같은 자식이!”
부웅!
쫙 펼쳐진 부채가 풍천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아니, 그것은 부채가 아니라 거구 청년의 손바닥이었다. 하도 커서 부채처럼 보인 것뿐.
풍천은 고개를 들며 좌수를 저었다.
좌수에 오리 알 굵기의 봉이 잡혔다.
“이게 손가락이야, 작대기야?”
풍천은 혀를 내둘렀다. 그가 잡은 오리 알 굵기의 봉은 거구 청년의 중지였다.
“이 족제비 같은 놈이!”
휙!
이번에는 머리통만 한 바윗덩이가 날아왔다.
풍천은 손을 쫙 펴서 바윗덩이를 받아냈다.
“내 머리통만 하군.”
머리통만 한 바윗덩이는 거구 청년의 주먹이었다.
거구 청년은 벌게진 얼굴로 중지와 주먹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중지와 주먹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풍천은 고개를 쳐들고 거구 청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발을 뻗으면 무릎을 차버릴 거야.”
순간, 막 발을 뻗으려던 거구 청년이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이, 이, 돼지 같은 놈, 안 놔!”
너구리와 족제비에 이어 돼지가 된 풍천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구리’나 ‘족제비’는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돼지’는 기분이 굉장히 나빴다.
“이봐, 당신과 나, 둘 중 누가 돼지처럼 보이는지 물어볼까?
거구 청년의 왕방울 같은 눈이 좌우로 굴렀다. 떼구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도 잠시, 거구 청년은 와락 달려들며 풍천을 덮쳤다.
“에잇!”
‘삼백 근의 거대한 몸에 눌리기 싫으면 손을 놓을 수밖에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풍천은 슬쩍 몸을 비틀며 두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
넉 냥의 힘으로 천근을 다스린다는 상승의 수법이었다.
순간, 거구 청년의 거대한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그리고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떨어지더니 바로 옆의 탁자를 하나 박살냈다.
쾅!
거구 청년을 패대기친 풍천은 버둥거리며 일어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그 다음에는 불안한 눈으로 구경하던 객잔의 손님들 중 몇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돼지가 하늘을 나는군.”
“낄낄낄, 어벙하게 생긴 친구가 한 가락 하는데?”
‘한가락 한다는 말만 하면 됐지, 어벙하다는 말은 왜 해?’
풍천은 낄낄거리는 자들을 째려보았다. 구석진 곳의 탁자에 네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 무기를 차고 있는 무인이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그들이 더 어벙하게 보였다.
그때 몸을 세운 거구 청년이 씩씩거리며 커다란 칼을 빼들었다.
창!
“너, 너, 가만 안 둘 거야!”
‘정말 크군!’
풍천은 거구 청년이 빼든 칼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칼집만 크고 속에 든 칼은 작을 수도 있었다. 하다못해 두께가 얇을 수도 있고. 그런데 거구 청년의 칼은 빼드니까 더 커 보였다.
“그 칼로 지금 날 죽이겠다는 거야?”
“검을 빼라! 나는 무기를 들지 않은 놈은 죽이지 않는다!”
“그럼 적수공권을 쓰는 사람들은 죽이지 않았겠네?”
거구 청년의 눈이 흔들렸다.
“그, 그건…… 좌우간 너는 검이 있잖아! 검을 빼!”
“싫은데? 난 식사하러 왔지, 싸우러 온 게 아니거든?”
“정말 안 뺄 거야! 끝까지 안 빼면…… 안 빼도 죽인다!”
“자신이 결심한 말을 금방 바꾸다니. 남자도 아니군.”
“난 남자야!”
“그래? 좋아, 그럼 싸우자고. 단! 일단 식사부터 하고 싸워. 나는 지금 배가 무지 고프거든?”
“지금 날 놀리는 거냐!”
맞아, 놀리는 거야.
‘생긴 건 영락없이 산적대왕처럼 생겼는데 의외로 순진한 면이 있군.’
풍천은 정말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신마성의 영역, 그것도 동마부가 있는 경덕진이다. 들어오자마자 관심의 대상이 되어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장난처럼 슬쩍 말을 돌렸다.
“이봐, 나보다, 저기서 당신이 당한 걸 보고 웃는 사람들부터 혼내주는 건 어때? 당신보고 돼지라고 하던데.”
그런데 거구 청년은 정말로 고개를 돌려 네 명의 장한이 있는 탁자를 쳐다보았다.
그때 장한 중 낄낄거렸던 자가 말했다.
“덩치는 곰만 한 놈이 하는 짓은 정말 멍청한 돼지 같군,”
“뭐야? 돼지?”
거구 청년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장한을 노려보았다.
어릴 때부터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바로 ‘돼지 같은 놈’이라는 말이었다. 이웃집에 사는 백정이 돼지 잡는 걸 본 후로는 더 싫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돼지라니! 그것도 멍청한 돼지!
“이 쥐새끼처럼 생긴 게 어디서 나를 놀려!”
거구 청년은 언제 풍천하고 싸웠냐는 듯 풍천은 쳐다보지도 않고 장한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거구 청년을 놀렸던 장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얼굴이 거무스름한 그는 정말 쥐처럼 눈이 작고 입이 툭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로 인해서 얻은 별호가 바로 흑서귀(黑鼠鬼)였다.
그는 그 별호는 아주 싫어해서 스스로 흑호귀(黑虎鬼)라는 별호를 만들고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주기를 원했다.
“돼지 같은 놈이 덩치만 믿고 입을 함부로 놀리다니, 죽으려고 작정한 놈이구나.”
“흥! 가까이서 보니 정말 쥐새끼처럼 생겼군. 그것도 까만 쥐새끼!”
“죽일 놈!”
장한은 의자를 박차고 곧장 거구 청년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