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7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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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70화
70화
“그는 이미 환신술의 기초를 얻었어요, 할아버지.”
“뭐야?”
아극사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환신술은 벽라족이 지닌 세 가지 신비 능력 중 하나였다. 지상의 인간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오직 벽라족의 핏줄만이 익힐 수 있는 능력.
그런데 정말 풍천이 환신술의 기초를 얻었다면 유혼과의 동화가 생각보다 더 깊숙이 진행되었다는 뜻이었다.
유혼을 이용해서 그를 통제할 요량으로 벽혼계에 넣었거늘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줄이야!
“그게 사실이냐?”
아극사는 아수비가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가 환신술의 일 단계를 흉내 내는 걸 제가 직접 봤어요. 비록 서툴긴 했지만, 몸에서 옅은 안개가 흘러나와 몸을 흐리게 만들었어요.”
“으으음…….”
침음을 흘리며 눈을 두어 번 깜박인 아극사는 굳은 표정으로 아수비를 바라보았다.
벽라족의 핏줄이 아닌 이상 환신술을 얻는 것도 어느 한계에서 멈추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물론 벽라의 인이 심어져 있으니 별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자신이 우려하던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그때는 수습하기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멈추게 해야 해.’
결정을 내린 아극사가 아수비에게 말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를 더 이상 벽혼계에 놔둘 수 없다. 가서 데려와라.”
“떠날 때까지 그곳에 거주하게 한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공손곽이 배신을 하는 바람에 멸족당할 위기에 처했던 벽라족은 신의를 저버리는 자를 절대 용서치 않았다. 그리고 약속도 마찬가지였다.
아극사도 자신이 한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이용 대상일 뿐이라 해도 약속은 지켜져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의(信義)의 율법을 어기지 않고도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두어 가지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당장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저런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입구를 열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한 번 뿐. 그 날이 오려면 아직 열흘이 더 남아 있었다.
그래서 결국 아극사는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어차피 벽혼계에 들어가게 한 것은 그가 뭔가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에게 다른 걸 줄 생각이다. 그가 받아들인다면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니지.”
풍천이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곳에 더 있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럼 이제 벽라동을 떠나는 겁니까?”
풍천은 아수비를 바라보며 반색했다.
“아뇨, 나가려면 아직 열흘 정도 더 있어야 해요.”
“그럼……?”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길 거예요. 그 대신 할아버지는 당신에게 다른 대가를 주신다고 했어요.”
“다른 대가를 주신다고요?”
풍천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게 웬 떡이야!’
벽혼계에서 며칠 지내며 신기한 재주를 하나 배웠다. 잘하면 그것으로 천풍무영류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또한 푸른 기운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전신의 모든 혈맥이 깨끗하게 정화되었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데 대가를 또 준다니!
‘노인네가 마음씨도 좋지! 사람은 역시 피부색 보고 판단할 게 아니라니까?’
풍천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응낙했다.
“하, 하, 하. 뭐 그렇다면야…… 갑시다.”
‘휴우, 다행이네. 싫다고 했으면 할아버지가 곤란해질 뻔했는데.’
2
“받아라.”
아극사가 내민 것은 양피지로 된 책자였다.
“공손곽과 함께 왔던 자들 중 가장 강했던 자가 죽어가면서 남긴 것이다. 본래 원수의 것이어서 없애려고 했는데, 훗날 원수를 갚을 때 필요할지 몰라 선조들께서 보관해두었지.”
풍천은 양피지 책자에 쓰여 있는 제목을 바라보았다.
[뇌정천결(雷霆天訣)]
‘이름 하나는 거창하군.’
그 이름에 만족한 그는 겉장을 들춰보았다. 검을 든 사람이 전면을 가득 채운 채 그려져 있고, 공백에 마흔네 자의 구결이 적혀 있었다.
구결을 훑어보던 풍천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검결! 그것도 극상승의 검결이다!’
무사로서 뛰어난 무공을 얻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손가!
그러나 풍천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천풍문의 후예들은 고금제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신법과 경공술을 익혔지만, 다른 무공은 이상할 정도로 일류 수준 이상을 넘어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천풍문의 비전심법인 천풍심법 때문이었다.
천풍심법은 신법과 경공술에 있어선 최상의 심법일지 몰라도, 다른 무공을 익히기에는 적합지가 않았다. 일반적인 심법과 기의 운용 자체가 다른 것이다.
풍천도 선조들과 다르지 않았다. 차이라면 그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천풍문의 신법과 경공을 팔성이나 익혔다는 점이었다.
천풍문 역사 이래 가장 빠른 성과를 이룩한 기재!
하지만 그게 한계였다.
아마 그가 어떤 무공이든 단 하나라도 상승의 경지까지 익혔다면 운조평과 등청의 협공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신법으로 현혹한 후 뒤통수를 치는, 조금은 비열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그랬다. 그가 욕을 먹으면서도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공격만 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누군 정면대결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아?’
풍천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책자를 좀 더 살펴보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이것은 천풍심법의 흐름과 부딪치지 않을까?’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아극사는, 풍천이 그 무공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줄로 알았다.
‘별 볼 일 없는 것인가?’
벽라족은 지상의 인간들이 지닌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 그 바람에 지금껏 지상의 인간들이 남긴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벽라족이 생긴 이래 가장 강했던 족장과 동귀어진한 자가 남긴 것이어서 괜찮은 것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드는가보다.
잠시 풍천을 바라보던 그는 다른 것을 하나 더 주기로 했다.
“그 책에 더해서, 벽월적도 너에게 돌려주겠다.”
벽월적은 이미 풍천의 피를 머금었다. 벽라족이 아닌 타인을 주인으로 선택한 만큼 벽월적은 더 이상 벽라족의 보물이 아니다. 줘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풍천은 고개를 들고 아극사를 바라보았다.
구백 년 전에 잃어버린 벽라족의 보물이라 했다. 하기에 형이 남긴 유품임에도 내놓으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걸 자신에게 주겠다니.
“하, 하. 고맙습니다.”
풍천이 기뻐하자 아극사도 안도했다.
“전설에 의하면 벽월적은 단순한 피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함부로 불지 마라. 자칫하면 큰일 날지 모르니까.”
큰일?
“벽라동 입구가 열릴까 봐 그러십니까?”
멍청한 놈!
아극사는 풍천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며 조금 더 설명해주었다.
“전설에는[전설은], 벽월적에 혼이 실리면 세상에 혼란이 온다고 했다. 그리고 참된 주인이 아니면 부는 자의 혼을 집어삼킬 수도 있다고 했지. 무슨 뜻인지 확실하게 알진 못하지만 혹시라도 네게 해가 될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손바닥만 한 피리가 세상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니. 주인의 혼을 집어삼켜?
풍천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전설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하나둘이던가? 벽월적을 불면 용이 하늘에서 떼로 내려와 춤을 춘다고 말하면 그 말을 믿을 건가?
그는 아극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헛소리하지 말라며 비아냥거리지도 않았다. 마음을 바꿀지 모르니까.
“좌우간 조심하죠.”
아극사도 풍천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벽월적에 대한 것은 이쯤에서 넘어가기로 했다. 솔직히 그도 더 아는 것이 없었다.
“흠, 그럼 이제 거처를 옮기도록 해라.”
그때 풍천이 아극사의 가슴을 쿡! 찔렀다.
“그런데…… 왜 저를 벽혼계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까?”
“그게…….”
갑자기 일격을 맞은 아극사는 최후의 방법으로 답변을 회피했다. 벽라의 인을 움직인 것이다.
조금 비겁한 방법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크어어어억!”
‘이, 이…… 빌어먹을…… 늙은이가…….’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라.”
‘그러게 왜 대답할 수 없는 걸 묻느냐?’
“아, 알았으니…… 풀어주시……”
‘크윽! 분명…… 뭔가가 있어. 내가 그냥 물러설 줄 알고?’
아극사는 벽라의 인을 진정시키고는 손을 뒤로 뻗어 또 하나의 책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넌지시 내밀며 풍천을 다독였다.
“이제 너와 벽혼계와의 인연은 끝났다. 두 번 다시 벽혼계에 대해서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이걸 주마.”
공짜는 절대 거부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지닌 풍천이다.
“정 그러길 원하신다면야 뭐…….”
풍천은 조금 전까지의 원한(?)을 잊고 아극사가 내미는 책을 받아들었다.
‘물어보지 않고도 알아낼 방법이 있을 거야.’
내심 머리를 굴린 그는 두 번째 책자의 제목을 바라보았다.
[천라신수(天羅神手)]
제법 멋진 제목이었다.
천풍심법을 익힌 그에게는 그림의 떡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공짠데, 뭐.’
3
풍천은 석상이 가득한 광장 근처의 동굴 하나를 거처로 삼았다.
그런데 그가 벽혼계에서 나오자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불청객이 찾아왔다.
“유혼과 동화되어서 환신술의 기초를 익혔다고?”
왜? 불만이냐?
풍천은 아극령을 째려보았다. 그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서 좋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아극령은 동굴 안을 오락가락하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우와, 제법인데? 우리 벽라족도 환신술의 기초를 익히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에는 감탄했다는 표정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네까짓 게 익혀봐야 얼마나 익혔겠냐는 듯 조소가 떠오른 표정이었다.
풍천은 대꾸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극령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너희들하고 똑같은 줄 알아?’
아극령은 풍천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풍천의 능력쯤 되면 지상에서 어느 정도지? 강한 쪽에 속해?”
그러고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풍천은 그 모습을 보고는 아극령이 바로 자신을 찾아온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긴 자신의 실력이 바깥세상에서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고 싶었겠지.’
풍천은 돌려서 말했다.
“어디 가서 굶어죽지 않을 정도는 되지.”
신검문의 조장쯤 되면 먹고살 만한 위치잖아?
하지만 풍천의 말뜻을 곡해한 아극령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비록 풍천을 좋아하진 않아도 풍천의 실력까지 얕보는 것은 아니었다.
지닌 능력의 성질이 달라서 그렇지, 정식으로 싸움이 붙으면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실력으로 겨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라니.
지상의 인간들이 그렇게 강한가?
궁금해진 아극령은 풍천에게 넌지시 제의했다.
“우리…… 누가 센지 한번 겨뤄볼까?”
풍천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그것도 괜찮긴 한데, 네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지 않을지 모르겠군.”
“걱정할 것 없어. 우리 벽라족은 정식으로 겨루다 다친 것에 대해선 절대 뭐라고 하지 않으니까.”
‘그래? 그거 잘 됐군! 따귀를 몇 대 때려서 버릇을 확실히 고쳐놓아야지!’
풍천은 속으로 씩 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여전히 찝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 그렇다면 상관없지만…….”
아극령은 씩 웃으며 고갯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럼 저쪽으로 가. 대결하기 좋은 곳이 있거든.”
‘엉덩이를 걷어차서 기어가게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