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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풍전설 68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32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천풍전설 68화

 

68화 

 

 

 

 

 

 

낮게 깔린 목소리에서 오랜 세월 쌓인 한이 느껴졌다.

 

“누구도…… 지상의 인간들은 우리 벽라족의 원수니까. 하지만 우리는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해줄 수도 있다. 단, 우리를 위해서 한 가지 일을 해줘야 한다.”

 

풍천은 노인의 말이 끝나자 급히 눈알을 굴렸다.

 

거래를 하자는 건가?

 

그렇다면 마다할 풍천이 아니었다. 그는 천풍의 주인, 고금 제일의 해결사가 아닌가! 비록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지만.

 

“어떤 일입니까? 뭐든 말씀해 보십쇼!”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해주마. 하지만 이것은 미리 알아두어라. 네가 일을 마칠 때까지 네 몸에 금제를 가할 것이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풀 수 없는 금제지.”

 

풍천은 남의 꼭두각시가 되어서 움직이는 게 싫었다.

 

천풍의 후예가 남의 뜻대로 움직이다니!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흥정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꼭 금제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남자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벽라동과 맺은 계약을 마무리 짓겠다고 약속하지요. 이래 봬도 제가 약속하나는 목숨을 걸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 하, 하.”

 

풍천은 사기꾼들이 종종 하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고는 웃음을 지으며 노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백초령이라면 그 말에 넘어갔을지 몰랐다. 그러나 노인은 백초령이 아니었다.

 

“약속을 하겠다?”

 

“그렇습니다. 만약 약속을 어기면 저를 사람이 아닌 개돼지만도 못한 놈으로 취급하셔도 됩니다. 아니, 목을 잘라서 이곳 벽라동 입구에 걸어놓으셔도 됩니다. 어떻습니까? 한번 믿고 맡겨주시죠.”

 

당당한 목소리로 말을 맺은 풍천은 세상에서 가장 신의 있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으로 노인을 마주 보았다.

 

노인은 풍천의 수작에 넘어가기는커녕 오히려 한 수 더 떴다.

 

“네놈 말하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금제를 하나 더 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군.”

 

‘헛! 정말 말이 안 통하는 노인네군.’

 

깜짝 놀란 풍천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고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좋습니다. 뭐, 정 저를 못 믿으시겠다면 할 수 없죠.”

 

‘너 같은 놈을 어떻게 믿는단 말이냐?’

 

“저도 어르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공손곽이라는 인간에게 한번 당하셨는데 그럴 수도 있죠.”

 

‘이해한다니 다행이군. 멍청하긴 해도 말은 통하는 놈 같아.’

 

“하지만 여기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내걸어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목숨을 내걸고 일을 하려면 저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제가 노인장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노인장께선 저에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노인은 기이한 눈으로 풍천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만 해도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될 것 같았다. 겁에 잔뜩 질려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생각과 달리 제법 잔머리를 굴리며 깐깐하게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유령총에 들어온 것이 우연은 아니다, 이건가?’

 

노인은 묘한 눈빛을 반짝이며 한 번 더 풍천을 다그쳤다.

 

“다 죽을 놈을 구해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는 거냐?”

 

“그거야 제 운이 좋았던 거고요. 저는 얻는 게 없으면 사소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거든요?”

 

풍천은 넌지시 말하고는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보아하니 죽일 생각은 버린 듯했다. 그만큼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는 말. 그렇다면 적당한 한도 내에서 이익을 바라도 될 것 같았다.

 

혹시 알아? 생각지도 못한 걸 얻게 될지?

 

아님 말고.

 

‘위협한다고 해서 내가 무조건 따를 줄 알아?’

 

‘그놈, 잔머리가 보통이 아니군.’

 

노인도 나이를 날로 주워 먹은 것은 아니었다. 비록 폐쇄된 곳에서 살아왔지만, 근 백 년의 세월을 살아온 그가 아닌가.

 

풍천의 마음을 짐작한 노인은 바짝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네놈에게 어떤 금제를 걸었는지 지금 알려주마. 어디 나중에도 그런 말 하는지 두고 보자.”

 

순간이었다. 노인의 눈에서 기광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벽라의 인이 반응했다.

 

찰나, 풍천은 눈을 홉뜨고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크헉!”

 

떡 벌어진 입에서 절로 터져 나오는 비명!

 

뇌가 하얗게 비어가며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통증은 한군데서만 밀려드는 게 아니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것 같고, 심장과 단전과 백회혈이 그대로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으어어어어어…… 커커커컥!”

 

풍천의 몸이 어찌나 격렬하게 떨리는지 커다란 돌침상까지 흔들리는 듯했다.

 

노인은 열을 셀 동안 그대로 놔두었다가 벽라의 인을 진정시켰다.

 

“흐으, 흐으…….”

 

풍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노인을 노려보았다.

 

‘이 미친 늙은이가 내 몸에 무슨 짓을 저질러놓은 거야?’

 

하지만 물어보기가 겁났다. 자세한 것을 알면 정말 미쳐버릴지 몰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살려주십쇼!’ 할 그도 아니었다.

 

“이, 이런다고…… 내가 무조건 따를 줄 아슈?”

 

“아직 맛을 덜 본 모양이군.”

 

“흐으…… 어디…… 해보려면 맘대로 해보쇼. 까짓 거…… 죽기밖에 더 하겠어?”

 

참는 것과 오기라면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풍천이었다.

 

‘이 늙은이는 나를 죽이지 못해. 죽일 거라면 진즉 죽였지.’

 

죽지만 않는다면 제아무리 극심한 고통이 밀려든다 해도 버텨낼 수 있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노인은 풍천을 보며 기광을 번뜩였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놈이군.’

 

처음에는 기막힌 몸뚱이로 감탄하게 만들고, 이후에는 멍청해 보여서 실망을 주고, 그 다음에는 잔머리를 굴려서 곤혹하게 하고, 지금은 지옥에 빠진 고통조차 참아내는 참을성으로 전율이 일 정도의 경악을 하게 만든다.

 

어떤 것이 이놈의 진짜 모습이란 말인가?

 

노인은 한참을 생각하고는 마지막 모습에 가장 후한 점수를 주었다.

 

지옥에 빠진 고통을 참아낸다는 것은 결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놈이라면 가능할지도…….’

 

내심 기대감이 커진 그는 풍천을 확실한 벽라족 쪽 사람으로 만들 작정을 했다.

 

“좋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너를 벽혼계(碧魂界)에 들여보낼 테니, 네 재주껏 그 안에서 뭔가를 얻어라. 그 안에서 얻는 것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겠다.”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소녀와 소년과 못생긴 사람이 일제히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조금 더 고통을 주면 될 것 같은데요.”

 

“괜찮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저런 멍청한 놈이 견뎌낼 수 있을까 모르겠군요. 족장님의 판단을 못 믿는 것은 아닙니다만…….”

 

풍천은 못생긴 사람을 흘겨보았다. 아무리 봐도 정말 못생긴 얼굴이었다.

 

‘얼굴만 못생긴 것이 아니라 말도 더럽게 하네.’

 

오기가 생긴 그는 자신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못생긴 사람과 건방진 꼬마가 반대하는 걸 보니, 노인이 말한 곳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좋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죠.”

 

소녀의 걱정하는 표정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차피 유령총에 들어올 때부터 이판사판이었다.

 

‘설마 죽을 곳에 들여보내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되었다.

 

‘이 빌어먹을 괴상한 금제에 대한 건 나중에 생각하자, 풍천.’

 

 

 

노인은 풍천이 움직일 수 있도록 혈을 풀어주었다.

 

풍천은 몸을 움직여봤다. 외상은 물론이고 제법 깊었던 내상도 어느새 반 정도는 나아서 움직이는데 이상이 없었다. 아마도 정신을 잃은 사이 이들이 손을 본 듯했다.

 

‘휴우, 치료한다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는 몸이 좋아진 것에 만족하고 다른 불만을 내비치지 않았다.

 

‘하나하나 시작하자. 불평을 하면 진짜 다른 금제를 또 할지 몰라.’

 

노인의 성격으로 봐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풍천이 돌침상에서 일어나 앉자 노인이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나는 아극사라고 한다.”

 

그러고는 나머지 세 사람, 소녀와 얼굴이 못생긴 중년인과 소년을 하나하나 쳐다보며 말했다.

 

“저 아이는 아수비, 저 사람은 아극타, 저 아이는 아극령이다.”

 

“저는 풍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몇 분이나 사십니까?”

 

풍천도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천연덕스런지 조금 전까지 죽네 사네 하던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신경이 무딘 놈이군.’

 

‘재미있는 사람이야.’

 

‘확실히 조금 모자란 사람 같아.’

 

아극타와 아수비와 아극령은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극사만은 달랐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풍천이 자신의 생각보다 더 위험한 놈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보면 볼수록 속을 알 수 없는 놈이군. 아이들에게 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러둬야겠어.’

 

그런데 그가 미처 충고하기 전에 아극령이 대답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은 우리뿐이야.”

 

‘이런.’

 

벽라동 안에 단 네 명만 산다는 것을 알게 되면 풍천이 자신들을 얕볼지 모르거늘…….

 

아극사는 책망하는 눈빛으로 아극령을 바라보고는 풍천의 변화를 살폈다.

 

그러나 그의 염려와 달리, 풍천은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 자식들을 계속 낳았을 텐데 숫자가 왜 이리 적죠?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무려 구백 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숫자가 늘어나기는커녕 줄어들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일에 대해선 아수비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 벽라족의 여인은 아이를 많이 낳지 못해요. 지신(地神)의 보살핌이 있으면 둘을 낳고, 아니면 하나가 고작이죠. 못 낳을 때도 있고요.”

 

어렴풋이 이들의 사정을 알 것도 같다.

 

아수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부족의 숫자가 쉽게 늘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병이라도 들어서 제 명을 못 살고 죽는 사람이 생기면 숫자가 줄어들 수도 있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친족 간에도 부부가 되는 경우가 있겠군.’

 

종족 보존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왠지 벽라족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몇 사람이서 수백 년 동안 종족을 이어오다니, 정말 고생이 많았겠군요.”

 

풍천은 그래도 벽라족을 걱정해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아극령이 피식 조소를 지으며 쏘아붙였다.

 

“당신 같은 지상 사람들 때문에 한 고생이야. 걱정해주는 척 하지 마, 역겨우니까.”

 

‘그 자식, 어린놈이 되게 싸늘하군.’

 

풍천은 아극령을 째려보았다.

 

얼굴은 제법 귀엽게 생겼는데 눈초리를 보니 말을 더럽게 안 들을 것 같고, 고집도 무진장 세 보였다.

 

‘저런 놈은 작신 패면서 가르쳐야 하는데 아극사 노인이 너무 오냐오냐 길렀군.’

 

그는 그런 애들이 싫었다. 자신의 동생이었으면 확실하게 버릇을 고쳐놓았을 텐데…….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아극령은 게으른 악귀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걸 생각도 못하고 한마디 더했다.

 

“멍청하게 생겨서 그런지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는군.”

 

‘걸리기만 해봐라, 이놈. 내가 확실하게 개조해줄 테니까.’

 

 

 

2

 

 

 

벽라동에 사는 사람들의 주식은 물고기와 버섯이었다.

 

물고기는 풍천이 빠졌던 그 지하 호수에서 잡았고, 버섯은 외부로 나가는 통로의 상부에서 자라는 것을 하루에 한 번씩 따온다고 했다.

 

하루 반을 꼬박 굶은 풍천은 아수비가 가져다준 식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하얀 물고기는 비린내가 심했지만 삼매진화로 익히고, 양념을 조금 바르자 먹을 만했다.

 

아수비는 풍천이 먹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익혀 먹는 것도 처음 봤고, 물고기에 바른 양념도 처음 맡아보는 냄새여서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게 먹으면 맛있어요?”

 

“먹어볼래요?”

 

풍천은 손바닥보다 조금 큰 물고기를 내밀었다. 이미 양념이 발라져서 익은 상태였다.

 

아수비는 망설이더니 슬그머니 손을 뻗어 물고기를 받았다.

 

그녀가 손을 뻗자 주먹만 한 가슴이 살짝 출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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