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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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0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72화
72화
함께!
풍천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난 아수비처럼 헤엄을 잘 치지 못하는데…….”
백초령에게는 장강의 수신이라고 떠벌렸지만 사실 그는 겨우 개헤엄을 치는 정도의 실력이었다.
“제가 가르쳐줄게요.”
“그, 그래?”
“옷 벗고 들어와요.”
“……어.”
6
그날, 식사를 마치고 잠을 청할 때였다.
그림자 하나가 풍천의 석실로 스며들었다.
환영처럼 석실로 스며든 그림자는 잠을 자는 풍천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풍천의 숨소리가 고른 것을 확인하고 슬며시 풍천의 침상으로 올라갔다.
‘할아버지의 명 때문에 온 것만은 아니에요. 제가 원해서, 당신이 좋아서 온 거예요.’
그림자, 아수비는 곧 닥쳐올 미지의 일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의 눈빛으로 풍천을 응시하며 고개를 숙였다.
순간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푸르스름한 안개가 흘러나오더니 풍천의 코와 입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당신은 꿈만 꾸세요.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예요. 나중에 오늘의 꿈이 떠오르더라도 진실을 알려고 애쓰지 말아요. 당신이 기억하지 못해도 저는 괜찮아요.’
풍천은 자신의 몸이 불속에 빠진 꿈을 꾸었다.
뜨거우면서도 부드러운 불꽃은 그를 집어삼키고 춤을 추었다.
그런데 기이했다. 시뻘건 불속에 빠졌는데도 고통 대신 황홀함이 밀려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겪지 못한 황홀한 기분에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정신을 차리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다 해도…….
지금의 상황이 계속되었으면…….
불꽃의 춤은 스러질만하면 다시 살아나고, 또 살아났다.
하늘에서는 열락의 노랫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이 꿈이 영원히 깨지 않기를…….
풍천은 아등바등 꿈을 부여잡고 잠에서 깨지 않기 위해 발악했다. 하지만 그가 발악할수록 꿈은 멀리 사라지고 정신만 말짱해졌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갑자기 들리는 아극타의 갈라진 목소리.
벌떡 몸을 일으킨 풍천은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극타가 입구의 벽에 기대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바라보는 눈빛이 묘했다.
만감이 교차한 눈빛. 짜증, 분노, 포기, 애증. 복잡했다.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얼굴도 못생긴 사람이 저런 눈빛으로 보니까 속이 울렁거리잖아?
풍천은 인상을 쓰며 툭 쏘아붙였다.
“뭡니까? 왜 잠자는 사람을 놀라게 해요?”
아극타의 눈빛이 정리되고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족장님께서 부르신다, 가자.”
그는 그 말만 하고 돌아섰다.
풍천은 고개를 모로 꼬고 아극타의 등을 바라보며 일어섰다.
몸이 전과 다르다는 걸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영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하기만 했던, 유혼과 동화되면서 몸속에 남은 기운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좋은 꿈을 꿔서 그런가? 신기하네.”
앞서가던 아극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저딴 놈이 뭐가 좋다고…… 바보 같이…….’
풍천이 바위에 대충 엉덩이를 걸치자 아극사가 말했다.
“오늘 나가도록 해라.”
‘오오! 드디어 나가는군! 흐흐흐, 두 번 다시 만나지 맙시다, 노인장!’
풍천이 입이 찢어지도록 좋았지만 최대한 감정을 숨겼다. 너무 좋아하면 무슨 심술을 부릴지 몰랐다.
“뭐 그렇게 하죠.”
아극사는 그런 풍천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냉소를 지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 해서 우리를 속일 생각하지 마라. 네 몸에 가해진 금제는 만 리 밖에서도 제어할 수 있으니까.”
그럼 십 만 리는요?
풍천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걸 꾹 참고 볼만 씰룩였다.
‘뭔 금제가 만 리 떨어진 곳에서도 가능해?’
아수비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영혼으로 연결된 금제는 거리에 구애를 받지 않아요.”
‘끄응, 나하고 무슨 웬수를 졌다고 그런 금제를 한 거야? 당신들 웬수는 공손곽과 천상신문이지 내가 아니잖아?’
그래도 자신을 걱정하는 아수비의 눈빛에 한번 더 참았다.
“걱정 마쇼. 내 이래 봬도 약속 하나는 칼처럼 지키는 멋진 사나이니까.”
청부업자는 본래 약속을 잘 지켜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언제 어디서 목이 떨어져 죽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아극사는 풍천의 말을 반도 믿지 않았다. 비록 벽라동에 있는 책이나 문서들이 모두 구백 년 이전의 것이지만, 사람을 평가하는 방법은 그리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읽은 글에 의하면 입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놈치고 믿을 놈 없다고 했다.
그 글이 꼭 풍천처럼 떠드는 놈을 말하는 듯했다.
‘사나이? 강호에 사나이가 다 죽었나보군.’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멋진 사나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바깥세상에 팔불출만 사는 게 아니라면.
“헛소리 말고 내 말을 잘 들어라. 일의 성패와 관계없이 삼 년이 지나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
“만약 엄청나게 바쁜 일이 있어서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야 머리와 심장이 터져서 죽겠지.”
담담한 목소리. 머리와 심장이 터지는 것 정도는 별일이 아니라는 투다.
‘자신의 몸이 아니니까 터지든 말든 상관없다 이거지?’
풍천은 기분이 팍 상했지만, 토 달아봐야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순순히 고개를 숙일 수는 없는 일.
“뭐, 반드시 그래야 한다면 말씀대로 삼 년 안에 돌아오죠. 근데 그 사이 어르신이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쩌죠? 그럼 제 금제를 풀어줄 사람이 없잖아요?”
풍천은 그 말을 하며 아극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극사가 죽으면 환호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눈을 반짝이며.
아극사는 냉랭한 어조로 간단히 대답해주었다.
“그럼 네놈을 지옥에서 만나게 되겠지.”
‘함께 죽자 이거군. 노인네가 성질머리하고는…….’
풍천은 더 이상 아극사를 자극하지 않았다. 더 자극하면 시도 때도 없이 금제를 시험해볼지 몰랐다.
“좋습니다. 그럼 약속을 이행하고 삼 년 안에 돌아오도록 하지요.”
풍천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라동에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삼 년이 지나기 전에 뵙겠습니다.”
풍천이 나름 정중하게 인사하고 고개를 드는데, 아극령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덤벙거리지 좀 마. 달이 뜨는 밤이 되어야 나갈 수 있으니까.”
아수비가 아극령을 한 번 째려보고는, 풍천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그때까지 가서 쉬세요. 시간이 되면 제가 찾아갈게요.”
“그, 그래?”
풍천은 머쓱한 표정으로 대꾸하며 아극령을 흘겨보았다.
‘자식, 좀 일찍 말하면 입술이 부르트기라도 하냐?’
7
아수비가 찾아온 것은 다섯 시진 쯤 지난 후였다.
풍천은 오 년보다 길게 느껴지는 그 시간 동안 침상에서 뒹굴며 바깥에 나가면 할 일을 생각했다.
그동안 억지로 눌러놓았던 오만 잡생각이 다 기어나왔다.
백초령은 무사할까?
그날 함께 온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신마궁 놈들은? 구룡회 사람들과 남궁세가 사람들은? 그리고 그 악귀 같던 흑의인들은?
위태곤은 형의 죽음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고 했다. 무슨 말일까?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그러다 엎어져서 입맛을 다셨다.
‘어제 꿈은 정말 기가 막혔는데…….’
그때 아수비가 들어왔다.
“가지고 나갈 것은 다 챙겼어요?”
짐이라고 해봐야 별것 없었다.
돈주머니는 품속에 그대로 있고, 벽월적도 목에 걸려 있고, 지천에 깔린 것 중 제일 때깔 좋고 번들거리는 걸로 골라서 몰래 챙긴 청광석도 품속에 있었다.
풍천은 침상에서 풀쩍 내린 후 검을 옆구리에 척 차고 아수비를 바라보았다.
“준비 끝, 가자고.”
잠시 후.
풍천은 아수비를 따라서 외부로 나가는 통로로 들어섰다.
벽라동을 나간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도 통로에 들어서자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먹먹했다.
그동안 그렇게 깊은 정이 들었던 걸까?
물론 아극사나 아극타나 아극령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온전히 아수비 때문이었다.
“혼인은 했어요?”
삼십 장쯤 올라갔을 때 뜬금없이 아수비가 물었다.
“응? 아니.”
“그럼 혼인할 여자는 있어요?”
혼인할 여자? 백초령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에이, 백초령은 대가 너무 세. 혼인하면 피곤할 거야. 나는 역시 부드럽고 마음씨 고운 여자가 어울려. 아수비처럼…….’
“아직 결정된 것은 없어.”
“만약 자식을 낳으면 어떤 이름을 붙여주고 싶으세요?”
“자식 이름? 하하, 글쎄? 음…….”
“저 같으면 연(然)이라고 지을 거예요.”
“연? 그것도 괜찮은 이름 같은데?”
벽라동에서 외부로 통하는 제삼의 통로는 길이가 백 장에 이르렀다. 자연동굴을 깎아서 만든 통로는 매우 험했는데 모두 사중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그 중 삼 단계에 걸친 차단벽은 벽라동 사람들이 버섯과 이끼를 따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오갔으니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마지막 네 번째 차단벽이었다.
외부와 직결된 차단벽. 그곳은 구백 년 전 닫힌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외부에서는 아예 열 수도 없고,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결국 문을 열려면 안에서 열 수밖에 없는데 구백 년 전 영원히 차단하겠다며 기관을 부숴버린 상태였다. 안에서도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그런데 지난 보름 동안 아극사가 아극타와 아극령을 데리고 그 기관을 복원했다.
풍천은 그 말을 마지막 차단벽 앞에 와서야 들었다.
‘그들이 이곳의 기관을 복원했다고?’
“기관을 워낙 철저히 부숴놔서 조금 열리게 하는 것도 아주 힘들었나봐요. 자칫 잘못 건들면 통째로 무너질지 모르거든요.”
아수비에게 그 말을 들으니 그동안 속으로 욕만 한 것이 조금 미안했다.
풍천은 머쓱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거대한 석문을 쳐다보았다.
이곳 석문에는 아무런 조각도 없었다.
만에 하나 조각하는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갈까 봐 일체 건들지 않은 것이다. 존재를 완벽히 지우기 위해.
“왜 그동안에는 안 고쳐 놓은 거지? 밤에는 태양빛이 없으니 나가도 괜찮을 거 아냐?”
아수비는 아련한 눈으로 석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고쳐 놓으면 나가고 싶어질 거예요. 못 나가게 해도 누군가는 남의 눈을 속이면서 몰래 나가게 될 거고요. 그러면 또 과거의 일이 재현되겠죠. 조상님들과 할아버지는 바깥세상과 다시 인연을 가지는 순간이 우리 벽라족의 마지막이라 생각하셨어요.”
욕망은 작은 것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결국 죄악으로 변질된다.
사람인 이상 욕망이라는 덫에 걸리면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주 특별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그 몇몇에 들어갈 거라고 착각한다. 절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거기에서 절망이 시작되고, 분노가 자라나고, 죄악이 범해진다.
어쩌면 그게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일지도…….
“하긴 조상들의 선택이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사실 바깥세상은 아수비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할 것이 없거든. 거짓과 위선이 판치고, 서로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고…….”
“그래서 당신이 가슴 속 깊은 곳에다 많은 걸 감추고 살아가는가 보군요.”
“나? 나야 뭐, 원래 게으른 놈이어서 그렇게 사는 거고……. 하, 하, 하.”
풍천은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아수비를 힐끔거렸다.
아수비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한번 안아 봐도 되요?”
“어?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