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전설 6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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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천풍전설 66화
66화
흠칫.
풍천은 뒷목이 싸한 느낌에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대여섯 개의 석상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
“후우, 간이 작아졌나? 왜 이리 이상한 기분이 들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눈을 향해 걸어갔다.
순간 앉아 있던 석상의 두 눈에서 청광이 번뜩였다.
‘설마 내 기척을 눈치챈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상의 인간이 지닌 능력으로는 절대 자신의 기척을 눈치챌 수 없었다.
‘우연이겠지, 저 따위 놈이 어떻게…….’’
그때 걸어가던 풍천이 말했다.
“앉아 있는 석상은 얼굴이 정말 못생겼군.”
앉아있는 석상의 머리 위에서 푸르스름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지친 풍천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둥둥 떠 있는 눈만 쳐다보며 걸어갔다.
이곳은 유령총. 어떤 신비한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었다.
‘설마 진짜 유령은 아니겠지?’
잠시 후.
엉망인 몸을 겨우겨우 이끌고 눈이 있는 곳에 도착한 풍천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미, 진짜 유령이 있나봐.’
눈은 허공에 떠 있었다. 게다가 깜박이기까지 했다.
“누, 누구쇼?”
풍천은 용기를 내서 눈을 향해 물었다.
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싸늘한 바람이 밀려드는가 싶더니 풍천의 몸을 감쌌다.
대항할 틈도, 힘도 없었다. 풍천은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그 직후 석상 몇 개가 쓰러진 그의 주위로 다가왔다. 노인의 형상을 한 석상도 있었고 소녀의 모습을 한 석상도 있었다. 그리고 풍천이 지나치면서 봤던 얼굴이 못생긴 석상도 있었다.
그들은 가죽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짧은 하의만 입고 있었는데 남자뿐만이 아니라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안으로 옮겨라.”
노인의 형상을 한 석상이 말했다. 그러자 못생긴 얼굴의 석상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하죠.”
그는 풍천의 팔을 잡고 질질 끌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못생겼다고 한 놈은 그런 대접을 받아도 쌌다.
‘그나마 발을 잡고 가지 않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이놈.’
발을 잡고 가면 뒤통수가 깨지든, 얼굴이 엉망이 되었을 텐데…….
4
얼굴이 못생긴 자는 풍천을 청광석으로 만든 돌침상에 대충 올려놓았다.
노인은 풍천의 몸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참 동안 살펴보더니 눈빛을 번뜩였다.
피리소리가 들리자, 오직 벽월적(碧月笛)의 소리에만 반응하는 마물 광충(光蟲)이 구백 년 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자신의 생전에 벽월적의 소리를 들을 줄이야!
그는 손자를 보내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구백 년 만의 방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만약 원수가 보낸 자라면 죽여서 그 피로 원혼을 달랠 것이고, 아니라면 부족의 보물을 회수한 후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세심히 살펴본 방문자의 몸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제법 심각한 부상조차 큰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순간, 그는 벽월적만 회수하고 밖으로 내보내려던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그보다 훨씬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이 정도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군.’
그때 얼굴이 못생긴 자가 풍천과 노인을 번갈아 보고는 넌지시 물었다.
“족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죽여버리죠?”
“아니다, 죽여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몸이야. 이놈을 잘만 이용하면 우리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볼 수 있겠어.”
“이미 엉망이 된 몸뚱인데 가능하겠습니까?”
“부서진 몸이야 고치면 된다. 그리 크게 다친 것도 아니니까.”
“우리 부족의 원수가 보낸 놈일지도 모르잖습니까? 자칫 벽라의 한(恨)이 재현되기라도 하면…….”
“절대 그리 되게는 하지 않을 것이다.”
노인은 나직이 말하고 얼굴이 못생긴 중년인을 직시했다.
“벽라의 인(刃)을 이놈의 몸에 심어놓을 생각이다. 그럼 허튼수작을 부릴 수 없을 거야.”
얼굴이 못생긴 중년인이 눈을 크게 떴다.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소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 이자가 벽라의 인을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가능성은 반반이다.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온몸이 말라서 죽겠지. 벽라의 인에 모든 기운을 빼앗긴 채. 하지만 이놈의 몸이 벽라의 인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의 한을 푸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중년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노인의 의중을 짐작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배신하지도 못하겠지요.”
노인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지하 세계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벽라족의 족장이었다.
벽라의 인은 벽라족이 수백 년에 걸쳐서 신비의 대법으로 만든 마물(魔物)이었는데, 그는 벽라의 인에 대해서 족장만이 아는 또 다른 비밀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조카나 손자, 손녀가 알면 자신의 계획을 반대할지 모르니까.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자. 설령 이자가 천운을 타고난 자라 해도, 한을 풀 수만 있다면야…….’
노인은 마음을 정하고 허공을 쳐다보았다. 눈이 둥둥 떠 있었다.
“령아는 가서 벽라의 인이 든 함을 가져와라.”
노인의 말이 끝나자 허공에 떠 있던 눈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푸르스름한 침상 위에 한 자 길이의 푸른색 함이 놓였다.
노인은 손을 뻗어 함을 열었다.
안에는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반투명한 푸른 칼날이 들어 있었다. 길이는 한 뼘 정도, 두께는 종잇장보다 얇아서 마치 매미날개가 겹겹이 겹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힘을 지녔으며 주인의 의지를 통제할 수 있는 벽라의 인. 그것은 한을 씹으며 살아온 벽라일족이 수백 년 동안 모든 능력을 기울여 만든 마물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손목을 손톱으로 그어서 피를 낸 후 벽라의 인에 떨어뜨렸다.
푸르스름한 빛이 더욱 진한 광채를 뿜어내며 피를 빨아들였다.
“몸에 걸친 것을 벗겨라.”
노인이 말하자 소녀가 풍천의 옷을 벗겼다.
상의를 벗기자 돈주머니와 양념통이 옆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가슴 위에 놓여 있는 유령적이 보였다.
소녀는 돈주머니 안을 슬쩍 들여다보고는 한쪽에 대충 던졌다. 금빛과 은빛으로 빛나는 돌은 그녀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양념통에서 나는 냄새가 더 신기했다.
“이런 걸 왜 가지고 다니지?”
그때 노인이 풍천의 목에서 목걸이를 벗겨냈다.
“그게 벽월적인가요?”
고개를 돌린 소녀는 유령적을 벽월적이라 부르며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얼굴이 못생긴 중년인과 허공에 떠 있던 눈도 벽월적을 응시했다.
노인은 감회가 서린 눈빛으로 벽월적을 바라보며 자신이 아는 바를 말해주었다.
“태고 적, 이곳 벽라동에 살던 벽룡의 뿔을 잘라 만들었다는 것이다. 광충이 벽월적의 주인을 따른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이 할아비도 다른 용도에 대해선 정확히 모른단다.”
“제가 불어봐도 되요?”
노인이 벽월적을 넘기자 소녀가 입으로 가져가 불어보았다.
훅, 후욱…….
풍천이 처음 불 때처럼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났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벽월적을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할아버지, 그런데 왜 벽월적의 색이 벽색이 아니죠?”
벽월적을 건네받던 노인의 표정이 파르르 떨렸다.
그제야 뭔가가 생각난 듯 노인은 벽월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곧 벽월적의 색이 붉다는 것을 깨닫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벽월적이 혈을 머금었다. 그것도 타족의 혈을…… 맙소사! 우리 벽라족의 보물이 타족의 사람을 주인으로 삼다니.’
노인은 청광석 침상에 누워 있는 풍천을 노려보았다.
벽월적이 혈을 머금은 이상 벽라족의 보물은 이제 벽라족의 것이 아니었다.
구백 년 만에 돌아온 보물이 타족의 피를 머금다니.
그는 풍천의 목을 잘라내고 심장을 짓이겨서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죽인다 해도 벽월적의 주인은 바뀌지 않을 터 그는 숨을 길게 들이쉬며 살심을 가라앉혔다.
‘네놈에게 시킬 일이 있다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갈등을 정리한 노인은 벽월적을 한쪽에 내려놓으며 담담히 말했다.
“아무래도 벽월적이 이자의 피를 빨아들인 것 같구나.”
노인을 제외한 세 사람은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벽월적은 더 이상 벽라족의 보물이 아니라는 걸.
그러나 벽라족의 족장인 노인조차 벽월적이 피를 머금었기에 광충을 움직일 수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때 소녀가 풍천의 하의를 벗겼다.
노인과 못생긴 얼굴의 중년인과 허공에 뜬 눈이 모두 풍천의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풍천의 하의를 한쪽에 던져놓고 노인을 향해 방긋 웃었다.
“다 벗겼어요, 할아버지.”
“하의는 안 벗겨도 되는데…….”
“그럼 다시 입혀요?”
“그냥 놔둬라.”
벽라족은 남녀라는 구분 자체가 종족 보존의 의미로서만 존재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소녀는 풍천의 모든 것을 보고도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과 색이 다른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을 조금 신기하게 생각할 뿐. 그곳에 난 이상하게 생긴 털도 신기했고.
‘확실히 우리와 많이 달라. 벽라족은 저기에 털이 없는데…….’
5
스으으으…….
한 뼘 길이의 푸르스름한 칼날이 풍천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가슴에선 피도 나지 않았고 살이 갈라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칼날은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칼날의 형체가 가슴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노인이 풍천의 심장에 심은 칼날은 모두 세 개. 칼날이 하나씩 심장에 심어질 때마다 풍천의 몸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노인은 또 다른 세 개의 칼날을 마저 기해혈에 심어놓고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이제 마지막 하나만이 남은 상황. 그 하나는 머리에 심어야 하는데 문제는 바로 그 하나였다.
그 하나가 잘못되면 지금까지의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다.
“령아, 네가 할아비 좀 도와줘야겠다.”
노인이 말하자 허공에 떠 있던 눈이 노인의 등에 달라붙었다.
노인은 손바닥 위에 벽라의 인을 올려놓고 손끝을 누워 있는 풍천의 백회혈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순간, 노인의 몸에서 푸른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동시에 등에 달라붙어 있던 눈에서도 푸르스름한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찰나였다. 노인의 손에 있던 칼날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풍천의 백회혈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풍천의 몸이 더욱 거세게 떨렸다.
아마 정신이 든 상태였다면 지옥의 유황불에 온몸이 녹아드는 고통을 느끼고 반쯤 미쳐버렸을 것이었다. 석실이 무너질 정도로 비명을 질렀을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하지만 그의 몸은 모든 감각이 마비된 상태였기에 얼굴에서 별다른 고통의 표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이질적인 기운의 침습에 몸이 충격을 받아 떨리는 것일 뿐.
노인은 일곱 번째 벽라의 인을 풍천의 백회혈에 심어놓고 한참 만에 눈을 떴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성사는 하늘에 맡길 뿐.
“어떠냐?”
소녀가 풍천의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현재까지는 괜찮아요, 할아버지.”
“다행이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몸이야.”
일곱 개를 모두 심을 동안 벽라의 인은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았다.
방문자의 몸이 벽라의 인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최상급이라는 뜻이었다.
“이제 옷을 입혀라.”