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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풍전설 67화

무료소설 천풍전설: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24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천풍전설 67화

 

67화

 

 

 

 

 

 

제6장. 벽라동(碧羅洞), 벽혼계(碧魂界)

 

 

 

 

 

1

 

 

 

“끄응.”

 

풍천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뭔가 엄청난 고통이 그를 나락으로 빠뜨렸던 것 같은데 그 느낌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다.

 

‘뭐지? 꿈을 꾼 거였나?’

 

그때였다. 실처럼 가늘게 뜬 눈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들었다.

 

눈을 두어 번 깜박이는 동안 유령총에 들어온 이후의 상황을 모조리 기억해낸 풍천은 눈알을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이 꿈을 꾼 것이었으면 했는데 아무래도 그런 희망은 물 건너간 것 같았다.

 

‘제길, 꼭 나쁜 일은 현실이고 좋은 일은 꿈이라니까.’

 

특히 여자를 끌어안았을 때는 항상 꿈이었다.

 

‘입 맞추려면 꼭 잠에서 깬다니까, 빌어먹을.’

 

속으로 투덜댄 풍천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가 있는 곳은 푸르스름한 빛이 가득한 석실이었다.

 

누워 있는 침상은 청광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한쪽에는 광장에서 봤던 석상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머리 뿐, 다른 곳은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근데 왜 이렇게 무릎이 아프고, 팔도 땅기고, 온몸이 찌뿌듯하지?’

 

제법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니 정상이 아닌 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느껴지는 통증은 왠지 기분이 나빴다. 마치 정신을 잃었을 때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풍천은 기분 나쁜 감정을 일단 구석에 구겨 넣었다.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살아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찾아온 게 반갑지 않으면 때릴 수도 있지 뭐.,안 그래?’

 

그에 대한 빚이야 나중에 갚으면 되는 것이고.

 

그는 유령총에 사는 이상한 인간들이 자신을 두들겨 팼다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눈을 완전히 떴다.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정신이 드나보군.”

 

헉!

 

풍천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석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 있었다.

 

입을 연 사람은 한쪽에 앉아 있는 세 개의 석상 중 노인의 형상을 한 석상이었던 것이다.

 

“사, 사람이었습니까?”

 

“그럼 내가 진짜 유령인 줄 아느냐?”

 

청광석에서 나는 빛 때문인지 노인의 살결은 기괴하게 보일 정도로 푸르스름했다. 머리카락도, 수염도, 이도.

 

심지어 눈동자는 가을하늘처럼 더욱 파란 쪽빛이었다.

 

노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옆에 있는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푸르스름한 살결에 쪽빛의 눈.

 

풍천의 눈에는 그들이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유령이라고 하면 두 말 않고 믿을 텐데…….’

 

하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풍천은 슬그머니 눈을 돌려 노인의 옆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 소녀는 조금 낫군.’

 

그의 눈이 멈춘 곳에는 소녀가 서 었다. 그녀는 아주 귀여운 얼굴이었는데, 풍천은 오래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입은 옷이라고는 달랑 아래를 가린 가죽뿐이어서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으니까.

 

‘가슴도 좀 가리지.’

 

물론 보기 싫은 모습은 아니었다. 크기도 아직 완전하지 않아서 당장 어떤 감정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고.

 

“진짜 사람, 맞죠?”

 

풍천이 머뭇거리며 묻자 소녀가 괴이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다 당신의 마음에 달린 일이니까요.”

 

신비할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말투가 이상했지만 뜻을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전에 보니까 눈이 허공에 떠 있던데요. 그건 뭐죠?”

 

풍천이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소녀가 풍천의 머리 위쪽을 쳐다보았다.

 

풍천은 슬며시 눈을 치켜뜨면서, 턱을 들고 소녀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머리 위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허공에서 맴돌고 있는 눈이 확 달려들었다.

 

“흐읍!”

 

풍천이 비명처럼 헛바람을 집어삼키자 노인이 눈을 향해 말했다.

 

“장난 그만해라, 령.”

 

“크크크…….”

 

비웃음소리와 함께 허공에 떠 있던 눈이 스르르 사라지는가 싶더니 한쪽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뭉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 열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다른 사람과 똑같은 모습의 소년이었다.

 

‘뭐야? 새파랗게 어린놈이잖아?’

 

그런데 소년의 얼음처럼 차가워 보이는 쪽빛 눈과 마주친 순간, 풍천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청광석 침상 위에 누워 있고, 네 사람은 한쪽에 서 있었다.

 

왠지 야릇한 광경,

 

청광석 침상은 도마고 자신은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살결이 푸른 네 사람은 먹음직스런 고기를 앞에 놓고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들 같고.

 

‘설마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이런 지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물며 그들의 식성이 어떠한지 누가 안단 말인가.

 

‘이곳은 먹을 것도 별로 없을 것 같아. 벌레든 뭐든 닥치는 대로 먹고 살지도…….’

 

그러니 사람을 잡아먹는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 안 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풍천은 안간힘을 다해서 진기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진기는 한 톨도 움직이지 않고 몸조차 꿈쩍하지 않았다.

 

풍천이 자꾸 몸을 비틀려고 하자 노인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어리석은 짓 하지 마라.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목 아래쪽으로는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

 

그의 말투도 소녀와 비슷했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반 정도? 하지만 내용을 알아듣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풍천은 최대한 애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좀 풀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다친 곳이 많아서 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저 무지 맛없는 사람이거든요? 잡아먹지만 마십쇼! 크흑!’

 

마음 같아서는 거짓 눈물이라도 흘리며 애원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노인은 풍천의 애원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릴 것이다. 묻는 대로 순순히 대답해준다면 금제를 풀어주마.”

 

“그래도 손님인데 조금 봐주면 안 됩니까?”

 

“손님?”

 

“유령적을 불어서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 정식으로 초대받은 손님이나 마찬가지잖습니까?”

 

“후후후후, 손님이라…….”

 

나직이 웃는 노인의 두 눈에서 은은한 분노가 일렁였다.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반응이다.

 

‘왜 저런 표정이야? 내가 말을 잘못했나?’

 

불안함을 느낀 풍천은 할 말이 많았지만 입을 꾹 닫고 노인의 말을 기다렸다.

 

노인은 손에 들린 유령적을 청광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하긴 도적놈이 훔쳐간 벽월적을 구백 년 만에 가지고 왔으니 너무 심하게 대하면 안 되겠지.”

 

벽월적? 유령적을 말하는 건가?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풍천을 노려보았다. 차가운 눈빛이긴 했지만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잡아먹지는 않을 모양이군.’

 

마음이 조금 안정된 풍천은 유령적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넌지시 물었다.

 

“누가 그걸 훔쳐갔었나 보죠?”

 

노인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훔쳐갔냐고? 그래, 이곳을 피바다로 만들고 훔쳐갔지.”

 

처절한 원한이 있는 것 같더니, 그래서였나?

 

풍천은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어떤 나쁜 놈이 그런 짓을! 누굽니까? 그런 놈은 절대 용서하면 안 되죠!”

 

노인은 풍천의 눈을 직시하고는 이름 하나를 툭 던졌다.

 

“공손곽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느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요?”

 

풍천은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상대의 의도를 모르는 이상 조금 모자란 듯 행동하는 것이 나았다.

 

노인이 계속 질문을 던졌다.

 

“천상신문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느냐?”

 

“그런 문파도 있습니까?”

 

노인은 풍천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조금 멍청하게 보이는 표정에서 일말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모르는 것 같군.’

 

어느 정도 짐작했던 일.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정말 그놈들과 관계가 없는 놈이라면 이용하면서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을 테니까.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

 

“하, 하. 그거야 뭐…… 유령총의 지하 아니겠습니까요.”

 

어째 대답하는 모습과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몸은 괜찮은데 머리가 좀 떨어지는 놈인가?’

 

노인은 풍천을 쏘아보고는 유령총의 유래에 대해서 알려주기로 했다. 어차피 이용해먹으려면 기본적인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할 것이었다.

 

“왜 이곳을 유령총이라 부르는지 아느냐?”

 

‘당신들이 유령처럼 보여서 그렇게 부르는 것 아닐까?’

 

풍천은 속으로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눈을 허공에 두고서 한 서린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구백 년 전의 어느 날, 다 죽어가던 한 사람이 이곳 벽라동에 떨어졌다.”

 

“아! 유령총의 원래 이름이 벽라동인가 보군요.”

 

노인은 자신의 말을 끊는 풍천을 짜증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풍천은 흠칫하며 재빨리 노인을 달랬다.

 

“하, 하. 저는 상관하지 마시고 계속 하시죠. 저도 그 다음 이야기가 무지 궁금하거든요.”

 

노인은 짜증을 가라앉히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용하려는 대상이 멍청해 보이긴 하지만 이미 벽라의 인까지 심은 상태. 더구나 구백 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우리는 성심을 다해서 그자를 살려준 후 밖으로 내보냈는데 그는 우리를 ‘악마의 피를 지닌 사악한 무리’라며 동료들을 데리고 쳐들어와서 피바람을 일으켰다.”

 

 

 

공손곽. 그는 벽라족에게 신비한 힘이 있다는 걸 알기에 최고의 강자들을 데려왔다.

 

하지만 벽라족의 능력은 공손곽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했다. 특히 벽라족이 익힌 환신술(幻身術)은 가공하리만치 무섭고 신비했다.

 

결국은 공손곽의 뜻대로 벽라족 대부분이 죽음을 당했지만 그가 데리고 온 자들도 살아남은 자가 몇 되지 않았다.

 

벽라일족이 그리 강할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공손곽 일행은 분노와 광기에 사로잡힌 채 살아남은 벽라족을 처참하게 유린했다.

 

당시 살아남은 벽라족은 대부분이 힘없는 노인과 여인, 어린아이들이었다.

 

공손곽 일행은 상상할 수도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그들을 유린하고 죽였다. 벽라족은 사람이 아니라며, 죽으면 유령이 될지 모른다며 사지를 자르고, 몸을 짓이기고, 불에 태웠다.

 

여인은 윤간을 한 후 죽였고 어린아이는 산 채로 심장과 생간을 빼 먹기도 했다.

 

당시 벽라동은 그 자체가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벽라동은 유령총이 되었다.

 

아마 그 당시 몇 사람이 치욕을 무릅쓰고 한쪽 구석에 숨어서 살아남지 못했다면, 유령총은 말 그대로 유령들의 무덤이 되었을 것이었다.

 

당시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열한 명.

 

그들은 공손곽이 떠나면서 막아놓은 유령총의 입구를 다시 뚫은 후 기관을 보강해서 벽라동을 외부와 완전히 단절시켰다. 그리고 수백 년에 걸쳐서 죽은 이들의 원혼을 위로할 제단을 만들고, 동굴 곳곳에 조각을 하며 자신들의 한 맺힌 마음을 달랬다.

 

유령탑이 세워진 것도 그때였고 지하의 미로가 만들어진 것도 그때였다.

 

그들은 석문에 벽월적을 불어야만 석문을 열 수 있다는 암시를 해놓았는데, 그렇게 한 것은 공손곽 일행 중 누군가가 훔쳐간 벽라족의 보물, 벽월적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결국 네가 찾아왔다.”

 

허공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끝맺은 노인은 고개를 내려 풍천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지상의 인간들을 누구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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